오십대 이상의 세대는 스스로 놀이를 만들었다. 눈에 보이거나 손이 잡히는 것들을 놀이로 삼았다. 어릴 적 놀이는 모험이 대부분이었고, 위험성도 모르는 채 온종일 바깥에서 미쳐 지냈다. 야산을 오르거나 땅굴을 헤집기도 하고, 숲속 골짜기에서 못으로 용감무쌍하게 다이빙하기도 했다.
이웃집 쌀가게에 세워둔 무거운 어른 자전거를 겨우 다리에 걸치고 비틀거리거나, 어쩌다 얻어 걸린 스케이트 하나를 서로 돌려가며 얼음을 지칠 때, 머리를 보호해주는 헤드서포트 같은 것은 쓰지도 않았으며, 아예 없었다.
놀이 중 백미는 이웃 생선 가게의 물건 나르는 바퀴 달린 상자였다. 우리는 '단카'라고 불렀다. 이 '단카'로 언덕 위에서 누가 빨리 내려오는지 가늠했던 경주는 위험천만한 놀이였다. 빠른 속도를 제어하는 것은 발뿐이었다. 여차해서 발바닥으로 브레이크를 걸 때 멈칫하는 짜릿함을 즐겼다. 그래도 빨리 가려고 여간해서는 발을 맨땅에 내리지 않았다.
돌부리에 걸리면 대형 사고였다. 온몸으로 굴러 떨어지고, 까지기가 다반사였던 스피드모험은 살 떨리는 추억이다. 그땐, 무르팍이 깨져도 상관없었고, 정신적인 외상은 애초부터 없었다. 까진 무르팍은 빨간색 소독약만으로도 해결됐고, 머리가 터졌어도 서로 어깨를 토닥여 주면 그만이었다.
어른이 되고, 점차 형편이 나아지면서 승용차를 타기 시작한 80년대 이후부터 사람들은 에어백이 없이도 잘들 자동차를 타고 다녔다. 아이들은 뒷좌석에서 앉아 찧고 까불면서 놀았다.
그 시절에는 책상이나 문짝에 페인트를 칠하고도 위해물질에 대한 우려 보다는 색깔이 멋스럽다는 것에 만족했다. 환하고 고운 빛깔의 페인트는 십중팔구 납이나 위험물질이 함유 되어 있었지만….
산업현장도 마찬 가지였다. 섭씨 1000여도를 넘나드는 철강공장에서도 안전장구는 사치품 정도로 취급됐다. 뜨거운 쇳물이 튀어드는 것을 방지 하느라 군화 윗부분에 양철 쪼가리를 덧대기도 했고, 군화 밑바닥에 타이어를 붙여 신고 다녔던 초라한 70~80년대의 산업 현장 풍경은 마치 영화 <콰이강의 다리>에 나오는 군인들과 다를 바 없었다.
치명적인 위해물질을 발생 시키는 석면을 공기정화 장치 하나 없이 태운다거나 안전모 착용이 거추장스러워 면으로 만든 작업모를 폼 나게 쓰고 다녔던 시절엔 낙하사고나 추락사고로 생명을 잃는 경우가 드물었다.
전철 안에서는 모자간의 실랑이를 흔히 보게 된다. 4~5세가량의 어린 아이는 엄마의 휴대폰으로 뽀로로를 보는데 정신이 팔려 있고, 엄마는 그만 보라고 연실 휴대폰을 빼앗는 장면이다. 아이는 울면서 생떼를 쓰는데, 엄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문득, 손가락으로 연지곤지 찍던 모자간의 모습이 오버랩 되는 것은 디지털 문명에 잊혀진 과거와 현재를 잇는 정감어린 우리 고유의 풍경이 그립기 때문이다.
지나친 컴퓨터 게임 중독이나 휴대폰에 온종일 얼굴을 묻고 사는 자녀를 둔 부모들은 진즉에 제동을 걸지 못한 좌절감을 느낄 것이다. 휴대전화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그 시절, 부모들은 우리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지만, 잘못한 일은 늘 아이들 몫이었고, 우리들은 스스로 바지를 걷고 종아리를 맞았었다. 그렇게 매를 맞아도 부모에게 외면당한 아이로 취급 받지 않았다. 오히려 매를 든 부모와 매를 맞는 아이 사이의 간극에 애정이 흠뻑 배어 있었다.
공부도 그랬다. 잘하면 우등반에 있었고 못하면 유급이었다. 유급을 했더라도 바보천치 소리를 들내지 않아서 공부 때문에 심리치료를 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바는 별로 없다. 요즘의 세태는 '조급증'이다. 남들 다하는 과외를 못 보내면 안달을 하고, 예체능까지 보태서 과외비로 엄청난 비용을 지출한다. 남들 다하는데 나만 안하면 뒤처지는 것 같은 세태, 정답은 뭘까?
살아남은 세대는 불평보다는 배려를, 시끄러움 보다는 조용함을 미덕으로 알았다. 큰소리가 담을 넘지 않았다. 삶속에 스며있는 미풍양속이 우리 삶을 단단히 지켜준다고 굳게 믿었다. 생존의 법칙은 소리가 나지 않아야 하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중심이 있어야 한다.
김종대 칼럼니스트(전 동국제강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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