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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詩] 달이 기우는 비향 / 김성철

시계아이콘읽는 시간45초

달이 기우는 곳에서부터 비가 내렸으면 좋겠어 그 비를 방 안으로 불러와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온몸으로 흠뻑 두들겨 맞고서는
정수리부터 젖꼭지까지, 젖꼭지부터 발끝까지
빗소리를 죄다 담아 둬야지
몸에서 나는 소리를 담고서 비가 떠나는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종일토록 방바닥에 붙어 빗소리를 개야지 옷장에도 넣어 두고 이불장에도, 신발장에도 달빛 먹은 비향을 쟁여 두지 남은 것들은 생쌀에 씻어 밥솥 가득 밥을 짓고 또 남은 것들은 밑물로 써야지


불이 꺼지면 비향을 꺼내 당신 딛는 발걸음마다 푸른빛으로 물들여야지 이름을 부르기 전 닫힌 창 열어제치고 물결 모양 톱니 돌려 줄기 돋우면 소쩍새 울음소리 같은 당신 목소리

달이 기우는 곳에서 비가 오면 당신보다 먼저 비를 부르고서
물푸레나무처럼 차분하게 늙어 가야지
달이 기우는 비향 쟁이고서 파랗게 물든 당신 기다려야지


■ 왜 그럴까?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비가 오면 당신 생각이 나곤 한다. 당신과 헤어지던 날, 그날 비가 내렸던가?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그래도 비가 오면 당신 생각이 난다. 당신을 처음 만나던 날에 비가 왔던가, 아니면 당신에게 고백하던 날 그 저녁에 비가 왔던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니 정말 비가 왔더라면 비가 왔었다고 기억하지 않을까? 모르겠다. 모르겠는데, 비가 오면 당신 생각이 난다. 꽃비가 내리면 하늘하늘 당신 생각이 나고, 여우비가 내리면 여우비만큼 반짝, 소나기가 내리면 우뚝 멈춰 서서 그 자리에서 당신을 다 맞곤 한다. 모르겠다. 비가 오면 왜 그러는지 왜 그러고만 있었는지 여태껏 도통 몰랐다. 몰랐는데, 이 시를 읽고 나니까 조금은 알 것도 같다. 그랬구나, 당신, "달이 기우는" 저쪽에서 빗소리, 비향 하나 놓치지 않고 "죄다 담아" 두고 있었구나. 그 빗소리로, 그 비향으로 "생쌀"을 씻어 밥을 하고 "물푸레나무처럼 차분하게 늙어 가"고 있었구나. 그래서였구나. "달이 기우는 비향 쟁이고서 파랗게 물든 당신"이 마침내 출렁여 내게 오고 다시 오고 있었던 거구나. 이 비가 오롯이 당신이었던 거구나.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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