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걷기왕'으로 뚜벅뚜벅 돌아온 심은경
페이스 조절이라곤 몰랐던 만복…'그만 걷겠다' 갑작스러운 선언
열살때부터 쉼없이 달려와…불투명한 미래에 불안했던 나와 닮아
경보 자세·규칙까지 과외받으며 열정...만복이를 연기하며 나도 치유됐다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초록색 체육복을 입은 소녀가 운동장 트랙을 돈다. 뛰지 않는다. 두 팔을 규칙적으로 흔들면서 걷는다. 육상에서 가장 규칙이 엄격한 경보다. 까딱 잘못하면 실격이다. 두 발이 동시에 땅에서 떨어지면 안 된다. 앞으로 뻗은 다리도 지면이 닿을 때부터 지면과 수직을 이룰 때까지 굽힐 수 없다.
소녀는 경보에 막 입문했다. 당연히 모양새가 엉성하다. 그런데 땀을 거의 흘리지 않는다. 주의가 산만해 좀처럼 집중하지 못한다. 영화 '걷기왕'의 주인공 만복이다. 영화는 꿈과 열정을 강요당하는 현실에서 과감히 벗어나라는 주제를 전한다. 그런데 그녀에게 노력을 강조하는 이는 선배 수지(박주희)뿐이다. 부모는 딸이 경보를 하는 줄도 모르고, 육상부 코치는 베짱이처럼 그늘을 찾기 바쁘다. 경보를 제안한 담임선생마저 코치와 사랑을 속삭인다. 그러니 만복은 페이스 조절이라곤 할 줄도 모른다. 지친 만복은 선언한다. "이제 그만 걸을래요."
이 대사는 배우 심은경(22)이 표현했기에 그나마 설득력을 얻는다. 그는 열 살 때 드라마 '결혼하고 싶은 여자(2004년)'를 시작으로 영화와 드라마 서른네 편에 출연했다. 특히 '서니(2011년)'에서 잘 나가는 7공주 나미를 맛깔나게 연기해 단번에 스타로 부상했다. 그녀는 이듬해 미국 피츠버그로 유학을 떠났다. 휴식이 필요했다. "쉴 틈 없이 작품 활동을 하다 보니 감정적으로 메말라 있었어요. 뭔가에 항상 불안하고 조급했죠. 저만의 시간을 갖고 싶었어요. 더 넓은 세상에서 많이 놀고 느끼고 싶었죠."
당시 배우는 뚜렷한 목표가 아니었다. 영화, 미술, 음악 등에 두루 관심이 있었다. 뉴욕 프로페셔널 칠드런 스쿨에서 견문을 넓히며 자신에게 어울리는 꿈을 찾고 싶었다. "연기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은 듯해요. 온전히 '나'라는 사람에 집중했죠. 홀로 지내면서 내가 어떤 아이일까 궁금했어요. 흔히 말하는 사춘기를 겪은 거죠."
마음을 정리하고 다시 만난 연기. 심은경은 쉴 새 없이 일한다. '널 그리며(2011년)'를 시작으로 '궁합(2016년)', '부산행(2016년)', '조작된 도시(2016년)', 걷기왕, '특별시민(2017년)' 등에 출연했다. 카메라에 앞에 설수록 연기를 향한 고민은 깊어졌다. "'수상한 그녀(2014년)'를 찍을 때만 해도 마냥 신이 났는데, 요즘은 혼란스러워요. 자꾸 허상을 쫓으며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사는 듯해요. 신중해야 한다고 몇 번씩 다짐하죠. 더는 어린 나이가 아니잖아요."
지친 그녀에게 걷기왕은 휴식과 같은 영화이다. 저예산으로 제작돼 부담이 크지 않았다. 내용은 단순하지만 학창시절을 떠올리며 즐겁게 연기할 수 있었다. 말괄량이 여고생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난 서니처럼. "소풍 간다는 생각으로 참여했어요. 어떤 작품을 만나든 고민하고 부담을 느끼는데, 학창시절 경험을 재현한 듯해서 편안하게 찍었어요. 그렇게 즐기다보면 진가가 나올 수 있다는 믿음도 있었고요."
그녀는 허투루 연기하지 않았다. 난생 처음 접한 운동종목 경보를 정확하게 표현하려고 한 달 동안 개인 교습을 받았다. "자세와 규칙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단순히 걷기만 하면 해결될 줄 알았는데 자세를 잡기조차 어렵더라고요. 규칙도 까다롭고. 연기로 어떻게 표현할 지를 생각하니까 더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도 과외가 끝날 무렵에 선생님이 칭찬해주셨어요. '전국체전에 나가도 될 것 같다'면서요(웃음)."
심은경은 만복과 자신에게 공통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특히 교실 촬영에서 많은 추억을 떠올렸단다. "멍하게 있을 때가 많았어요. 하도 졸아서 수업 진도를 거의 따라가지 못했죠. 쉬는 시간에는 친구들과 수다를 떨기 바빴고요. 만복처럼 미래가 불투명했던 것 같아요. 최근까지도 그랬는데 만복을 연기하면서 치료됐어요. 엉뚱하지만 평범한 캐릭터예요. 학창시절을 겪은 이라면 누구나 무의식에 투영된 자신을 찾을 수 있을 걸요."
그녀가 성숙해진 곳은 교실보다 촬영장이다. 카메라 앞에서 다양한 인물을 연기할 때마다 스스로 치열해지자고 다짐했다. "제가 연기를 하는 이유는 한 가지예요. 무아지경에 빠지는 순간이 행복해요. 밤새 촬영해도 인물에 빠지다 보면 저도 모르게 힘이 생기고 졸음이 없어지죠. 이게 바로 희열 아닐까요." 최근에는 목소리 연기를 하면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 '서울역(2016년)', '로봇소리(2016년)' 등에서 성우에 도전했다. "후시 녹음과 다른 매력이 있어요. 인물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고, 폭 넓은 감정을 표현하는데 중점을 둬야 하죠. 아무래도 목소리에만 집중하다보니 몰입이 잘 됐던 것 같아요. 감정의 세부적인 표현까지 고민해야 한다는 숙제를 떠안았지만."
심은경은 내년 개봉 예정인 박인제 감독(43)의 '특별시민'에서 처음으로 성인연기를 한다. 최민식(54), 곽도원(43), 라미란(41) 등과 호흡을 맞췄다. 최근 촬영을 마친 그녀는 "걷기왕과 달리 치열하게 연기했다"고 했다. "감정 표현은 문제되지 않았는데, 맡은 인물을 알아가는 과정이 힘들었어요. 최민식 선생님이 놀라울 정도로 몰입하셔서 반성도 많이 했죠. 존경심이 저절로 생기더라고요.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경험이었죠. 제게도 그렇게 연기하는 날이 올까요?"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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