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럭키'서 킬러·기억 잃은 배우 연기한 유해진
[아시아경제 이종길 기자]"널 위해 기도하는 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이렇게 살면 안 되지."
백수 청년을 훈계하는 아저씨. 직업은 킬러. 매사 철두철미하다. 기억을 잃고 취업한 분식집에서도 투철한 직업정신을 드러낸다. 단무지 하나도 꽃 모양으로 썰어 손님에게 감동을 안긴다. 이쯤 되면 훈수를 둘 만한 자격이 있어 보인다. 영화 '럭키'의 주인공 형욱이다. 목욕탕에서 미끄러져 기억을 잃고 그보다 열세 살 어린 무명배우 재성(이준)의 삶을 산다. 재성이 이루지 못한 일들은 그가 손을 대면 술술 풀린다. 특히 단역으로 합류한 드라마에서 단숨에 주연을 꿰찬다.
피나는 노력이 있었다. 형욱은 볼펜을 입에 물고 소리를 지르며 발음을 교정한다. 아무리 볼품없는 역할을 맡아도 기초체력을 다지고 인물을 분석하며 연기를 익힌다. 이런 모습을 키가 훤칠한 미남 배우가 그린다면 설득력이 떨어질 것이다. 이계벽 감독(45)은 유해진(46)을 택했다. 그가 배우로서 걸어온 길과 형욱이 많이 닮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유해진을 5일 서울 삼청동에 있는 카페 '슬로우파크'에서 만났다. 그는 "촬영하며 무명시절이 많이 떠올랐다. 특히 재성의 옥탑방 세트가 예전에 살던 곳 같았다"고 했다. 청주 청석고 2학년 때 기성 극단에 들어간 유해진은 연출가 오태석(76)의 극단 목화에서 황정민(46), 성지루(48) 등과 함께 활동했다. 스크린 데뷔는 '블랙잭(1997년)'의 트럭 운전사 역. 이후 '주유소 습격사건(1999년)', '간첩 리철진(1999년)', '신라의 달밤(2001년)', '공공의 적(2002년)' 등에서 거칠지만 우습고 정이 가는 인물들을 연기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벌이는 변변치 않았다. 친구나 후배의 집에 얹혀살며 연기생활을 이어갔다.
"버스 탈 돈으로 빵을 사먹었어요. 회기동에서 대학로가 있는 혜화동까지 걸어 다녔죠. 여름에는 늦은 저녁에 광장시장을 기웃거렸어요. 전을 싸게 팔거든요. 먹는 것만큼 내 공간도 절실했던 것 같아요. 언덕에 있는 공원에서 불빛이 켜진 집들을 볼 때마다 서글프게 중얼거렸죠. '이렇게 집들이 많은데 나 하나 누울 공간이 없나.'"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던가. 유해진은 '달마야, 서울 가자(2004년)', '공공의 적2(2005년)', '왕의 남자(2005년)', '타짜(2006년)' 등 많은 히트작에 출연하며 명성을 떨쳤다. 남부럽지 않은 보금자리를 장만하고도 주머니가 두둑했다. "'무사(2001년)'를 찍고 월세 집을 마련한 뒤로 점점 평수가 늘어났어요. 그래도 처음 가진 공간에 가장 애착이 가는 것 같아요. 볼품은 없었지만 정말 행복했거든요."
배우의 길을 한사코 만류하던 아버지 앞에서도 어깨를 폈다. "서울예술대학 연극과에 입학할 때부터 심하게 반대하셨어요. '조그마한 방도 구해주지 않으면서 왜 앞길을 막으실까'하고 답답했는데, 드라마 '토지(2004년)'에 나온 뒤로 응원해주세요. 주위에서 아들을 많이들 알아보니까 흐뭇하신가 봐요."
유해진은 '이장과 군수(2007년)', '트럭(2007년)', '죽이고 싶은(2010년)' 등에서 주연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운이 좋았다"고 했다. 하지만 전작들은 물론 럭키 역시 그의 매력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다. 무게중심이 한쪽으로 쏠린 탓에 재성의 이야기가 허술할 정도다. 코미디 장치도 유해진의 얼굴 생김새를 빗댄 표현들이 주를 이룬다. 그는 무명배우의 삶이나 촬영장에서의 에피소드 등에서 직접 세부적인 장치들을 설계하기도 했다. "이야기가 허구라고 표현마저 그렇게 하면 영화 전체가 흔들릴 수 있어요. 말장난에 가까운 애드리브보다 제 경험을 토대로 있을 법한 설정들을 몇 가지 제안했죠. 하도 상의를 많이 해서 영화 동아리에서 작품을 만드는 것 같았어요."
대중은 다양한 인물을 연기해온 그에게서 '참바다'나 '겨울이 아저씨'를 많이 떠올린다. 예능프로그램 '삼시세끼'에서 물고기를 낚고 뛸 듯이 기뻐하거나 돌돔을 잡겠다고 오기를 부리는 모습 등에서 털털하고 소박한 매력이 묻어났다. 나영석 프로듀서(40)는 "실생활에서도 페이소스나 인간적인 깊이를 뭉뚱그려서 웃음으로 표현하는 몇 안 되는 배우"라고 했다. 유해진은 이를 계기로 다양한 광고에 출연했다. 그러나 삼시세끼 덕에 이룬 성과라고 여기진 않는다. "완만하게 달려왔죠. 다만 텔레비전에 얼굴을 내밀어서 인기 폭은 넓어진 듯해요. 등산을 자주 하는데 어르신들까지 알아봐주시거든요."
주목하는 눈이 많아지면서 그는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삼시세끼에서 보인 모습이 스크린에 투영될 것을 우려한다. 그래서 연기를 준비하는데 이전보다 더 많이 신경을 쓴다. "비슷한 이미지를 계속 소비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걸 이용하는 거죠. 차승원씨(46)와도 비슷한 대화를 많이 하는데 굳이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는 듯해요. 돌아보면 부질없는 생각이더라고요. 앞으로도 그냥 친근하게 천천히 다가가고 싶어요."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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