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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시샘]붉은 나뭇잎에 부친 사랑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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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궁녀가 몰래 물에 띄운 시, 옛사람들이 열광했던 로맨스…신안 해저선에서 건져냈는데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 국립중앙박물관에선 '신안해저선에서 찾아낸 것들'(7.26-9.4)이란 타이틀로 해저선 발굴 40주년 기념 특별전을 열고 있다. 그 전시물 중에는 시가 적힌 접시 하나가 있다. 청백자 유리홍쌍엽문시명반이란 이름이 붙어있고, 중국 경덕진요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제작 시기는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초반이라고 하니, 우리로서는 고려시대이며, 중국은 원나라 때이다.


유리홍은 붉은 구리를 원료로 한 물감으로 무늬를 그린 뒤 백색 유약을 칠해 고온환원 상태로 구워서 만든 자기다. 쌍엽문은 두개의 잎사귀 무늬라는 뜻인데, 다소 희미하지만 단풍이 든 나뭇잎 두 장이 마주보는 얼굴처럼 쌍을 이루고 있다. 잎맥을 선연하게 표현해놓았다. 시명반은 시가 새겨진 쟁반이란 뜻이다. 시를 온전히 다 만나려면 그릇 하나가 더 있어야 하겠으나, 해저선에서 건진 건 이것 하나 밖에 없다. 아쉽지만 이것만도 어디인가.

[빈섬의 시샘]붉은 나뭇잎에 부친 사랑의 운명 청백자 유리홍 쌍엽문시명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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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을, 시 한편을 만나는 일만으로도 아름다운 감수성이 깨어나는 듯 하다. 그 접시 속에 들어있는, 애틋하고 멋진 로맨스를 만나러 가자.

[빈섬의 시샘]붉은 나뭇잎에 부친 사랑의 운명



당나라 말 희종 때의 궁녀 한씨(韓氏)가 썼다는 시의 원문은 이렇다.


流水何太急(유수하태급)
深宮盡日閒(심궁진일한)
殷勤謝紅葉(은근사홍엽)
好去到人間(호거도인간)


흐르는 물이여, 넌 왜 그리 급하냐
깊은 궁궐엔 하루 종일 일도 없는데
가만가만히 붉은 잎에게 말하기를
잘 가라, 어떤 사람에 닿으렴


한씨가 어떤 궁녀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왕이 자주 찾아주지 않는 쓸쓸한 여인임에 틀림없었으리라. 어느 멋진 가을날, 그녀는 궁궐 내를 무심히 흐르는 개울물을 보다가 저 물은 바깥 세상을 본다는 생각을 해냈다. 거긴 뭐가 그리 좋은 게 있기에 너는 그렇게 급하게도 흘러가는 것이냐? 처음엔 그 생각을 하며 자신의 갇힌 신세를 한탄하다가 문득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붉은 잎 하나에 시를 새겨 흘려보내면 바깥에 누군가가 혹시 볼지도 모른다. 그래서 쓴 시가 저것이었다. 여기 홀로 있으려니 심심해 죽겠다는 하소연과 어떤 사람에게 닿아 이 얘기를 전해달라는 부탁. 이것은 '얼굴'도 알 수 없는 어떤 인연에게 닿고싶은 여인의 애틋한 가을바람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 시의 다른 버전도 있다. 이것은 봄날에 유독 붉어진 나뭇잎에 쓴 시였다.


柳色參差掩花樓(류색삼차엄화루)
曉鶯啼送滿宮愁 (효앵제송만궁수)
年年花落無人見 (연년화락무인견)
空逐春泉出御溝 (공축춘천출어구)


버들빛은 얼기설기 꽃누각을 가리고
새벽 꾀꼬리 울음은 궁궐의 수심을 채우는데
해마다 꽃만 지고 사람은 보이지 않아
헛되이 봄 개울은 흘러 궁궐 도랑을 빠져나가는구려


이 시에는 궁인의 새로운 인연을 향한 노골적인 마음은 보이지 않고, 그저 고독과 수심만 어른거린다. 그래서 맛이 조금 덜하다. 여하튼, 위의 '유수하태급' 버전은 이후 세상에 많이 알려져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는 세기의 로맨스가 되었다.


[빈섬의 시샘]붉은 나뭇잎에 부친 사랑의 운명



이 시가 그냥 개울을 따라 정처없이 흘러가버렸을 확률이 99.9%이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우연히도 궁궐 밖 개울에서 한 남자가 떠내려오는 나뭇잎을 줍는다. 이런 인연설을 믿는가. 그 주인공은 우우(于祐)라는 사람이다. 이름도 '하늘이 돕는 사람'이란 의미니, 복이 많은 남자인 모양이다. 이 시를 읽고난 뒤 우우는 어떻게 했을까. 개울의 하류에서 상류에 있는 여인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전갈을 보낼 순 없지 않은가. 고심 끝에 그는 궁궐로 흘러들어가는 냇물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개울의 상류를 발견. 그는 그곳으로 뛰어올라가, 붉은 잎이 떠내려온 시각 쯤에 시를 쓴 나뭇잎을 흘려보낸다.


우우는 무슨 시를 썼을까. 아마도 5언 절구로 화답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답가는 전하지 않는다. 다만, 봄날의 시에 댓구를 맞춘 듯한 시의 뒷부분이 전한다. 가을날이든 봄날이든 아마도 남자가 전하고 싶은 뜻은 같았을 것이다. 후아유(Who Are You)?


曾聞葉上題紅怨(증문엽상제홍원)
葉上題詩寄阿誰(엽상제시기아수)


또한 잎사귀 위에 쓰신 붉은 슬픔을 들었습니다
나뭇잎 위에 쓰신 시는 대체 누구에게 쓰신 것인지요


[빈섬의 시샘]붉은 나뭇잎에 부친 사랑의 운명



남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시가 적힌 나뭇잎을 본 순간 '운명의 황홀감'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저 높은 담 너머 궁궐 속에 나뭇잎시를 보는 여인이 있다. 그 여인은 고독하고 적막하게 이 계절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왕의 여인이니 이를 어찌 하리? 내가 넘볼 수 있는 사람은 아니지 않는가? 고독하게 살아가던 사내였다면, 절망감은 더했을 것이다. 운명이 이렇게 내게로 떠내려 왔는데, 세상에서 가장 높은 벽이 저기 저렇게 도사리고 있구나. 하지만 개울물이야 막을 수 없지 않은가. 되든 안되든 소통이나 한번 해보자. 그런 마음으로 개울 언저리를 기어올라가, '그대'를 수배하는 시를 흘려 보냈을 것이다.


이에 대한, 궁인의 응답시가 전해졌더라면, 이건 그냥 시의 놀음이 되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두 사람에게 허용된 '소통'의 운명은 일단 여기까지였다. 이후로 그들은, 붉은 나뭇잎 하나로 오간 정념의 자취들을 애써 지우고 살아야 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전한 '태평광기(太平廣記)'는 못말릴 운명의 후일담을 적어놓았다. 10년이 흐른 뒤 황제가 바뀌자 선황을 모셨던 궁녀 상당수를 방출했다. 중국황실엔 이런 시스템이 되어 있었나 보다. 그때 한씨도 궁을 나왔다.


우우와 궁녀 한씨는, 한씨 친척의 소개로 만나게 된다. 재회는 아니지만 재회보다 더한 재회다. 첫날밤 우우는 붉은 잎 하나를 꺼낸다. 이런 시가 적혀있는 홍엽 하나.


[빈섬의 시샘]붉은 나뭇잎에 부친 사랑의 운명



가만가만히 붉은 잎에게 말하기를
잘 가라, 어떤 사람에 닿으렴


한씨는 이 일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다시 펼쳐진 놀라운 인연에 눈이 동그래진다. 그녀는 그제서야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지니고 있던 홍엽을 꺼내 보여준다.


잎사귀 위 붉은 슬픔을 들었습니다
나뭇잎 시는 뉘에게 쓰신 건지요


[빈섬의 시샘]붉은 나뭇잎에 부친 사랑의 운명



두 사람은 와락, 서로를 껴안았다. 부인이 된 한씨는 이렇게 읊는다.


흐르는 물 따라 흐른 한 구절의 시
십년 궁궐의 슬픔이 가슴에 가득하네
오늘 마침내 아름다운 짝이 되었으니
그래 알겠군요, 홍엽이 우리의 중매쟁이였음을


一聯佳句隨流水 (일련가구수유수)
十載幽愁滿素懷 (십재유수만소회)
今日已成鸞鳳侶 (금일이성난봉려)
方知紅葉是良媒 (방지홍엽시양매)


황제의 여인과 보통사내 사이에 스파크를 일으킨 그 사랑. 절대권력의 엄혹한 시절에도 이런 '장벽 없는 사랑'에 대한 열광은 대단했던 모양이다. 당나라 시인 이건훈은 '궁의 노래(宮詞)'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는다.


궁궐 문은 늘 닫혀 있어, 댄스 드레스는 소용없네
황제는 뵌지 오래 됐고 귀밑엔 이미 흰머리가 나네
오히려 떨어지는 꽃이 부럽도다, 봄이 붙잡을 수 없으니
궁궐 개울을 흘러 저 바깥 세상으로 가는구나


宮門長閉舞衣閒 (궁문장폐무의한)
略識君王?已斑 (약식군왕빈이반)
却羨落花春不管 (각선낙화춘불관)
御溝流得到人間 (어구유득도인간)


고려의 대시인 이인로도 이 애절한 사랑의 옛이야기를 기억하며 어느 가을에 한 수 읊었다.


붉은 잎에 시를 써서 궁궐 밖으로 보낸다
눈물자국이 먹에 번져 아직도 뚜렷하네
궁의 개울 흐르는 물은 결코 못 믿겠지만
궁녀는 한 조각 마음을 흘려보내는구나


紅葉題詩出鳳城(홍엽제시출봉성) : 단풍잎에 시를 써서 봉성 밖으로 보내니
淚痕和墨尙分明(루흔화묵상분명) : 눈물 자국이 먹에 얼룩져 아직도 선명하도다
御溝流水渾無賴(어구류수혼무뢰) : 궁중 개울 흐르는 물 도무지 믿지 못하나니
漏洩宮娥一片情(누설궁아일편정) : 궁녀의 한 조각 정을 바깥으로 흘려보내는구나


고려 시인은, 한씨의 눈물 자국까지 그려내 실감을 돋웠다. 나뭇잎에 글씨를 써서 물위에 띄웠으니 그게 어찌 믿을 만 하겠는가. 거기다 눈물이 번졌으니 벌써 반은 젖었다. 그런데, 나뭇잎이 여울의 물살에 뒤집히기 전에 용케 우우가 발견했고, 글자 위에 떨어져 번진 눈물까지 읽어냈다. 이 가을, 오직 자기에게만 닥칠 사랑의 운명을 믿는가. 저 한씨와 우우의 홍엽처럼?


옛 쟁반그릇 하나에 담긴 시 한 편이 이토록 감수성을 돋운다. 이것이 '영화'보다 실감나는 문자의 인문학이다.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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