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단, 조양호 회장·한진그룹에 추가자구안 압박
-채권단은 "부실계열사 지원하라" vs 法은 "배임죄"
-재계, "배임죄는 '걸면 걸리는 법'"…무리한 기소와 처벌 우려
[아시아경제 이경호 기자]유동성 위기에 몰린 한진해운의 운명이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내년까지 부족한 운용자금은 1조 2000억원에 이르는데 채권단은 이 중 최소 7000억 원을 한진그룹이 자체적으로 채우라고 요구하고 있다. 한진해운에서는 4000억원 이상은 마련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3000억원이라는 간극을 좁히기 위해서는 조양호 회장이나 한진그룹이 사재를 출연하거나 계열사를 동원해 한진해운 구하기에 나서야 한다. 한진해운의 대주주인 대한항공은 부채비율이 1100%에 달한 상태다. 조 회장과 한진그룹이 한진해운을 살리려다가 자칫 그룹 전체를 위기로 내몰 수 있다.
한진해운은 채권단과의 자율협약 종료 시점인 내달 4일을 앞두고 채권단이 요구한 추가 자구안을 25일께 제출한다. 한진해운으로서는 일부 대출금 상환을 미루거나 용선료를 조정하는 것 외에는 뚜렷한 대책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추가 자구안이 채권단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한진해운은 법정관리로 간다. 법정관리로 가는 것은 사실상의 퇴출을 의미한다. 국적선사 1위 기업의 퇴출은 글로벌 해운동맹에서 한국이 배제되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 물류와 해운업계에 막대한 타격을 입히게 된다.
조 회장과 한진그룹이 이 같은 파국을 막기 위해, 채권단의 요구 또는 압박에 그룹을 동원해 한진해운을 살릴 수는 있다. 말 그대로 부실 계열사 지원으로 나중에 조 회장과 그룹 경영진은 형법상 배임죄에 걸릴 수 있다. 삼성그룹이 삼성중공업을 살리기 위해 대주주인 삼성전자가 삼성중공업을 지원할 경우에도 배임죄가 될 수 있다.
현행 형법은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로 재산상의 이익을 취하거나 제3자로 하여금 이를 취득하게 하여 본인에게 손해를 가한 경우'를 모두 배임죄로 규정한다. 하지만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와 재산상 이익ㆍ손해의 판단 기준이 모호해 법 적용이 지나치게 자의적이라는 비판이 재계를 중심으로 꾸준히 제기됐다. 배임죄로 기업인을 처벌하는 나라는 독일ㆍ일본ㆍ한국 등 세 나라 밖에 없다. 그나마 독일ㆍ일본은 배임의 고의성 여부를 엄격히 판단하지만 우리는 법 조항 자체가 추상적이다 보니 '걸면 걸리는 법'이 돼 버렸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자료에 따르면 2005년부터 2008년까지 4년간 특경가법상 배임과 형법상 배임죄의 무죄율은 각각 평균 11.6%와 5.1%로 전체 형사범죄의 무죄율(1.2%)보다 훨씬 높다. 강덕수 전 STX 회장의 경우 연대보증ㆍ담보 제공 등을 통한 계열사 부당 지원 혐의를 받아 기소됐다가 법원에서 일부 무죄를 선고 받았다. 법원은 기업집단의 총수가 유동성 위기에 빠진 계열사를 살리고자 한 경영적 결단이 결국 기업 손실로 귀결됐다고 해도 그렇게 판단할 만한 합리적 이유가 있다면 이를 범죄 행위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석채 전 KT회장도 잘못된 투자로 회사에 100억원대 손해를 끼친 혐의 등으로 기소됐지만 법원은 '배임의 고의성'이 없었다며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김선정 동국대 교수는 "배임죄문제는 이론적 정당성도 약하고 실제 법적용에서도 문제가 많아 단순히 해석론으로 해결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으므로 입법론적 해결이 필요하다"며 "우리나라에서는 배임죄가 최고경영자의 책임을 추급하는데 자주 활용되어 결국 기업에 대한 과도한 족쇄로 작용하고 그 여파가 자연인에 대한 처벌의 필요성을 넘어서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최승노 자유경제원 부원장은 "세계화 시대에 우리 기업들은 해외 기업들과 경쟁을 한다. 배임죄라는 독소조항 때문에 우리 기업들의 경영활동이 위축된다면, 글로벌 경제에서 한국의 위상은 떨어지고 말 것"이라며 "위험을 감수한 기업의 결정은 사적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정당한 경영활동이지, 결코 범죄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경호 기자 gungh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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