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 스토리 - 아름다움과 연애의 레전드, 그녀에 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누구나 황진이를 알지만 아무도 황진이를 모른다. 이렇게 말한 사람은 소설 ‘나, 황진이’를 쓴 작가 김탁환이다. 그는 아무도 모르는 황진이의 마음을 소설의 공간에 옮겨놓았다. 황진이를 내레이터로 등장시켜 500년간 꾹꾹 눌러놨을 법한 얘기들을 털어놓는다. 무엇보다 읽는 사람을 기죽이는 건, 작품 곳곳에 빼곡한 낯설고 매력적인 어휘들이다. 그 시절에 썼음직한 말들을 어디서 다 찾아내고 익혔는지 잘 꿰어진 구슬들처럼 문장들이 반짝거린다. TV드라마에서도 빌려썼다는 ‘김탁환 황진이’의 줄거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황진이의 출생과 기생 수련, 그리고 간략하게 처리된 당대 명사들과의 사귐, 그리고 방황과 스승 서경덕과의 만남. 하나의 삶에 찍힌 몇 개의 방점들을 중심으로 황진이의 관점과 입장들을 풀어나간다. 허균의 아버지인 허엽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있다. (훗날 황진이의 묘소에 절을 하는 바람에 조정을 시끄럽게 했던 임제가, 허엽의 아들인 허봉과 절친한 친구였던 점을 생각하면, 인연은 돌고 돈다 싶다. 허엽은 황진이를 감화시킨 화담 서경덕의 제자였다. 허엽의 아들 허균은 ‘성옹지소록’에서 황진이에 관한 일화들을 상당히 자세하게 전하고 있기도 하다.) 김탁환은 딴 사람들이 집중력있게 주목하지 못했던, 황진이의 내면을 나름대로 끄집어냈으나, 그녀를 만나는 독자로서는, ‘기생 황진이’나 ‘여인 황진이’가 아니라, ‘영웅적인 철학자 황진이’ 혹은 ‘선비 황진이’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내공은 빵빵한데 이야기가 다소 심심하다. 그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없지 않다.
황진이 에피소드를 다룬 몇 권의 책들(이덕형의 ‘송도기이’, 허균의 ‘성옹지소록’, 김택영의 ‘송도인물지’, 임방의 ‘수촌만록’, 유몽인의 ‘어우야담’, 서유영의 ‘금계필담’)에는 저마다 기생이나 여성을 깔보는 그 시대의 관점들이 개입되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색을 하고 진지하게 그 삶에 대해 조망해본 것이 아니라 기이한 것을 중심으로 흥미를 돋우는 서술 방식으로 썼다. 조선의 남성들인 그들은, 황진이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황진이에 관한 입담들을 유포하며 즐긴 혐의가 있다. 물론 그런 입장을 지금의 관점으로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조선 사회를 벗어나있는 우리로서 전시대의 관점을 답습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문제 의식을 가지는 것은 필요하지 않을까. 김탁환 또한 그런 착안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힘이 들어갔다. 그 결과 ‘슈퍼 황진이’가 탄생해버렸다.
나는 황진이에 관한 자료를 검토한 뒤 한 동안 그녀의 생애에 대해 숙고하고 음미하는 시간을 가졌다. 대체 이 여자는 무엇이 문제였던가. 무엇이 이 여자를 의미있게 만들었던가. 이 여자의 가치와 신념은 무엇이었을까. 꽤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붙잡고 시름하기도 했다. 그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하나로 묶기로 했다. 그걸 나는 ‘황진이 콤플렉스’라고 부르고자 한다. 황진이 콤플렉스의 핵심은, ‘너무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냥 가만히 살기에는, 너무 아름다웠다. 황진이는 이 땅의 기생 중에서 가장 명성이 높을 만큼 빼어난 미모를 가진 여인이다.
‘얼굴에 화장도 하지 않고 담담한 차림으로 자리에 나오는데, 천연한 태도가 국색(國色)으로서 광채가 사람을 움직였다.’ (이덕형)
중국의 사신조차도 이렇게 말했다. “너의 나라에 천하 절색이 있구나.”(이덕형)
“(그녀가 있으면) 방안에서 때로 이상한 향기가 나서 며칠씩 없어지지 않았습니다.”(이덕형)
‘성장하자 절색의 미모를 갖추었다.’(김택영)
이런 구체적인 대목이 아니라 하더라도, 황진이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의 등장인물들을 대부분 쩔쩔 매게 만들 만큼 뛰어난 미모와 매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점은 황진이를 출세하도록 만들기도 했지만, 그녀의 삶을 왜곡하고 혼란스럽게 하기도 했다. 아름다운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뜻밖에 그녀가 주체적으로 살고싶은 희망들을 좌절시키고 오로지 욕망의 대상으로만 인식되게 하는 불행에 놓여지는 것이기도 하다. 놀랍게도 영화 감독 김기덕이 2008년에 내놓은 작품에서 ‘황진이 콤플렉스’를 (우연히도!) 정확하게 표현해내고 있다. ‘아름답다’라는 제목의 영화가 그것이다. 연예인으로 오해를 받을 만큼 예쁘게 생긴 한 여인의 이야기다. 그녀는 수많은 남자들의 ‘작업’에 시달리는데 그중 한 명으로부터는 치명적인 성폭행을 당한다. 경찰서에 가니 이번엔 경찰관이 따라붙고, 다쳐서 병원에 가니 의사가 추근댄다. 길에서 쓰러지니 남자 행인 수십명이 서로 돕겠다고 덤벼든다. 한 사내의 일방적인 사랑에 죽음을 맞게 되는데, 죽은 뒤에까지 예쁜 시신을 탐내는 남자들이 서성거린다. 풍자적이지만, 김기덕의 감관에 잡힌 ‘예쁨’의 비극은, 황진이를 숨막히게 했던 공기들과 닮아있다.
황진이 콤플렉스를 읽어가기 위해서는, 그녀의 어머니 진현금(陳玄琴)을 만나야 한다. 현금에 관한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는 사람은 이덕형과 김택영, 그리고 허균이다. 앞의 두 사람은 현금의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고, 허균은 황진이를 맹녀(盲女)의 딸이라고 말하고 있다. 양쪽의 이야기를 합치면 현금이 앞을 못보는 소경이 된다. 그런데 이덕형과 김택영은 왜 이 중요한 팩트를 놓쳤을까. 특히 이덕형의 글을 보면, 그녀와 맹인이 아니라는 심증을 갖게 한다.
어미 현금이 매우 자색(姿色)이 있었다. 열여덟 살 때 병부교 다리 밑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옷차림이 화려하고 얼굴이 잘난 한 남자가 다리 위에 서서 현금에게 눈길을 보내며 혹 웃기도 하고 혹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도 하니 현금의 마음이 움직였다. 그런데 그 사람이 문득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빨래하는 아낙들이 모두 흩어졌다. 그러자 그 사람이 또다시 다리 위에 나타나 기둥에 기대어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끝내자 물을 청하였다. 현금이 표주박에 물을 떠서 바쳤다. 그 사람이 반쯤 마시고 웃으면서 돌려준 다음 다시 말하기를 “그대도 시험 삼아 마셔보라” 하였다. 마셔보니 술이었다. 현금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로 인하여 두 남녀는 인연이 되어 정을 통하였다. 이렇게 해서 진낭(眞 娘)이 태어났다. <‘송도기이’ 중에서>
다리 위의 남자가 웃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것을 현금이 어떻게 알았을까. 주위에서 말해줬다면 그런 내용들이 들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이덕형의 진술이 맞다면 허균이 잘못 알았을 수도 있다. 허균은 누이 허난설헌이 죽었을 때 그녀의 시를 모두 외워 유고시집을 낼 정도로 기억력이 비상했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근거도 없이 황진이의 어머니를 맹인이라고 했을 리는 없다고 봐야 한다. 이 두 사람의 진술이 둘 다 틀리지 않기 위해서는, 진현금이 다리 위의 사내와 통정을 할 때에는 시력이 정상이었으나, 이후에 어떤 이유로 앞을 못보게 되었어야 한다. 허균이 굳이 황진이를 ‘맹녀의 딸’이라고 지칭한 것은, 당대에 그런 인식을 부각시키는 행동이나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즉 ‘매우 자색(姿色)이 있었’던 진현금은 황진이를 낳고난 뒤에 눈이 멀어버렸다. 황진이는 눈 먼 어머니의 고통을 어린 시절부터 보고 자랐다. ‘다리 위의 사내’로 나오는 황진이의 아버지에 대해 진술하고 있는 사람은 김택영이다.
‘황진이는 중종 때 사람으로 황진사의 서녀이다. 그의 어머니 진현금이 병부 다리 아래에서 물을 먹다가 감응하여 황진이를 잉태했다. 황진이를 낳자 방안에 기이한 향기가 사흘 동안 풍겼다.’ <‘송도인물지’ 중에서>
어머니 진현금의 신분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정보는 별로 없다. 황진이가 서녀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진사의 첩이었다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진현금 또한 기생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리 위에서 러브콜을 했던 사내는 황진사인 셈이다. 여기서 정황들을 종합해보면 황진이가 기생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조건들이 짚인다. 즉 기생 진현금은 황진사 집에 첩으로 들어가 살다가, 어떤 병이나 사고로 눈이 멀어, 그 집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때 현금은 어린 딸 진이를 안고 나와 기방(妓房)에 몸을 의탁한다. 황진이는 자라면서 눈 먼 어미가 괄시당하고 고통받는 것들을 늘 보면서 자란다. 그녀의 눈이 되어주려 애쓰지만 마음만큼 되지는 않는다. 자라면서 황진이는 주위에서 찬사를 듣는 미모의 여인이 되어간다. 그렇지만 그녀는 어머니의 불행을 가슴에 먼저 새겼기에 그런 찬사가 오히려 덧없게 느껴진다. 예쁘다는 이유로 다리 밑에서 간택된 어머니는, 어느날 갑자기 눈이 멀자 버려졌다. 기방에 돌아왔으나 기생 행세는 커녕, 거문고를 더듬으며 눈칫밥을 먹고 있다. 한겹 살갛이 예쁘다는 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사랑? 그 따위가 다 뭐란 말인가. 그런 질문들이 목울대를 은근히 씰룩이고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불행을 깊이 동정하면서도 그런 어머니를 두었다는 것에 대한 수치심도 키워갔을 가능성이 있다. 사람들은 늘 비교하였을 것이다. 저런 눈먼 어미 밑에 저런 곱고 빼어난 딸년이 자라나다니... 황진이는 자신의 예쁨이 어머니의 ‘상황’과 대비되어 표현되는 일이 언짢고 싫었을 것이다.
황진이는 미모 따위에 의지하지 않기로 했다. 예뻐서 나쁠 거야 없지만 그것에 인생을 걸지 않기로 했다. 어머니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운 좋게도 그녀는 노래와 거문고 솜씨가 뛰어나 천재라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기생이지만 선비들이 읽는 경전과 역사서를 몰래 탐독했다. 당시(唐詩)를 공부하며 감(感)을 키웠다. 그녀는 골이 텅빈 미녀가 되어 고객들을 향해 웃고 춤추는 존재가 되고싶지 않았다. 그 고객들에 대해 은밀히 경쟁 의식을 키우고 있었다. 어쩌면 그 고객은 바로 ‘아버지에 대한 증오’같은 것이기도 했을 것이다. 예쁨 만을 탐하는 남자, 그것은 아버지의 그림자였다. 그들에게는 인간적 관계로서의 ‘여자’가 있는 게 아니라 성적 욕망과 우월을 과시하는 허영으로서의 대상인 해어화(解語花)가 있을 뿐이었다. 황진이는 예뻐지면 예뻐질 수록, 그 예쁨이 만들어내는 흥분과 소음들을 경멸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기생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자신에게 성을 붙여주었다. (원래 기생은 동성(同姓)의 사내들이 거리낌이 있을까봐 성을 밝히지 않는다.) 어머니로서는 진사의 딸이라는 자부심을 표현하고 싶었겠지만 황진이는 그 ‘황’ 한 글자가 무척이나 싫었다. 그래서 그 ‘황(黃)’의 그림자를 닦아내서 ‘완전한 황금빛 달’로 자신을 만들고 싶었다. ‘명월(明月)’ 속에 깃든 흑점같은 아버지.
황진이가 은밀히 육체를 경멸하면 할수록 그녀는 도도하고 더 아름답게 보였고, 사내들은 더 속이 탔다. 첫 사고는 15세 때 일어난다. 이웃의 총각 하나가 스토커가 되어 늘 담장을 기웃거린다. 하루는 용기를 내서 말을 걸려고 황진이에게 다가갔다가 심장을 얼게 하는 그 고고한 아름다움과 서늘한 눈매에 입이 딱 붙고 만다. 돌아와서는 드러눕는다. 그 부모가 찾아와 살려주는 셈치고 한번만 위로해주라고 했지만 진이는 듣지 않는다. 부질없는 인연이 엮일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얼마 후 그는 상사병으로 죽고 만다. 이 소식을 듣고 황진이는 큰 충격을 받는다. 대체 내 얼굴, 내 육신이 뭐라고 젊은 사람이 저렇게 자진(自盡)한단 말인가? 아름다움이 사람을 죽인다면, 아름다움 자체가 죄악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 남자의 상여가 지나가다가 황진이의 집 앞에 딱 멈춰섰다. 죽어서까지도 놓지 못하는 저 어리석은 집착. 그가 도대체 나의 무엇을 안단 말인가? 얼굴 몇 번 본 것이 뭐라고... 그 집 사람이 와서 황진이의 옷가지를 얹어줘야 갈 것 같다고 말하자, 황진이는 저고리를 하나 꺼내준다. 관이 그제서야 움직인다. 이 대목은 약간 의심이 간다. 전달자의 상상력이 발휘되었을 수 있다. 혹은 상여꾼들이 죽은 총각의 원혼을 달래느라 연극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여하튼 황진이는 착잡했다. 내가 사람을 죽였구나. 까닭없이 생겨난 내 몸뚱이의 부질없는 미색(美色)이 세상을 어지럽혔구나. 갓 피어나는 기생에게 이 사건은 트라우마가 되었으리라.
그녀의 아름다움은 남자들만 괴롭히는 건 아니었다. 유수 송겸이 술자리를 열었는데 황진이가 나왔다. 풍류에 일가견이 있었던 송유수는 그녀를 보자 “명불허전(名不虛傳)이로다!”하고 신음같은 감탄사를 내뱉는다. 황진이가 왔다고 하자, 송유수의 첩이 궁금해서 문틈으로 그녀를 엿본다. 그 틈새로 뿜어나오는 아름다움. 그녀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선다. “저렇게 예쁠 수가...이제 내 신세는 조졌구나.” 그러다가 그녀는 아우성을 지르며 술자리 가운데로 뛰쳐들어온다. 곁에 있던 종들이 기겁을 하고는 함께 뛰어와 밖으로 모셔냈지만 이 여자는 실성한듯 다시 뛰어들어와 술판을 뒤엎는다. 송유수는 놀라 일어서고 손님들도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빠져나간다. 송겸의 첩을 그토록 절망케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런 일을 당하고난 뒤에도 송겸은 다시 어머니 수연을 맞아 황진이를 부른다. 첩이 나타날까 조마조마해 하면서도 희대의 미모를 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황진이에 관한 진술자들은 그녀가 ‘남자같았다’는 말을 한다. 화장을 안한 것이 더 곱다는 조선 최강 ‘생얼미인’ 황진이가 남자같다는 건 무슨 소리인가. 용모와는 달리 성격에서 호방하고 거리낌없는 태도가 있었다는 얘기이리라. 요즘으로 치면 ‘이효리’같은 분위기일까. 내숭 안 떨고 약한 척 하지 않고 순진무구한 척 하지 않는 당당하고 씩씩한 기색. 조선 남자들은 황진이에게서 그런 기운을 느낀 모양이다. 황진이는 지조를 중히 여기고 순결을 프라이드로 삼는 ‘일편단심 기생’이 아니다. 그녀에겐 늙은 고관대작의 첩실로 들어가 안정적인 삶을 누리고자 하는 출세욕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황진이는 오히려 철저히 육체적인 사랑을 게임처럼 즐기며 사내들에게 한치도 꿀리지 않는 일대일의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논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조선의 기형적 ‘사랑시스템’에서 황진이만큼 철저히 기생다운 기생도 없다. 꾸밈도 없었고 거침도 없었다. 그녀에게는 시도 사랑게임의 일부이며 음악도 육체도 모두 놀이의 일부이다. 이토록 예쁘고 잘 노는 여자이기에, 황진이는 후대의 임제까지도 그녀의 무덤 앞에서 찔러보는 ‘기생의 로망’이 된 것이다.
이제 황진이의 남자들을 살펴볼 때가 되었다. 황진이는 어머니의 실패한 인생을 기억하고 있었다. 한 남자와 눈이 맞아 청춘을 걸었다가 비참해지는 걸 봤다. 그래서 얻은 교훈 1호. 남자에 대한 철저한 불신. 작업을 할 때 하는 달콤한 말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레짐작으로 겁부터 먹고 도망치지는 않는다. 남자가 그리워하면 나도 그리워한다. 사랑하면 나도 사랑한다. 그러나 황진이의 사랑 게임은 진지전(陣地戰)이다. 자기 지역 다 팽개치고 넘어가지 않는다.
가장 쪼다같이 당한 사람은 벽계수이다. 온 나라에 황진이의 명성이 퍼지자 왕실의 종척이었던 그는, 이 멋진 기생을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하지만 저 도도한 여자가 분명 퇴짜를 놓을 듯 하니 함부로 데이트 신청을 할 수가 없다. 유명한 시인 손곡 이달이 그의 지인이었던 모양이다. 그에게 자문을 구했더니, 빙그레 웃으며 이달이 말한다.
“공이 황진이를 만나려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하오.”
“예. 그러리다.”
벽계수가 손곡의 자문을 구한 까닭은 황진이와 손곡이 교유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허균의 가문이 그 중간에 끼어있다. 허봉, 허난설헌 자매의 스승이 손곡 이달이었고, 허봉의 아버지인 허엽이 화담 서경덕의 제자였다. 화담과 황진이가 인연이 있으니, 결국 손곡과도 닿아있다고 봐야 한다. 손곡은 황진이의 ‘깊은 트라우마’를 이해하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이에게 거문고를 맡겨서 뒤따라 걷게 하십시오. 황진이의 집을 지나가셔서 누각에 올라 술을 마시면서 거문고를 타고 계십시오. 그러면 황진이가 나와서 그대 곁에 앉을 겁니다. 그때 본체만체하고 일어나서 빨리 말을 타고 떠나십시오. 그러면 황진이가 따라올 겁니다. 취적교를 지날 때까지 돌아보지 않으면 성공입니다.”
이 이야기는 지어낸 것일까. 손곡이 황진이의 심리를 꿰뚫고 있는 것을 어떻게 봐야할까. 그녀에게 사랑은 게임이니까, ‘관심을 보이는 것’은 별로 약발이 먹히지 않는다. 오히려 무관심으로 당겨야 한다. 거문고를 타며 술을 마시는 그것만 보여주면 된다. 그러면 황진이는 당신이 궁금해질 것이다. 그런데 손곡은,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코치해주지 않았다. 황진이가 빼어난 시인이라는 것을 말이다.
벽계수는 그대로 했다. 과연 황진이가 따라왔다. 그는 이제 됐구나 싶어 달이 훤한 취적교 위로 말을 몰았다. 그때, 조선의 베테랑 악사도 입을 딱 벌렸던, 신이 내린 목소리로 시조 한 수가 창(唱)에 얹혀 흘러나온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노래도 노래거니와 가사가 말발굽을 세운다. 푸른 산 속에 흐르는 푸른 계곡물아, 잘도 흘러간다고 졸졸거리지 말아라. 푸른 바다에 한번 도착한 뒤에 다시 돌아오려면 기회가 없다. 밝은 달이 빈 산에 꽉 차 있으니 놀다 좀 가시오. 벽계수와 명월을 맞춘 천의무봉의 은유이다. 어이 벽계수씨, 쉬었다 가세요. ‘취한 오빠’의 팔을 잡는 무뚝뚝한 호객(呼客)도 언어 몇 개가 초간장을 치면 사람의 간장을 녹이는 절절한 유혹이 된다는 걸 황진이는 유감없이 보여준다. 우리야 이 시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 ‘감동’이 줄었지만, 당시 벽계수는 처음 듣는지라 영혼의 뒤통수를 치는 사이렌의 노래같았던 모양이다. 그는 손곡의 말을 잊어버리고 무심코 뒤를 돌아본다. 그러자 나귀가 취적교를 다 간 난간에서 비틀거린다. 벽계수는 균형을 잃고 말에서 떨어진다. 한껏 무심한 표정으로 일궜던 카리스마를 바닥에 처박고 만다. 황진이는 껄껄 웃으며 팔짱을 끼고는 돌아선다. 한 소리 툭 뱉지 않았을까.
“그대는 명월에 계수나무 심을 생각 마시고, 그냥 쭈욱 흘러가는 게 좋겠소.”
이 시조가 19세기의 자하 신위에게도 인상적이었던지 7언절구의 한시로 번역해놓았다.
靑山影裏碧溪水 容易東流爾莫誇
청산영리벽계수 용이동류이막과
一到滄溟難再見 且留明月影婆娑
일도창명난재견 자유명월영파사
청산 그림자 속의 벽계수야
쉽게 동쪽으로 흐른다고 너 자랑마라
한번 바다에 닿으면 다시 보기 어려우니
명월에 머무르면 그림자가 춤을 추리라
솔직히 이 한시는 자하답지 않다. 황진이의 군더더기 없는 시조를 버려놓은 느낌이 있어 아쉽다. 황진이의 감성이 이 시대 사람들을 여전히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은, 시조의 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여섯 수를 남기고 있는데 모두 쉽고 빼어나 지금도 곧잘 입에 오르내린다. 그 중 ‘청산리 벽계수야’는 분명히 실명(實名)의 대상(碧溪守)을 유혹하는 노래인데, 나머지 다섯 수는 누구를 겨냥하고 있는지 어떤 상황에서 부른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마도 술자리에서 감흥이 돋아 읊은 시이거나 고적한 밤에 홀로 앉아 밝힐 수 없는 어떤 사람을 생각하며 시상을 가다듬은 것이리라. 이 참에 한글이 보석처럼 엮인 절창(絶唱)들을 듣고 지나가자.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에 흐르니 옛 물이 있을소냐
인걸도 물과 같아야 가고 아니 오노매라
흘러가버린 옛 시절의 빼어난 사람을 그리워하는 노래인데, 묘하게 뼈가 있다. 지금은 옛날만큼 괜찮은 사람이 없다는 불만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황진이가 당대 사내들을 향해서 일갈하고 싶은 무엇을 물 속에 감췄다. 까불지 마라. 풍류도 모르고 시(詩)도 모르는 것들아. 나는 산처럼 여기에 있건만 조무래기들은 옛날의 시늉을 내지만 모두 ‘벽계수’류의 짝퉁이 아니던가. 봄날 불어난 물소리가 좋은 계곡 옆의 정자에 앉아 황진이는 이 시조를 읊었으리라. 오래 전 이곳에 왔을 때 함께 놀았던 벗들이 생각났다. 감회가 없을 수 없다. 그땐 그들과 있었는데, 지금은 다른 이들과 있구나. 나는 산처럼 있건만 그들은 물처럼 흘러가 버렸구나. 풍류도 무상하고 남자도 무상하다. 산은 붙박이의 운명이며 물은 뜨내기의 운명이다. 한 순간 같이 즐기고 동거를 하였다고 해서, 거기에 목매지 말고 꿈을 깨기 바란다. 이런 메시지도 느껴진다.
그런데 이 시조가, 듣는 ‘조무래기’들을 언짢게 하지 않은 까닭은 교묘한 중의(重意)에 있다. ‘인걸도 물과 같아야 가고 아니 오노매라’에서 ‘인걸’이 누구냐에 따라 의미가 바뀌기 때문이다. 옛날에 흘러간 물이 인걸이라면, 지금의 물에게는 욕이 되지만, 지금 흐르고 있는 물을 인걸로 대접하는 것이라면, 귀하신 분들이 귀하신 인연으로 잠깐 만났으니, 시간을 허투루 흘려보내지 말고 제대로 놀아봅시다,라는 의미가 된다. 동석자들은 아마도 후자로 듣고 흐뭇해 했으리라.
청산은 내 뜻이오 녹수는 임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잊어 울어 예어 가는고
이 시조 또한 앞 시조의 연장선상에 있다. 남자는 물이요, 자신은 산이란 의식이 뚜렷하다. 남자는 흘러가며 여자는 남는다. 이것은 ‘기생’이라는 직업이 지닌 숙명이기도 했다. 어떤 기생들은 남자와 함께 흘러가려고 발버둥을 치기도 하고, 흘러가는 남자를 붙잡아두려고 애원도 하지만, 황진이는 그것이 본질적으로 불가능함을 저렇게 뚫어보았다. 황진이의 ‘기생다움’은 자신의 존재를 살피는 통찰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흘러가는 것들에 대한 쓸쓸한 감회야 왜 없겠느냐 마는, 흘러가는 것들을 저주하며 울고불고 하지는 않는다. 황진이가 이토록 도도하고 담담하니, 오히려 사내들이 울고불고다. 계곡의 물소리를 사내들이 기생을 못잊어 질질 짜는 소리로 바꿔놨지만, 어떤 사내도 이에 이의를 달지 못한다. 황진이는 그럴 만한(울면서 지나갈 만한) 여자이기 때문이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둘에 내어
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은유의 센스와 상징의 재치로 보자면, 황진이 최고의 절창이 틀림없다. 잠 못 이루는 밤에 써두었던 시를, 어느 파티 자리에서 ‘조수미’ 음성으로 불렀을 것이다. 위의 ‘청산(靑山) 시리즈’에서 엿볼 수 있듯, 황진이의 시적 공간은 여간 큰 게 아니다. “남자같다”는 남자들의 지적은 이런 스케일에서도 드러난다. 산과 물을 가지고 놀더니, 여기선 시간을 가지고 논다. 동짓달의 밤 한 자락을 천처럼 잘라내는 기상(奇想)이 시의 엔진이다. 어느 겨울밤 님 생각에 잠을 못 이룰 때, 환장할 만큼 밤이 길었다. 이런 밤이 이렇게 길 필요가 있나. 가위로 싹둑 잘라버렸으면. 그런 생각을 하자, 님과 운우지정을 나누는 밤은 몹시도 짧더라는 한탄이 떠오른다. 그러면 그것과 그것을 바꾸면 좋지 않겠는가. 이때부터 황진이는 시간을 다시 재단하는 선녀가 된다. 겨울밤이 짧아지는 봄날 바람이불 밑에 감추겠다는 생각도 귀엽고 님과 만난 밤을 길게 하고싶다는 기녀다운 솔직함은 좌중의 사내들을 동하게 했으리라. 그렇지만 이 시의 백미는 뭐니뭐니 해도 ‘서리서리’와 ‘구뷔구뷔’다. ‘서리서리’는 실이나 천을 헝클어지지 않게 둥글게 감아서 쌓아두는 것을 말한다. 뱀이 그런 모양으로 똬리를 틀고있는 것이나 국수를 둥글게 쌓아두는 것도 ‘서리서리’라는 표현을 쓴다. 길고긴 밤이 긴 광목천이 되었으니, 그것을 양팔을 벌려 둥글게 감아둔 뒤 봄이 보지 못하게 감춰야 할 것이다. 왜 서리서리 감는가. 너무나 길기 때문에 함부로 놔두면 헝클어지기 때문이다. 나중에 쓸 일이 있기 때문에 잘 정리해두는 것이다. ‘서리서리’ 하나에 앙큼하고 세심한 여심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서리서리’ 네 글자를 받을 ‘구뷔구뷔’ 또한 맛이 있다. 서리서리 감아둔 ‘밤’은 이불 밑에 있었기에 눌려서 저절로 각이 잡혔다. 그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펴는 것이 ‘구뷔구뷔’이다. 여기엔 님 오신 밤을 경영하는 전략이 깔려 있기도 하다. 님이 오셨다고 숨긴 시간을 한꺼번에 모두 펴면 님이 질릴지도 모른다. 그러니, 끝무렵에 아쉬울 때마다 한 ‘구뷔’씩 살짝살짝 덧대어 잇는 것이다. 서리서리와 구뷔구뷔는 당대 남자들의 귓전에는 더할 나위 없는 ‘에로틱 퍼포먼스’였을 것이다. 이 모두가 침실의 이미지이다. 겨울밤엔 ‘허리’라는 말이 나오고, 봄날엔 ‘이불’이 나오는 건 넌지시 야한 암시를 뚱기기 위함인 건 물론이다. 이 시는 재치와 기발함이 워낙 승하여 진정(眞情)을 느낄 겨를이 좀 부족하다. 황진이의 마음을 보여주는 시조는 따로 있다.
내 언제 신이 없어 님을 언제 속였관대
월침삼경에 올 뜻이 전혀 없네
추풍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하리오
가을밤이다. 달이 지는 자정 무렵이다. 이건 분명 대상이 있을 터인데 숨겼다. 그가 오늘 밤 온다고 약속을 했다. 초경(初更, 7시-9시)부터 대여섯 시간을 기다렸다. ‘내 언제’와 ‘님을 언제’는 따지는 말투이다. 자신에게 따져보기도 하고, 오지 않는 남자를 마음으로 불러 따져보기도 한다. 내가 믿음 없이 행동한 적이 있었나? 님을 속인 적인 적이 있었소? 이렇게도 생각해보고 저렇게 생각해보는데, 왜 오지 않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열 두시가 넘어버렸다. 이제 오기는 글렀다. ‘올 뜻이 전혀 없네’는 포기했다는 뜻이다. 시의 아릿한 반전은 마지막 구절에 있다. 추풍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하리오. 포기하자고 입은 중얼거렸으나, 귀는 그걸 따르지 않는 셈이다. 잎이 떨어지며 사스락거리는 소리에 그만 귀가 쫑긋해진다. 이 마음. 이 얄궂은 마음. 포기하고 난 뒤에도 돋는 이 실낱같은 희망의 마음. 진실로 그리움이란 이런 것이 아닌가. 씩씩한 황진이도, 사람이 좋아지면 이렇게 예민하고 약해졌다. 이런 점이 조선 최고 기생의 명성을 만들어낸 면모가 아닐까.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 모르던가
있으랴 하드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가히 우리말 씀씀이의 달인이다. ‘어져 내 일이야’. 시의 처음을 자책(自責)의 탄성으로 잡았다. 시는 ‘어져’로 처음 시작됐지만, 황진이의 내면은 ‘어져’ 이전에 많은 생각이 있었다. 아이구. 내가 어떻게 일처리를 이 모양으로 한담? 천하의 황진이도 자신을 이렇게 나무라며 후회한다. 님이 떠날 때 혹시 님이 미안한 마음을 가질까봐 웃는 낯으로 보냈다. 내가 웃으니 님도 웃었다. 그렇게 빠이빠이 하고 돌아서 와서는 ‘어저’라며 후회를 한다. 이 바보같은 계집아. 떠나고 나면 그리워질 줄 몰랐는가. 아래 두 행은 사실은 세 행으로 나눠져야 자연스럽다. ‘있으랴 하드면 가랴마는 / 제 구태여 보내고 /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이렇게 말이다. 시조 운율의 제약에 따르기 위해 꺾지 않았어야 할 데를 꺾어버린 듯이 보이지만, 여기엔 치밀한 표현 전략이 깔려있다. ‘제 구태여’로, 아직 끝나지 않은 호흡이 뒤행을 빨리 따라오도록 심리적인 거리를 좁힌다. 말하자면 읽는 마음을 바쁘게 만든다. 황진이의 마음은 지금 이율배반(二律背反)이기 때문이다. 님은 내가 가지 말라고 말했으면 가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렇게 상황을 떠올린 뒤 ‘어져’의 자책을 강화하여 스스로를 비난하는 게 ‘제 구태여’이다. 시행의 끝에 갈고리같은 말을 걸어두어서 마음 속에 급박하게 이는 갈등과 혼란을 표현해낸 것이다.
쿨하게 애인을 보내고자 하는 ‘당찬 기생 황진이’와 보내놓고는 괜히 보냈다고 자기 머리를 쥐어박는 ‘소심한 여인 황진이’라는 두 페르소나의 싸움을 그림처럼 보여주는 시다. 시를 읽는 독자는 어떤가. 쿨한 황진이 내면에 숨은 그 여리고 애틋한 황진이, 그 ‘영혼의 속살’에 더욱 매료될 수 밖에 없다. 시만 읽어도 그런데 당사자가 앞에 앉아 저 푸념을 읊고 있으면 어떻겠는가.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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