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의 '스토리를 찾아서'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
"시간을 병 속에 모아둘 수 있다면,
내가 먼저 하고 싶은 것은
영원히 흐르는 매일매일을 모아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을 당신과 함께 쓰는 것입니다.
내가 그 날들을 영원히 지속하게 할 수 있다면
말들이 소망들을 이뤄지게 할 수 있다면
하루하루를 보물처럼 모아서
당신과 함께 보낼 거예요."
(If I could save time in a bottle
The first thing that I'd like to do
is to save everyday
Till eternity passes away
Just spend them with you
If I could make days last forever
If words could make wishes come true
I'd save everyday
like a treasure and then
Again I would spend them with you.)
짐 크로스(Jim Croce)의 '타임 인 어 바틀(Time In A Bottle)' 중에서
▶짐 크로스의 '유리병 시간' 1973년 루이지애나 주립대학 공연을 마치고 텍사스로 가던 중 비행기 추락 사고로 숨진 짐 크로스는 이 곡을 남겼다. 사후에 이 노래는 큰 인기를 얻어 빌보드 정상까지 휩쓸었다. 아름다운 기타소리가 마음을 매만지는 듯한 이 노래의 가사는, 유리병 속에 든 시간을 말하고 있다. 31세로 세상을 뜬 그가 채 누리지 못한 나머지 시간은 유리병 속에 아직도 들어있는 것일까.
짐 크로스가 노래한 것처럼, 세상의 많은 이들이 유리병 속에 편지를 넣고 바다에 던졌다. 먼훗날 누군가가 자신의 글을 읽어주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편지를 쓴 사람의 생애가 끝나도록 물 속에 잠겨 있던 편지도 있었고, 우연히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 놀라운 인연으로 발전하게 한 편지도 있었다.'유리병 편지'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배달망을 넘어서 '철저한 우연'이 결정한 장소와 시간으로 배달된다는 점에서, 존재와 삶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과 갈구를 담은 것이라 할 수 있다.
▶ 아우슈비츠를 탈출한 유리병 편지 가장 극적인 '유리병 편지'는 1942년 아우슈비츠 가스실에서 죽어간 유태인 시인 이작 카체넬존의 시집을 담은 것이었다. 그해 유태인들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나치에 항거에 싸우다 전멸의 위기를 맞았으나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해줄 시인 한 사람을 피신시키는데 성공했다. 카체넬존은 겪은 일들을 시로 깨알같이 적어 여섯 부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마저 붙잡혀 유태인 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런데 그곳 아우슈비츠에서 죽기 직전, 시인은 자신의 시들을 유리병 속에 담아 수용소 마당에 파묻어 놓았다. 그 중 한 권은 바다를 건너오기도 했다. 카체넬존의 시들은 세상에 알려져 인류를 공분케 하고 눈물을 흘리게 했다. 같은 유태인으로 시인이었던 파울 첼란은 "시는 유리병 편지와 같다"고 말했다. 누군가에게 닿기를 간절히 희망하며 한없이 떠다니는 그 고독한 오디세이야 말로 '시'가 지향하는 것임을 강조한 말이리라.
▶ 107년 동안 떠돌다 도착한 '유리병 편지' 영국 '가디언'은 지난 4월19일 독일 암룸섬에서 발견된 유리병 편지에 대해 보도했다. 이 매체는 이 유리병 편지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세계 기네스협회의 공인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 편지는 무슨 편지였을까.
1908년 11월 30일 영국 해양생물학자 조지 파커 비더는 북해에 유리병을 던지고 있었다. 당시 해양생물협회는 1000여개의 유리병 편지를 던져 그것을 찾아낸 사람들에게 1실링씩을 주는 행사를 벌였다. 해류의 움직임을 연구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던진 1000여개의 유리병들은 1년내에 대부분 회수되었으나 비더가 던진 것만은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2015년 전직 우체국 직원인 윙클러는 독일 프리시안제도의 섬 해안에서 이 병을 발견했다. 그는 유리병 안에 "이 병을 깨뜨려요"라고 씌어진 글을 보았다. 그 말대로 병을 깬 뒤 그 속에 담긴 편지를 꺼냈다. "이 편지를 발견하면 영국 플리마우스에 있는 해양생물협회로 보내주세요"라고 씌어져 있었다.
무려 107년만에 돌아온 편지에 협회선 깜짝 놀란다. 특히 1939년에서 1945년까지 이 협회의 협회장을 지낸 사람이 비더였기 때문이다. 그는 1954년에 돌아갔다. 그의 사후 61년만에 편지가 돌아온 셈이다. 영국 해양생물협회는 108년전 행사에서 약속한 대로 100년전 주화인 1실링을 이베이서 어렵게 사들여 윙클러에게 전달했다.
▶유리병 편지의 역사 최초의 유리병 편지는 기원전 310년 그리스 철학자 테오프라스토스가 보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로 대서양 물결이 지중해로 흐르는 것을 실험하기 위해 병을 띄웠다. 미대륙을 발견한 콜럼부스는 스페인으로 가는 길에 태풍을 만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는 탐험기록을 적은 편지를 담은 유리병을 바다에 던져놓았다. 배가 침물하더라도 신대륙 발견의 기록은 남겨야했기 때문이다.
1912년 빙산에 부딪쳐 타이타닉호가 침몰한다. 그 이듬해에 아일랜드 던케틀 해변에서 그 배에 타고 있던 승객이 보낸 유리병 편지가 발견된다. 병 속에서는 "타이타닉에서 보냄. 모두들 안녕."이라고 적힌 글이 나왔다.
▶ 해마다 세계 곳곳서 발견되는 유리병 편지 사연은 끝도 없이 이어진다. 브리티시 콜럼비아 해변가에서 발견된 유리병에는 한글이 씌어진 노란색 편지지 한장이 들어있었다. 올 2월에 있었던 일이다. 민지라는 이름의 발신자가 9년전에 돌아간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쓴 편지였다. "올해로 벌써 9년이네요. 너무너무 그립고 보고싶습니다. 하늘에서 저희를 잘 지켜보고 계실줄 알고 저희두 열심히 살고 있는데..." 유리병 편지가 먼훗날을 향해 보내지는 것만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다가갈 수 없는 '하늘'을 향해 발신되기도 한다는 걸 보여준다. 이 게시물은 소셜네트워크에 올라 네티즌들의 심금을 울렸다.
또 4월에는 조노단이란 소년이 다니엘이란 죽은 친구에게 보내는 유리병 편지가 공개되기도 했다. "나는 지금 5학년이야. 넌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어. 우리가 제일 좋아한 노래는 오스틴 문이었고..."로 시작하는 이 편지는 발견자인 스티브 머숀에 의해 페이스북에 공개되어 많은 이들을 눈물 짓게 했다.
작년 6월 영국의 애버딘셔의 해변에선 44년간 떠돌아다녔던 유리병 편지가 발견됐다. 당시 14살 소년 레이몬드 데이비슨이 쓴 것이었다. 이것을 주운 신 토마스와 셸리 토마스 부부는 SNS를 통해 이 소년을 찾았다. 그는 유리병이 발견된 곳에서 멀지 않은 컴브리아에 살고 있었다. "할아버지댁을 방문했다가 그 편지를 넣어 던졌고 그뒤로 까맣게 잊어버렸는데..."라며 마흔 여덟이 된 데이비슨은 놀라워했다.
2014년 1월에는 네덜란드 해안에 23년전에 던져놓았던 유리병 편지를 다시 찾은 이야기가 소개되었다. 영국에 거주하는 조우 레몬(33세)이 열 살 때 네덜란드에 갔을 때 자신의 애완견 이야기와 하고싶은 것 따위를 적어 병 속에 넣어 바다에 던졌는데, 해변가를 산책하던 사람이 발견해 병속 편지에 적혀있는 주소로 직접 찾아왔다고 한다.
2013년 8월엔 미국에서 1963년에 던진 유리병 편지를 다시 찾게된 사연이 등장했다. 데니스 콤사는 12살 때 이 편지를 썼다. "이 글을 읽을 누군가에게. 아래 질문에 대답한 뒤 우편으로 보내주세요. 12살 데니스 콤사의 과학실험입니다"라는 글을 써서 넣어놓았다. 50년이 흐른 뒤 허리케인 샌디가 휩쓸고 간 집을 청소하다가 잔해더미 속에서 유리병이 발견됐다. 데니스가 던진 장소에서 300m 밖에 이동하지 않은 거리였다. 병 속의 글을 발견한 놀먼 스탠턴은 이미 60대를 넘긴 데니스를 찾아 유리병 편지를 전해줬다.
또 2013년엔 아일랜드 동남쪽의 어촌 마을 패시지이스트에서 8년전 캐나다 10대 소녀 두 명이 써보낸 유리병 편지가 발견되었다. 2004년 6월 캐나다 퀘벡주의 가스페 반도에서 당시 12살 샬레인 달페와 클라우디아 가르노가 바다에 던진 것이었다. 이 유리병은 대서양을 돌아 아일랜드로 흘러왔다. 이 병을 발견한 사람은 10살 오이진 밀레였다. 병 속에는 이메일 주소가 적혀있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SNS를 통해 소식이 알려지면서 오이진 밀레와 대학생이 된 두 소녀는 인터넷 전화 통화를 했다. 비슷한 경우로, 미국에서 2014년 1월에 던진 유리병 편지가 1년반만에 영국에 도착한 경우도 있었다. 당시 열두 살이었던 그랜트 베베는 자신을 소개하는 글과 그림을 그린 편지를 병 속에 넣었다.
2012년엔 스위스서 띄운 유리병 편지가 30년만에 남아공화국 해안에서 발견됐다는 뉴스가 있었다. 스위스 오베리드에 사는 48세 베르너 쿠니스는 자신이 열여덟 살 때 스위스 라인강에 던진 유리병 편지의 답장을 받았다. 남아공 케이프타운에 사는 한 여성이 해변에서 이것을 발견하고 독일어를 아는 친구에게 부탁해 유리병편지와 함께 답장을 보내온 것이었다. 라인강의 유리병이 케이프타운까지 흘러가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신기해 했다.
▶운명을 바꾼 '유리병 편지'의 사랑 10살의 영국소녀 애니는 그가 읽고 있던 소설의 한 장면처럼, 빈 와인병 속에 편지 한통을 담은 뒤 코르크 마개로 막아 영불해협 한 가운데를 지나는 배 위에서 바다로 던졌다. 1963년이었다. 그녀는 부모와 함께 파리로 여행을 가는 중이었다. " 이 편지를 발견하는 사람은 발견 장소를 적어 아래의 주소로 답장을 보내주세요." 그녀는 편지가 프랑스로 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영어 옆에 불어를 병기했다. 그러나 편지가 도착한 곳은 네덜란드였고, 그 병은 12살 소년인 앨퍼스의 손에 쥐어졌다.
그들은 서로 펜팔이 되었다. 2년 동안 편지로만 오가던 그들은 마침내 애니가족의 네덜란드 여행으로 처음 만난다. 아마도 애니가 부모에게 이 사실을 알렸을 지 모른다. 그리고는 거기로 여행을 가자고 노래처럼 졸랐을지 모른다. 그 짧은 만남은 다시 긴 이별로 이어진다. 8년 동안 다시 그들은 펜팔이었고, 이번에는 프랑스에 살게된 애니에게 앨퍼스가 방문함으로써 두번째 만남이 이뤄진다. 그들은 잠깐 만난 뒤 다시 헤어졌지만 10년 동안 오간 편지가 쌓은 신뢰와 그리움은 그들을 오래 헤어져 있게 하지는 못했다. 그들이 결혼하는 것은 다시 5년 뒤엔 1978년이었다. 그 중간에 둘은 프랑스 일주 여행을 함께 떠났다. 함께 떠난 이유는 경비를 아끼기 위해서였다고 그들은 말한다. 15년 만에 이뤄진 이 긴 러브스토리를 발굴해 보도한 곳은 영국의 더 타임스다. 이 부부는 스코틀랜드에 살고 있다.
저 이야기에는 전 시대의 느린 사랑이 긴 시간 속에서 곱게 펼쳐져 있다. 병 속에 든 편지로부터 시작하여 15년 만에 마침내 결혼한 두 사람. 그것도 먼 두 나라를 오간 그리움의 결정(結晶).
그러나 인터뷰를 하는 두 사람의 말은 서로 조금 달라서 재미있다. 남편 앨퍼스의 말. "프랑스 와인 몇 잔이 우릴...사랑에 빠지게 했죠." 언제 얘길까. 아마도 두번째 만남에서 함께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병속의 편지 이후 10년 만이다. 아내 애니의 말. '15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가 좋은 남자라는 걸 알게 됐어요." 남편이 낭만 쪽에 무게를 둔 반면, 아내는 시간이 쌓은 신뢰감에 무게를 둔다. 둘의 말을 종합하면 느리게 발효한 사랑의 눈을 통한 '존재의 재발견'인 셈이다. 정말, 저런 긴 호흡의 사랑이 칭찬받고 완전한 삶의 모델로 여겨지던 때가 있었다. 마치 그 사연은 그 자체가 하나의 병 속에 들어가 있다 나온 것처럼, 잊고 있었던 '느려터진 사랑'을 타임캡슐에서 꺼내 우리에게 보여준다.
'유리병 편지'는, 즉물적이고 즉흥적인 사랑과 광속으로 빨라진 메신저들의 소란에 말없는 태클을 건다. 과연, 그토록 급하고 편리하게 소통해서 얻은 것이 무엇이냐고? 왜 저토록 많은 사람들이 '우연의 바다'에 메시지를 내던져 먼훗날 먼곳의 응답자를 기다렸을까. 디지털뉴스룸의 숨가쁜 자리에 앉아, 문득 돌이켜본다.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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