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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경이 선정한 올해의 인물]메르스와 싸운 무명의 의료전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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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마음까지 치유해준 당신, 감사합니다


국민 여러분께
전파 경로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미지의 질병, 우리도 정말 무서웠어요
의료진 자녀라고 아이들은 학교도 못가고…
대중교통·사람 많은 곳 피해서 도둑출퇴근 땐 눈물 핑 돌았죠
그래도 죽음의 문턱서 의식 되찾는 환자보며 가슴 벅찼습니다
응원해 주셔서 저희도 감사합니다

-메르스 의료진


[아시아경제 지연진 기자]치열했던 시간이었다.

중동호흡기증후군(MERSㆍ메르스)이 우리나라를 강타한 2015년 여름, 수많은 대한민국 의료진들이 감염병 최전선에서 '보이지 않는 적'과 사투를 벌였다.


 바레인을 다녀온 60대 남성이 첫 메르스 확진환자로 진단된 5월20일부터 시작된
메르스 바이러스와 전쟁은 현재까지 '진행형'이다. 정부는 지난 24일 0시를 기점으로 국내 메르스 유행의 공식 종식을 발표했지만, 아직도 2명의 확진자가 메르스 음성 전환 후 재활치료 중이다. 중동 지역에선 메르스 의심환자가 매일 입국하고 있다.


 아시아경제는 신종 감염병인 메르스와 맞서 묵묵히 환자를 돌보고, 치료한 대한민국 의료진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이들은 "메르스는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감염병이었다", "처음에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답답했었다", "우리도 무서웠다"라고 메르스에 대해 회고했다.


 ◆"우리도 무서웠다" = 메르스가 유행한 2015년 여름 대한민국은 말그대로 공황상태였다.


 치사율 40%에 이르는 강력한 신종 감염병이 상륙, 평택성모병원을 거쳐 삼성서울병원 등으로 확산되면서 공포는 극에 달했다. 병원은 물론 공공장소와 거리는 인적이 끊겼고, 3000여개의 학교가 휴교에 들어갔다.


 메르스 감염자를 지근거리에서 보살펴야 하는 의료진은 감염 위험에 노출된 만큼 두려움이 더 컸다.


 메르스 환자를 가장 많이 치료한 국립중앙의료원의 김재연 감염내과 전문의는 "초반에는 메르스가 어떻게 전파되는지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어 두려움이 많았다"면서 "감염될 수 있다는 우려가 가장 무서웠다"고 말했다.


 실제 전체 메르스 환자 186명 가운데 의료진이 감염된 사례가 31건(16%)이나 됐다.


 일부 의료진은 보호장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환자를 치료하다 감염됐다. 보호장비를 갖춰 입은 의료진 역시 환자와 매일 접촉하는 만큼 감염에 대한 공포가 컸다.


 의료진들은 동료들이 미열이 나거나 메스꺼움에 식사를 제대로 못할 때, 복통을 일으킬 때 등 메르스 증세가 나타날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경험을 했다.


 메르스에 대한 공포는 의료진 가족까지 기피하는 현상까지 만들었다. 의료진의 자녀라는 이유로 등교를 거부당했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격리돼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이 때문에 일부 의료진은 가족에게 숨기고, 메르스 환자를 치료하기도 했다. 자녀를 다른 가족에게 맡기거나 배우자와 떨어져 혼자 생활하는 사례도 비일비재했다.


 메르스 환자를 치료하던 병원 의료진은 대부분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못해 택시로 출퇴근을 했다. 이 마저도 눈치를 봤다. 이인덕 서울의료원 간호부장은 "메르스 치료 의료진를 꺼리다 보다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도둑 출퇴근했다"면서 "택시마저도 병원 앞에선 안잡혔고, 병원에서 한참 떨어진 곳까지 걸어 가서 택시를 잡을때 마다 눈물이 핑 돌곤 했다"고 말했다.


 ◆환자 생사에 울고웃고 = 메르스 환자를 돌보던 의료진이 가장 힘들어 했던 것은 환자의 임종을 맞는 순간이었다. 메르스 환자는 격리된 상태에서 가족들과 면회도 금지된 채 홀로 임종을 맞아야 했다.


 42번째 확진자(54·여)는 대상포진으로 평택성모병원에 입원했다 메르스에 감염돼 확진 판정을 받고, 서울의료원에 격리된 지 20일만에 숨졌다. 인공호흡기를 부착한 탓에 가족과 전화조차 불가능했다.


임종 직전 42번 환자의 딸은 의료진의 전화를 받고 "평소에는 이런 말을 못했는데 엄마가 죽기 전에 제가 사랑한다고 전해주세요"라는 말을 남겨 병원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


이인덕 간호부장은 "42번 환자의 보호자의 이런 부탁은 간호기록으로 남겨졌고, 교대근무 간호사들이 이를 보고 같이 울었다"면서 "아직도 그 때를 생각하면 목이 메인다"고 털어놨다.


 국내 메르스 사망자는 38명에 달한다. 이들 사망자 중에는 10%가 평소 기저질환이 없이 건강했던 사람들이었다.


 메르스라는 이름도 생소한 신종 감염병에 의해 가족을 잃고 오열하는 보호자를 위로하는 것도 의료진의 몫이었다.


 이재갑 강남성심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보호자들은 환자의 임종을 직접 보지 못하고 유리창 너머로 지켜봐야 했다"면서 "환자는 물론 보호자도 감염자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팠다"고 회상했다.


 보람된 순간도 있었다. 만성신부전으로 혈액투석을 받던 한 환자는 메르스에 감염돼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겼다. 결국 폐렴이 악화됐고, 죽음의 문턱에 도달한 환자를 살리겠다고 많은 의료진이 한꺼번에 투입됐다.


 김재연 전문의는 "환자를 살리겠다고 모두 함께 적극적으로 치료했다"며 "환자가 인공호흡기를 떼고 의료진들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순간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고 했다.


 ◆끝까지 환자를 지켰다 = 메르스 환자들은 두통과 발열, 폐렴 등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과 싸우는 한편, 외로움과도 사투를 벌인다. 감염자들은 가족들과 떨어져 홀로 격리병실에서 지내는 만큼 정서적인 불안감은 날로 악화됐다. 이 때 환자에게 정신적 지지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의료진이 유일하다.


 특히 간호사들은 가족을 대신해 말벗이 되고, 병원청소 담당자마저 떠나버린 격리병실의 침대시트를 갈고 청소를 도맡아했다. 보호자가 접근할 수 없는 메르스 환자의 손과 발이 돼준 것도 간호사들이었다.


 이인덕 간호부장은 "메르스가 환자가 먹을 일회용 식사를 배식하는 일부터 환자에게 커피 등의 간식을 챙겨주는 것도 모두 간호사들의 몫이었다"고 했다.


 의료진이 메르스와 고군분투한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주변의 인식도 바뀌었다. 사지(死地)로 보낼 수 없다던 부모님은 나중에는 든든한 지원군이 됐고, '메르스 왕따'를 당하던 의료진의 자녀들도 엄마, 아빠를 자랑스러워했다.


 손준성 강동경희대병원 감염내과 교수 "처음에는 가족들의 반대가 컸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지지해줬다"며 "이런(감염병 환자를 돌보는)일을 하려고 감염내과 의사가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인덕 간호부장은 "우리가 대충 계획하고, 대충 노력하고, 대충 포기했다면 이처럼 빛나는 성취감은 없었을 것"이라며 "우리는 진심으로 메르스 퇴치가 우리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믿었고, 치밀하고 꼼꼼하게 계획을 세우고, 연습했으며 환자의 고통과 외로움을 가족처럼 걱정하고 공감했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지연진 기자 gyj@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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