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조영주 기자]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11월22일은 잊지못할 날이다. 김 전 대통령이 국제통화기금(IMF) 구체금융을 신청하게 됐다는 내용의 대국민 특별담화를 발표한 날이 1997년 바로 이날이다. 당시 그는 "국정 최고 책임자로서 국민 여러분에게 참으로 송구스러울 뿐"이라며 외환위기를 초래한 데 대해 사과와 유감의 뜻을 표명했다.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2015년 같은 날 새벽 김 전 대통령은 영면에 들어갔다.
IMF 구제금융 신청은 김 전 대통령의 공과를 따질 때 가장 큰 과오로 지적된다. 하지만 금융실명제와 부동산 실명거래 등 경제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했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통해 적극적인 시장개방을 시도하는 등 적지않은 업적을 남겼다.
'칼국수'로 기억되는 김 전 대통령은 정치자금 등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고 변화와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대표적인 것이 금융·부동산 실명제다. 취임 첫해인 1993년 8월12일 '대통령긴급재정경제명령 16'호 발동을 통해 전격 시행한 금융실명제는 가명·차명 금융거래가 비리·부패의 원인을 차단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담화문에서 "금융실명제를 실시하지 않고는 이 땅의 부정부패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없고, 정치와 경제의 검은 유착을 근원적으로 단절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부동산거래 실명제가 도입됐다. 금융실명제 실시로 부동산에 자금이 쏠릴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자 투기를 막으려고 1995년 1월6일 부동산 실명제 실시 계획이 발표됐다. 규제개혁에도 적극적이었다. 기업창업과 공장입지는 물론 자금조달, 시장진입 관련 행정 절차가 간소화됐다.
1996년 12월에는 OECD에 가입했다. 정부가 선진국 진입의 상징과도 같았던 OECD 가입을 통해 경제개혁과 개방을 적극 추진했지만, 머지 않아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1997년 1월 재계 14위인 한보그룹 계열사인 한보철강 부도를 시작으로 대기업 연쇄 부도 사태가 벌어졌다. 4월 삼미그룹이 부도난 데 이어 7월 기아자동차가 도산했다. 쌍방울그룹, 해태그룹이 위기를 맞았고 고려증권, 한라그룹도 넘어졌다.
1997년 한 해 동안 부도를 낸 대기업의 금융권 여신은 30조원을 넘어섰다. 이에 따른 신용 경색과 금융시장 혼란은 금융위기로 몰아갔다. 해외 금융기관의 부채 상환 요구에 외환보유액이 바닥나자 같은 해 11월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해야 했다. 모라토리엄(채무지불유예) 선언을 피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다.
OECD 가입을 서두른 것이 화근이었다는 비판도 뒤따랐다. 충분한 사전준비 없이 급속한 시장개방과 자본 유출입 허용한 값을 톡톡히 치른 셈이다. 김 전 대통령의 취임 초기 80%에 달했던 지지율도 바닥으로 떨어졌고, 국민들은 금 모으기 운동까지 벌이며 위기를 이겨내야 했다.
세종=조영주 기자 yjch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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