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우리가 다 아는 대로 최강희가 조광래의 후임을 맡았다. 그런데 그는 대표 팀을 맡으면서 스스로 '시한부 감독'임을 천명했다. 대표 팀을 맡는 감독은 취임할 때 포부나 각오, 계획을 밝혀야 상식이다. 그런데 최강희는 달랐다.
그는 2011년 12월 22일 서울 종로구 신문로 축구회관에서 열린 감독 취임 기자회견에서 "대표팀을 8회 연속 월드컵 본선 무대에 올리는 것까지가 나의 소임이다. 본선에 가더라도 대표 팀 감독직을 사양하겠다"고 했다. 이어 "축구협회에 계약기간을 2013년 6월까지 해달라고 했다. 이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계약하지 않겠다"고 덧붙였다. "대표 팀 사령탑은 절대적으로 외국인 감독이 맡아야 한다"고도 했다.
최강희는 2013년 6월18일 대표 팀의 지휘봉을 내려놓고 열흘 뒤인 2013년 6월 28일 전북 현대와 계약함으로써 국내 리그로 복귀했다.
한 지도자의 능력과 무관하게, '어울리는 옷'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나는 국가대표팀이 최강희에게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봉동 이장'이라는 인상적인 별명이 암시하듯, 그는 클럽에 속해 많은 권한을 부여받고 오래 팀을 꾸리면서 자신의 축구 세계를 만들어갈 때 능력을 발휘하는 인물로 보인다. 그와 흡사한 인물이 그의 스승인 김호다.
최강희의 축구인생에 김호만큼 영향을 끼친 인물은 없다고 나는 믿는다. 두 사람은 고졸 학력으로 국가대표 선수와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맡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최강희는 우신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인상적인 커리어를 쌓지 못했다. 그의 축구는 김호가 감독을 맡은 한일은행에 입단한 뒤 싹을 틔운다. 김호가 프로축구 팀인 울산 현대 호랑이의 감독으로 부임한 뒤 최강희도 프로선수가 되어 한 팀에서 인연을 이어간다. 이 시기에 최강희의 잠재력이 폭발한다.
나는 1990년부터 두 시즌 동안 축구 기자로서 현대 호랑이 축구단을 출입했다. 현대가 울산공설운동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던 그 시절, 김호의 마지막 임기와 차범근의 첫 임기를 지켜보았다. 이 시기에 최강희는 엄청난 체력으로 그라운드 곳곳을 누비며 공격과 수비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정신적으로는 팀의 리더였다.
최강희의 사람됨은 아주 성실하면서도 섬세했다. 예민한 면도 있어서, 외국에 전지훈련을 갈 때 자신에게 딱 맞는 베개를 여행 가방에 넣고 다녔다. 아내와의 금슬도 남달랐다. 내 경험에 비추어 보면, 스포츠 인으로서 성공한 남성들은 결혼생활도 성공적으로 해냈다. 1990년대만 해도 운동선수의 안사람들은 대개 전업주부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성품이 원만하고 남편에게는 헌신적이었다.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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