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 아나운서가 말하는 아나운서 되기
2000대 1. 대한민국 아나운서 평균 입사 경쟁률이다. 방송통신위원회와 미래창조과학부가 공동 발간한 ‘2013년 방송산업 실태조사 보고서’는 2012년 기준 전국의 아나운서 수를 784명으로 추산했다. 매번의 입사시험에 전국 아나운서 수보다 3배 가까운 지원자가 몰리는 셈이다.
더욱이 입사 이후 직면한 현실은 꿈꾸던 모습과 다른 경우가 많다. 정규직보다 계약직이 많은 탓에 고용불안에 시달려야 하는 것은 물론 원하지 않는 역할을 강요받기도 한다. 메인프로그램에서 잘리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다.
본지가 아나운서와 아나운서 지망생을 직접 만났다.
◆‘아나운서=성공’ 등식의 이면
“이젠 뭐 숨길 필요도 없다. 모두 털어놓고 싶다.”
2년 전까지만 해도 아나운서 지망생으로 꿈을 키우다 포기하고 대기업 사원으로 입사한 황유리(26·가명)씨의 첫 마디다. 황씨는 TV속 아나운서처럼 지성과 아름다움을 겸비하고 대중의 목소리를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처음에는 주변의 기대가 컸다. 아나운서에 지망하는 것만으로도 가족, 친척, 지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는 듯 했다. 그녀는 한 지인의 소개로 서울 시내에 있는 K아나운서 아카데미에 들어갔다.
아나운서 지망생에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무엇보다 아카데미에 들어선 순간 수업료가 적잖게 부담이 됐다. 일주일에 2회, 두 달 동안 진행되는 학원비는 300만원을 웃돌았지만 강의 내용은 기대 이하였다. 현직 아나운서가 표정, 발성법, 이미지 메이킹 등을 꼼꼼히 가르쳐 준다는 설명과 달리 실상은 자기 자랑과 개인적인 잡담이 주를 이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원은 이같은 수업을 3단계의 코스로 나눠 꾸준히 다닐 것을 강요했다. 그래야 방송사에 추천서를 써주겠다는 것.
황씨는 높은 수업료 때문에 학원 수업이 없는 날에는 카페 아르바이트를 통해 돈을 모았다. 그녀는 “수강생 입장에서는 현직 아나운서에게 개인 지도를 받기 위해 학원을 등록하는 경우가 많다”며 “하지만 돈에 비해 실제로 배우는 것은 별로 없었고 모두 자기 자랑만 늘어놓다 돌아갔다”고 푸념했다.
성형을 종용하는 분위기도 부담이다. 강남구에 있는 L아카데미에서 1년째 아나운서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유지연(27·가명)씨는 성형을 강요받았다. 이곳에서는 주기적으로 카메라테스트를 실시하는데, 그럴 때마다 학원 관계자는 지연씨에게 ‘코를 높여야 한다’거나 ‘보톡스를 맞아야 한다’고 강요했다. 그러면서 유명 성형외과를 소개해줬다. 나중에 알고 보니 L학원과 해당 성형외과는 제휴관계였고 대부분의 학원 수강생은 그곳에서 성형수술을 받고 있었다.
실제 신사동에 위치한 한 아나운서 아카데미는 프로필사진 스튜디오, 헤어숍, 뷰티숍, 피부과, 성형외과 등과 제휴를 맺고 있다. 해당 아카데미 회원증을 제시하면 20~50%가량 할인 혜택을 준다. 유씨는 “학원에서 성형을 강요하는 이유는 그들이 성형외과와 제휴를 맺고 일정부분 수수료를 받고 있기 때문”이라며 “요즘에는 아나운서 패키지 성형까지 등장했다고 들었다”고 귀띔했다.
더욱이 불편한 자리에 불려나가는 일도 있다. 학원 원장이 방송사 관계자와 주선하는 자리는 아나운서 지망생에게는 눈도장을 찍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거절이 쉽지 않은 이유다. 방송 관계자는 남성이고 그런 자리에 불려나가는 지망생은 대부분 여성이다.
한 아나운서 지망생은 “같은 학원에 다니는 친구는 모 방송사 PD에게 잘 보여서 결국 지난해 메이저 방송사 스포츠 아나운서로 입사했다”며 “공채를 통해 입사하는 루트보다 이렇게 인맥으로 들어가는 경우가 더 많다”고 털어놨다. 다른 아나운서 준비생 역시 “방송 관계자에게 추천받으려면 학원 원장에게 잘 보여야 하고 학원 원장에게 잘 보이려면 학원에 돈을 많이 써야한다”며 “돈도 많이 들고 또 이런 자리에 가면 그저 그들의 하수인이 된 느낌 때문에 자괴감마저 든다”고 토로했다.
학원과 방송 관계자의 사적인 만남 주선은 중앙 방송사보다 지역 방송사와 연계된 경우가 많다. 익명을 요구한 한 지상파 PD는 “과거에 이 부분과 관련된 사건이 크게 터졌는데 그 후로는 들어본 적 없다”라며 “하지만 지방은 다를 수도 있다”고 귀띔했다. 다른 지상파 PD 역시 “중앙보다 지역 방송사에서 이런 일이 잦은 것으로 안다”며 ”지망생들의 절박함을 이용해 PD나 방송국 관계자를 사칭하고 접근하는 경우도 있으니 특별히 유의해야 한다“라고 조언했다.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아나운서
치열한 경쟁을 뚫고 아나운서가 된 이들도 마냥 좋지만은 않다. 지망생이 선망하는 ‘현직’이라는 타이틀을 따냈지만 업계 사정은 자신이 꿈꾸던 모습과 다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여성 아나운서들은 대부분 고용불안에 시달린다. 지상파 방송국 본사는 대부분 정규직 아나운서를 채용하지만 이는 전체 아나운서 숫자에 비하면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프리랜서로 광고모델과 행사진행 등을 해 정규직 보다 고수익을 올리는 경우도 있지만 대다수는 상대적으로 불안정한 지위에 많이 노출돼 있다.
본지가 2013년 4월 이후 지상파(KBS, MBC, SBS) 및 지역 지상파, 지상파 계열사, 지역민방, 종합편성채널 등이 낸 아나운서 채용공고를 분석한 결과 여성 아나운서를 채용한 경우가 더 많은 것으로 파악됐다. 조사대상 14곳 중 공영방송 KBS 본사와 종편인 JTBC 두 곳만 정규직으로 아나운서를 뽑은 것으로 드러났다. 아나운서 업계 관계자는 “케이블, 인터넷 방송 등의 상황은 더 열악하다”고 설명했다.
일부 방송사는 ‘계약직으로 채용 후 정규직으로 전환 가능’이라고 명시하고 있지만 유명무실한 경우가 많다. 지역 지상파에서 아나운서로 일하는 김소리(28·가명)씨는 “프리랜서나 계약직은 2년이 넘으면 정규직으로 전환돼야하는데 2년이 지나면 그만두게 하고 대부분 새로운 아나운서를 뽑는다”며 “2년마다 다른 곳으로 옮기다 보니 지금이 네 번째 직장이다”라고 말했다.
아예 근로계약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한 케이블 방송 아나운서는 “연봉계약서를 안 쓰고 구두로 끝냈다. 다른 선배 아나운서도 다 그렇게 했다고 들었다”며 “PD에게 말했더니 그런 거 필요 없다는 답만 돌아왔다”고 전했다.
불안정한 고용상태와 불합리한 대우로 이직을 고민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한 지역 지상파 아나운서는 “쇼핑호스트나 기업 홍보실 등 다른 곳으로 이직을 준비하는 경우도 있다”고 털어놨다. 또 다른 한 지역 지상파 아나운서는 “회식 때 2차로 노래방에 갔는데 PD가 억지로 춤추고 노래하라고 강요했다”며 당시의 불쾌했던 감정을 드러냈다.
해법은 없는 것일까. 이민규 중앙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아나운서 모집에 수천 명의 지원자가 몰리는 이유는 아나운서라는 직업이 스타성과 결합해 더욱 과장됐기 때문이다”라며 “지원자가 넘쳐나는 이런 상황에서 굳이 정규직을 뽑을 이유가 없다”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이어 “아나운서를 꿈꾸는 사람들도 자기 스스로 직업에 대한 철학을 갖는 게 필요하다”라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아나운서 아카데미의 상업적 행위에 대해서도 쓴 소리를 이어갔다. 그는 “수많은 아나운서 학원들이 외모 가꾸기에만 열중한 나머지 철학과 윤리에 대한 교육은 등한시하고 있다”라며 “진정한 아나운서를 발굴하기 위한 교육이 강화돼야 한다”고 꼬집었다.
[인터뷰]“한치 앞도 안 보여‥내 삶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아”
-지상파 아나운서 지망생 인터뷰
차가운 바람이 살을 파고드는 2월 초순. 아현동의 한 짬뽕 전문 음식점에서 고새미(28·여)씨를 만났다. 현재 한 케이블 채널에서 근근이 프로그램 진행을 맡으며 생활하고 있다는 고씨의 꿈은 지상파 방송국 아나운서다. 굴짬뽕을 정말 좋아한다는 그녀의 웃음 뒤에 감춰진 속내를 들여다봤다.
-아나운서 준비는 언제부터 시작했나.
“졸업하기 전인 2011년부터 했으니 벌써 3년째다.”
-그동안 시험은 여러 군데 봤나.
“말하면 뭐하나. 케이블, 지방 가릴 거 없이 채용공고가 뜨면 어디든 달려갔다.”
-지상파 아나운서가 꿈이면 지상파만 지원하면 되지 않나.
“경쟁률이 수 천대 1이다. 나이도 있는데 아무 것도 안 하고 1년에 한두 번 뜰까 말까한 지상파 공채만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다. 어떻게든 경력이라도 쌓고 돈이라도 벌면서 준비하는 게 낫다.”
-경력을 쌓는 것이 지상파 아나운서 합격에 도움이 되나.
“그렇지는 않다. 지상파 방송국은 아나운서 채용과정에서 경력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실 아나운서 준비생들이 계속 경력을 쌓는 것은 한 곳에서 계약기간이 끝나거나 갑자기 일이 끊겼을 때 또 다른 일거리를 찾기 위함이다. 그래야 본래 목표였던 지상파 아나운서가 되기 위한 준비에 드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력은 어떻게 쌓나.
“일단 아나운서 준비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아카데미(아나운서 학원)에 등록부터 한다. 그 학원을 오래 다니거나 원장 직강과 같은 스페셜 강의를 들으면 학원에서 중소 케이블·지역 방송국이나 외주 담당 프로덕션에 추천을 해준다. 그런데 추천을 해준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다. 다른 학원에서도 추천한 지망생들이 있어서 추천된 지망생들끼리 또 경쟁을 해야 한다. 워낙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채용 관계자들이 주선하는 술자리에 잘 보이려고 억지로 나가는 애들도 있다.”
-학원비는 얼마 정도인가.
“내가 다닌 학원은 정규과정과 단기과정이 있는데 보통 정규과정은 처음 시작하는 준비생들한테 추천하는 과정이고 5개월(총40회)에 300만원정도다. 나는 학교 수업과 학원을 병행하는 게 힘들어서 방학 때 단기로 하는 10주짜리 코스를 들었는데 20회에 190만원이었다.”
-학원비가 부담스러울 것 같다.
“엄청난 부담이다. 추천을 받으려면 정규과정 외에도 수업을 더 들어야 해서 돈이 너무 많이 든다. 내가 벌어서 다 충당하지 못하는 건 부모님께 부탁을 한다. 부모님께 면목이 없다. 학원비 외에도 매번 면접이나 카메라테스트 때마다 헤어와 메이크업 비용만 10만원정도 든다.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아나운서 하려면 집 한 채 팔아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10년 뒤 본인의 모습이 어떨 것 같은가.
“10년 뒤? 나는 불과 한 달 뒤 내 모습도 그려지지가 않는다. 지금 맡고 있는 프로그램이 한 달 후면 끝나기 때문이다. 고용의 불안정성이 가장 큰 문제다. 주변에 아나운서 준비한다면서 그냥 학원만 다니는 준비생들은 거의 없을 거다. 사내방송이든 케이블이든 행사든 경력을 쌓고 계속 준비하는 데 드는 비용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부분 계약직이다. 솔직히 아나운서를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곳은 지상파 3사밖에 없다.”
10년 뒤 본인의 모습을 묻는 질문에서 고씨는 몇 번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요즘은 정말 내 삶이 뿌리에서부터 흔들리는 느낌이다. 이러다가 나이만 들고 계속 불안한 생활을 이어가야 하는 건 아닌지 막막하다.”
임철영 기자 cylim@asiae.co.kr
최동현 수습기자 nell@asiae.co.kr
김동표 수습기자 letmein@asiae.co.kr
박준용 수습기자 juneyong@asiae.co.kr
윤나영 수습기자 juneyon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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