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의 스토리텔링 - 퇴계의 사랑, 두향(23)
"요즘 세상에 부인처럼 정절을 지키려는 여인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필부필부라도 혼인하여 짝을 이루면 살아서는 예법으로 서로 따르고 죽어서는 제사로 뜻을 보여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법은 무너지고 풍속도 탁해져서 죽은 남편이 눈도 채 감기 전에 아내가 새 남편을 고르는 판이니 이런 세상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심지어 남편을 죽이고 딴 남자에게 시집가는 일도 있다 하니, 여자란 가히 요물이 아니오? 그 요물을 장부가 어찌 만나 혼인을 할 수 있겠습니까?"
"가만히 들어보니 총각의 말도 일리가 있는 얘기로군요. 그랬더니요?"
"과부는 정말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지닌 남자를 보고는 속이 시원했지요. '정말 그렇지요.' 크게 맞장구를 쳤습니다. 이렇게 말문을 튼 두 사람은 그날 저녁 내내 대화를 나누다가 마침내 잠자리를 같이하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모두 칼을 차고 누웠다 합니다."
"흐음." 공서가 미소를 띠며 가벼운 신음소리를 냈다.
"촛불을 켜놓았는데, 사내는 옷을 벗고 누워서는 바로 잠이 들었습니다. 사실은 잔 것이 아니라 깊이 잠든 채 코를 골았던 것이지요. 그사이에 여인이 자는 사내의 몸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문득 춘심(春心)이 동하여 총각에게로 다가갔습니다. 그때 총각은 크게 놀란 기색으로 벌떡 일어나 칼을 뽑아 들었지요. 그때 여인은 말했습니다. '지금껏 내 맹세가 철석같은 것은 틀림없지만 오늘 당신을 만나고 보니 생각이 달라졌어요. 하늘이 본성을 만들 때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인데, 굳이 그것을 억누르기만 하는 것이 어찌 하늘의 뜻이겠습니까. 당신도 외로운 사람이고 나도 외로운 사람이니, 둘 다 마음의 칼을 놓고 함께 사랑하는 것이 천리(天理)가 아닐까 합니다.'"
"아아." 공서와 두향이 함께 가벼운 탄성을 내질렀다.
"그 노총각, 결국 소원을 이뤘구려."
공서가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퇴계도 웃으며 말을 받았다.
두향이 아직도 그 이야기에 취한 듯 이렇게 말했다.
"예의범절을 헌신짝처럼 생각하는 세태도 어리석지만, 지나치게 허식에 얽매어 삶의 깊고 오묘한 의미를 놓치는 일도 못지않게 어리석은 게 아닌가 싶네요. 천하의 도학자 나으리께서 이토록 분방한 이야기를 꺼내실 줄 소녀는 정말 몰랐사옵니다."
"허허허. 그러하냐?"
퇴계가 웃었다.
그때 공서가 약간 짓궂은 표정이 되어서 말했다.
"두향아. 너는 낮퇴계 밤토계라는 말을 들어보았느냐?"
"안동의 토계(兎溪, 토끼계곡)를 사또 나으리께서 개칭을 하여 퇴계(退溪, 은둔의 계곡)라고 한 일은 들었사옵니다만, 거기 어찌 밤낮이 붙어서 서로 바뀌는지는 알 수 없사옵니다."
"핫핫. 낮에는 후학에게 가르침을 주시는데 아낌이 없는 분이니 '낮퇴계'이고, 밤에는 토끼처럼 성애(性愛)에도 거리낌이 없으니 '밤토계'로 돌아가느니라."
"어머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퇴계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공서의 말이 우스개이기는 하나, 옳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는 아까 저 과부가 말했듯이 본성을 외면하거나 억압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부부간에 지녀야 할 예절 중에도, 동침(同寢)의 예(禮)는 분방함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겠느냐?"
"아, 나으리의 하해와 같은 가르침에 늘 옷깃을 여밉니다."
그때 공서가 화제를 바꾸며 말했다.
"저 미인의 거문고 소리를 좀 듣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퇴계가 말했다. "두향의 음률은 참으로 뛰어난 바가 있습니다. 제가 저 거문고 소리를 듣고 금보가(琴譜歌)를 지은 것이 있습니다만. 두향아, 네가 그 시에 맞춰 곡을 붙여 보겠느냐."
"알겠사옵니다, 나으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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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칼 찬 과부 얘기 한번 해볼까요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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