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의 스토리텔링 - 퇴계의 사랑, 두향(21)
"채(寀)의 일은, 이 아비가 초래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올시다. 아이들에게 친모보다 더한 효성으로 삼년상을 치르라고 명하였는데, 그 말을 깊이 새기며 몇 날 며칠을 굶는 일도 허다하였던 모양입니다. 육식도 금하고 곡기조차 시원찮았으니 몸이 제대로 유지될 리 없었을 것입니다. 집안에 효자는 났으나, 목숨은 잃었으니 이런 어이없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글쎄 말입니다. 자제분들이 부친을 닮아 지극한 예(禮)를 갖췄으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러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공서는 남쪽으로 내려갔다 오셨는데, 혹여 거긴 납매(臘梅)가 보이더이까?"
"경주도 춥지는 않은 곳이나, 매화를 찾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물으시니 옛 매화시조 한 편이 생각나는구려."
그대 고향으로부터 오니 고향 일을 알리로다
오던 날 비단창에 한매(寒梅) 피었더냐 아니 피었더냐
피기는 피었다마는 임 그리워 하더이다
"허허. 얼마 전 꿈에, 둘째 아내(권씨)가 함께 돌아간 딸을 품에 안고 나타났더이다. 그 아이 이름을 지어달라기에 설(雪ㆍ흰 매화)이라고 지었는데, 아마도 공서가 읊는 이 시조를 들으려고 그랬나 봅니다."
"설이라. 참으로 아름다운 이름이외다. 사숙재(私淑齋ㆍ강희맹(1424-1483))가 '읊은 남쪽 가지 위에 차고 흰/설(雪)을 얻으니 이것이 매화정신이구나(南枝上寒白 得雪更精神)'의 경지를 꿈에서 얻었구려.
"그렇군요. 득설(得雪)과 실설(失雪)을 함께했으니, 그 또한 생각할수록 미안한 일입니다."
"어찌, 그것이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겠습니까. 사또는 모쪼록 기운을 되찾으시기 바랍니다."
그때 바깥에서 인기척이 난다.
"두향이더냐?"
"예. 그러하옵니다."
"어서 들어오너라."
술상과 함께 두향이 방으로 들어오자, 퇴계의 표정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 환해진다. 공서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있다.
"아니, 궁벽한 시골이라더니 어찌 이런 미색이 숨어있단 말입니까?"
"설중 매화처럼 저 홀로 자라난 아이로 알고 있습니다. 두향아. 인사 올리거라. 한양서 오신 공서어른이시니라. 나와는 막역한 지기(知己)로다."
두향은 절을 올렸다.
"벽지에서 가르침 없이 자라 모자라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많이 깨우쳐 주십시오."
공서는 말했다.
"그저 숨어 사는 적막한 선비일 뿐이네. 자네가 나를 잘 가르쳐주게나. 내가 여러 곳을 떠돌아다닌 바 있어서, 나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꽤나 알고 있네만…. 한번 들어보겠는가?"
"예. 공서어른."
"충청도에 한 선비가 있었는데, 가난하여 풀칠하기도 어려웠나 봅니다. 이웃의 한 상인이 장사를 해서 식구 여덟 명을 먹여 살리는 것을 보고, 그의 아내가 말을 했소. '이웃의 저 장사치도 제 식구를 먹여 살리거늘, 당신은 어찌하여 집안은 돌보지 않고 책만 읽으시는 겁니까. 내일은 시장에서 싼 것 비싼 것 가리지 말고 뭐든 사서 장사를 한번 해보세요.' 이렇게 권유를 했지요."
"그랬더니요?"
퇴계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선비가 그러마 하고는, 다음 날 일찍 시장에 갔습니다. 뭘 사야 할지 알 수가 없어 종일 돌아다니다가 저녁답에 옹기독 몇 개를 사왔지요. 독장사를 하러 가기 전에 아내는 선비에게 홑바지 하나를 주면서 말했습니다. '혹시 독을 팔아 곡식을 받게 되거든 바지를 벗어 아랫단에 묶고 그 안에 넣어 오세요.' 선비는 알았다고 하면서 독을 팔러 나갔지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사옵니까?" 두향도 궁금한 듯 물었다.
"선비는 대갓집 문앞에서 외쳤소. '독 사시오, 독 사시오, 독을 사시면 내가 바지를 벗을 것이오.' 그때 집 안에서 주인이 이 소리를 듣고는 작대기를 들고 나왔소. '독을 팔러왔는데 왜 바지를 벗겠다는 거냐? 아녀자를 욕보이려고 하는 수작이냐?'하면서 선비에게 작대기를 휘둘렀소. <계속>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