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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채(菜)의 여자가 정신줄을 놓고(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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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스토리텔링 - 퇴계의 사랑, 두향(20)

[千日野話]채(菜)의 여자가 정신줄을 놓고(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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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찬바람이 몹시 불면서 싸락눈이 날리던 날, 편지를 받았다. 안동에 있는 장남 준(雋)이 보낸 것이었다. 채(寀)가 죽었다고 한다. 어릴 때 의령의 외종조부(전처 허씨 가문) 집으로 입양을 간, 둘째 아들이다. 그 아이가 어떤 아이였던가. 첫째 부인 허씨가 스물일곱 살 되던 해(1527), 죽음으로 낳은 아이였다. 첫아이를 낳은 뒤 한참을 불임에 시달렸는데, 늦게야 어렵사리 아이를 가졌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그러나 산고(産苦)가 워낙 심했다. 몸을 푼 지 한 달 만에 아내가 눈을 감았다. 아이를 안고 오열하던 그날의 괴로운 악몽이 되살아난다. 그렇게 낳은 귀한 아이가, 몽달귀가 되었단 말인가. 원통하고 애통하다. 죽은 채의 나이는 스물둘. 막 결혼을 앞두고 있던 때였다. 혼처를 정한 뒤 아비에게 세세한 정황을 적은 편지를 보낸 것이 보름 전인데….

채가 죽은 것은 계모였던 권씨의 3년상을 치르느라 몸이 몸시 약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1546년 7월에 권씨를 상처(喪妻)한 뒤, 퇴계는 전처 허씨 소생의 두 아들에게 친어머니와 똑같이 상을 치르라고 명했다. 묘소 근처에 여막을 짓고, 예법에 따라 일체 고기를 먹지 않고 겨우겨우 끼니를 이어가며 준과 채는 꼬박 3년째 시묘살이를 하고 있었다. 퇴계 또한 아내 묘 근처에 작은 서재를 만들어 1년을 지냈는데, 조정에서 부르는 바람에 한양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퇴계가 떠난 뒤에도 아들들은 곡진한 슬픔을 간직하며 먹거리를 걸러가면서 여묘(廬墓)살이를 하였다. 3년상을 끝내는 해에, 혼담이 들어온 채는 급히외종조부집이 있는 의령으로 갔다가 거기서 숨을 거뒀다. 효를 다한 끝에 눈을 감았으니, 집안으로서는 갸륵하고 기특한 일이나, 아비의 마음이 찢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준의 편지에는 이런 말도 있었다. "채를 묻을 묏자리가 마땅하지 않은 데다 의령 땅에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쳐서 주검을 제대로 옮길 수도 없다 합니다. 일단 가매장을 하였다가 뒷날 옮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퇴계는 편지를 쥐고 몸을 떨었다. 한참 뒤 마음을 진정시킨 그는 붓을 들어, 준에게 아이의 장례에 관해 조목조목 설명을 써서 보냈다. 준의 편지에는 채와 정혼(定婚)을 한 규수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그녀가 밤마다 채의 옷을 붙잡고 울고 중얼거리는 기행(奇行)을 한다고 했다. 퇴계는, 실성했던 둘째 아내 권씨가 떠올라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는 준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규수의 폐백을 얼른 돌려보내기 바란다. 다행히 아직 혼인을 치르지 않았으니, 그 여인은 어엿한 처녀이다. 공연한 오해나 불편이 빚어지기 전에, 일을 잘 처리하여라. 여인이 마음을 돌려 시집을 갈 수 있도록 설득을 잘 하기 바란다."


퇴계가 헛헛한 마음으로 지내고 있을 때, 한양의 서소문에서 친하게 지냈던 벗 하나가 찾아왔다. 경주부윤으로 있는 양부(養父)를 찾아뵙고 귀경하는 길에 들른 공서(空嶼)였다. 그는 정치적 혼란기를 목도하고는 일찌감치 벼슬에 대한 꿈을 접었다. 젊은 시절엔 금강산과 오대산을 떠돌아다니며 천리를 방랑했고, 나이 들어서는 학문과 수양에만 전념하는 은일의 지식인이었다. 한양서 퇴계를 찾아와 시를 나눈 적이 있고, 주역에 대해서도 논의한 바가 있었다. 퇴계와 동갑내기였던 공서는 소탈하면서도 풍류가 있어, 해학이 가득한 대화 가운데서도 은은한 풍격이 느껴졌다.

두 사람은 객사 한쪽에 있는 익사(翼舍)에 마주 앉았다. 널찍하게 마루가 깔린 방으로, 중앙에 있는 정당(왕과 대궐을 상징하는 전패와 궐패를 봉안한 곳) 쪽으로 온돌방을 만들어 붙여놓았다. 퇴계는 술상을 보아오게 했다. 그리고 행수기생에게 일러 두향이 올 수 있는지 물어보라 하였다.


"얼굴이 몹시 수척해 보이시니, 제 마음이 다 무겁습니다."


"시골 관청이라 하여도 사람이 사는 곳인지라, 여러 가지 마음을 써야 할 곳이 많습니다. 더구나 이곳은 잦은 가뭄으로 고을 백성이 고통을 받고 있는지라, 백방으로 뛰어도 한숨 소리를 줄이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군요. 사또. 한적한 곳에서 몸과 마음을 쉬시고 계실 줄 알았더니, 그렇지도 못한가 보오. 게다가 아드님의 변고도 가히 하늘이 내려앉는 슬픔이니 어찌 심신이 평안할 수 있었겠습니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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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충청도가 아니다, 청홍도다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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