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사람이 마시는' 술과 '사람을 마시는' 술, 두 가지가 있다.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문어적으론 능동이냐 피동이냐로 나뉘고 행태적으론 눈이 풀리고 혀가 꼬이고 다리가 엿가락처럼 늘어지면서 급기야 웩웩거리느냐로 구분된다. 고백건대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학술적 근거는 없다. 그저 숱한 경험에서 터득한 체험적 이론일 뿐이다.
술이란 게 기뻐도 한잔, 화나도 한잔, 슬퍼도 한잔, 즐거워도 한잔이다. 그런 점에서 술은 희로애락(喜怒哀樂)을 증류해 만드는 것이다. 직장 생활에 지친 이들은 '월요일이니 한잔'으로 시작해 '금요일이니 한잔'으로 마무리한다. 그리 보면 술은 노동과 땀을 희석해 빚는지도 모른다. 술을 먹는 이유가 365가지도 넘어 1년 내내 술 마실 핑계가 즐비하다는 애주가들의 주장을 듣노라면, 인생과 삶을 발효하는 게 또한 술이기도 하다.
소싯적 말술을 자랑하던 이외수는 취하면 프랑스인처럼 춤을 추고, 독일인처럼 노래를 부르고, 영국인처럼 먹어대고, 이탈리아인처럼 자랑을 늘어놓고, 미국인처럼 연설에 열을 올리는 다국적 술버릇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꺼이꺼이 울기까지 했다고, 그는 '술'(1999년ㆍ보성출판사)에서 회고했다. 그런가 하면 피천득은 입에 술 한 잔 대지 못하면서 술 관련 책을 여러 권 사서 정독하는, 입이 아니라 마음으로 음미하는 애주가였다.
무당이 오구굿을 할 때 부르는 노래 가운데 '바리공주'가 있는데 여기에도 술이 등장한다. 생전에 나쁜 짓을 많이 저질러 지옥으로 가는 이유 가운데 '술에 물을 타서 파는 짓'은 네 번째에 속한다. 악덕지주, 불효자, 강간범 다음으로 죄질이 무거운 것이다. 그만큼 우리 조상은 술을 귀하게 여겼다는 뜻이다. 그런 각별함이 오늘날 '폭탄주' 문화를 꽃피워 미국으로, 유럽으로 수출하기에 이르렀다는, 역시나 학술적 근거가 전혀 없는 주장을 다시 한번 들먹인다.
지난해 우리 국민이 마신 술(알코올)은 1인당 8.9ℓ에 달한다. 소주(20도)로 치면 123.6병, 500㎖ 캔맥주(5도)는 356캔. 이를 환산하면 우리는 '술에 취한 나라'와 '술에 취해가는 나라' 사이의 어디쯤에 놓여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위치 설정에 전날 또다시 (후배들과) 기여했음을 숙취의 얼얼한 기분으로 이실직고한다. 술을 마시되, 술에 먹히지 않은 것을 다행스러워하면서. <후소(後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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