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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詩]조은의 '따뜻한 흙' 중에서

시계아이콘읽는 시간38초

잠시 앉았다 온 곳에서/씨앗들이 묻어 왔다//씨앗들이 내 몸으로 흐르는/물길을 알았는지 떨어지지 않는다/씨앗들이 물이 순환되는 곳에서 풍기는/흙내를 맡으며 발아되는지/잉태의 기억도 생산의 기억도 없는/내 몸이 낯설다//언젠가 내게도/뿌리내리고 싶은 곳이 있었다/(……)씨앗을 달고 그대로 살아보기로 한다


조은의 '따뜻한 흙' 중에서


■ 나는 시골에서 자라났지만, 농사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뒤늦게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꽃씨를 사서 흙에다 심어놓고 싹이 트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그 일이 마치 출산을 기다리는 심정과 닮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흙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했다. 씨앗이란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도 깨닫게 되었다. 생명의 기운이라고는 없는 단단한 것이, 오랫동안 죽은 듯이 고요히 때를 기다리다가 흙과 바람과 물과 햇살을 만나면 가만히 제 살을 열고 나오는 일. 이것이야말로 기적이 아닌가. 씨앗을 흙 속에 밀어넣을 때는, 과연 이것이 생명으로 응답할까 자신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김없이 흙을 밀고 돋아나오는 깨알같이 작고 푸른 것. 씨앗은 생명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알려주는 말 없는 웅변이다. 그 쬐그만 한 톨 속에서 기온을 재고 강수량을 재고 태양광 발전을 하는 어마어마한 컴퓨터가 다 들어있다. 눈도 코도 없지만 제 몸이 물가에 있는지 흙 속에 있는지 다 알아낸다. 시인은 자기 몸에 묻은 씨앗 몇 알을 보며, 몸 속에 흐르는 물길을 씨앗이 파악하고 붙어온 것을 알아챈다. 몸도 흙처럼 따뜻하니 거기 뿌리내리려고 하는 저 생명. 그런 생각을 하며 저 씨앗의 생의(生意)를 마음에 심는다.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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