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바타'에서 특히 흥미로운 대목 중의 하나는 영성(靈性)의 나비족을 이끄는 지도자가 늙고 지혜로운 여성이었다는 점이었다. 전무의 대작이며, 아마 당분간 전후의 대작일 이 영화는 일종의 '문명비판론'으로도 읽혔는데, 그것은 지구 문명에 대한 비판, 개발에 대한 반성, 그리고 남성 중심 문명에 대한 반성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에서 (지구의) 남성은 대체로 분쟁을 일으키는 이들로, 자연을 파괴하며 상대방을 굴복(결국은 절멸)시키려 하는 이들로 그려지는 반면, 이들의 폭력과 일방주의를 막고 조화와 균형을 잡는 것은 여성의 몫으로 그려졌다.
전쟁 대 평화, 파괴 대 보존은 그래서 남성 대 여성의 갈등구도로 나타났으며, 이 영화의 감동은 결국 무력은 없으나 사랑과 선량한 마음과 자연을 이해하는 심성을 가진 이들이 무력과 폭력을 이긴다는 것이었다. 지구는 선진적 문명인 듯 보이지만 실은 후진적이었듯이, 남성은 권력을 가졌고 우월적인 위치에 있는 듯하지만 실은 열등하며 야만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여성은 천성적으로 타자를, 모든 생명을 포용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아끼는 존재다. 그 점에 여성의 신비로운 점, 여성의 본질적 우월성이 있다. '여성의 신비'라는 말은 있어도 '남성의 신비'라는 말은 없듯이 아기를 낳든 낳지 않든, 어른이건 어린이건 여성의 몸은 그 자체가 우주와 자연의 구현이다.
'여성의 날'을 하루 앞두고 '세상의 절반'에 대해 생각해본다. 마오 쩌둥은 여성을 억압하는 굴레가 없어져야 중국의 발전이 가능하다고 본 현실적인 전략에서 여성을 세상의 절반이라고 했지만 여성을 '절반'이라고 하는 산술적인 기준으로 보는 것은 분명히 한편 진보지만 절반의 진보다. 우리 사회가 여성의 사회적 진출과 지위의 신장에 대해 내놓는 많은 평가들은 이 점에 머물러 있다. 게다가 그조차도 외형적인 신장을 보여주는 몇 가지 지표를 놓고 '여성 우위'니 '고개 숙인 남성'이니 하는 비명을 지른다. 그러나 일부 부문에서 여성의 지위 향상의 수치가 감추고 있는, 혹은 더욱 선명히 드러내고 있는 이면을 살펴본다면 그것이 얼마나 몰현실적이며 표피적인 강변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여성에 대한 할당, 여성에 대한 배려는 결국 우리 사회가 '할당'이 필요한 상황, '배려'를 얘기해야 하는 실정임을 보여준다. 게다가 '군 가산점' 논의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천박하고 무리한 주장도 버젓이 나돌고 있다.
마침 올해는 베티 프리단이 가정을 '안락한 포로수용소'라 비판하며 '여성의 신비'를 펴낸 지 50주년을 맞는 해다. 프리단이 이 책에서 얘기하는 것과는 별개로 나는 '여성의 신비'에 대한 최고의 예찬을 '파우스트'의 마지막 말에서 발견한다.
파우스트가 오랜 방황을 끝내고 선한 영혼으로 거듭날 때 신비의 합창은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리도다'고 노래한다. 괴테가 60년에 걸쳐 완성한 이 인류의 걸작에서 여든을 넘긴 괴테가 발견한 진리가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
괴테가 주역을 봤을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이 말은 '주역(周易)'에서 태평성대를 뜻하는 태괘(泰卦)가 뜻하는 것과도 상통하는 면이 있다. 땅(곤괘ㆍ坤卦)이 위에 있고, 하늘(건괘ㆍ乾卦)이 아래에 있는 태괘는 남자의 기운이 하강하고 여자의 기운이 상승해 음양 교류가 돼야 세상이 조화롭게 운행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결코 빠지지 말아야 할 함정이 있다. 괴테는 여성이 아닌 '여성적인'이라고 했으며, 태괘의 곤은 반드시 생물학적인 여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생물학적인 여성이라고 해서 진정한 의미의 여성적인 건 아니다. 여성이면서 오히려 그 인식과 실천에서 실은 반(反)여성적, 비(非)여성적일 수도 있다. 여성의 이름으로 여성성을 오히려 배제하고 억압하는 것은 남성에 의한 그것보다 더욱 경계해야 할 일이다. 바로 이 점이야말로 올해 여성의 날에 특히 진지하게 물어야 할 문제다.
이명재 사회문화부장 pro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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