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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1장 동묘(東廟) 부근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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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1장 동묘(東廟) 부근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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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오늘 무슨 바람이 불어 날 불러냈나? 설마 망명정부 국정원장 시켜줄려고 부른 것은 아닐테구....”
동철의 열변이 망명정부에서 시작하여, 동네 목욕탕 영감을 거쳐, 마침내 면암 최익현 선생까지 한 바퀴 돌고나서 조금 시들해졌을 무렵, 하림은 그제껏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궁금증을 참지 못해 슬며시 운을 뗐다.
“아, 참! 미안. 미안. ”
동철은 그제야 생각이 난 듯 손 사레를 치며 말했다.
“내가 혼자 열을 올리느라구 본론을 까먹고 있었네, 그랴. 사실은 하림이, 오늘 널 부른 건 저기 윤여사께서 누굴 소개 좀 시켜 달래서 부른 거야. ”
“윤여사가.....?”
하림은 뜻밖이라는 듯이 윤여사 쪽을 쳐다보았다.
“응. 내가 널 추천했어.”
“그래....?”
하림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분위기로 봐서는 처음에 상상하고 기대했던 것처럼 둘이서 한번 사귀어보라고 하는 건 아닌 게 분명했는데, 그렇다고 오늘 처음 본 윤여사가 자기에게 부탁할 일이란 게 도무지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요. 내가 좋은 사람 하나 소개해달라고 했어요.”
하림의 궁금해 하는 마음을 헤아렸는지 이번에는 윤여사가 직접 말했다. 조금 전까지의 호호거리던 모습과는 달리 자못 진지해진 표정이었다.
“그리고 오늘 하림 시인을 보니 어쩐지 딱 맞을 것 같은 사람이란 느낌이 들었어요.”
윤여사는 오동통한 입술을 놀리며 말했다.
하림은 짐짓 외면을 하며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마침 학원을 그만 두셨다니 시간이 좀 날 것 같은데, 잘 됐네요. 저희 고향에 잠시 내려가 주시면 어떨까 해서요.”
“윤여사 고향에.....?”
무슨 뚱딴지같은 말인가.
무슨 이야기건 두서가 있고, 선후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두서가 있고, 선후가 있어야 이해가 가는 법이다. 그런데 갑자기 윤여사 고향이라니....?
하림은 골든벨 마지막 라운드에 올라간 학생처럼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런 하림의 속을 들여다보듯 이번에는 동철이 거들고 나왔다.
“갑자기 들으면 좀 얼떨떨할 거야. 하지만 알고 보면 별 어려운 내용은 아니야. 네가 놀고 있단 이야기를 듣고 이왕이면 글도 쓸 겸, 윤여사의 고향에 있는 윤여사 작업실에 가서 한동안 푹 쉬고 오라는 이야기지. 사실은 저 윤여사께서 학창시절엔 그림을 그렸거든. 서양화 말이야.”
동철은 자기가 마치 윤여사의 매니저라도 되는 듯이 말했다.
하는 놈은 어려운 내용이 아니라고 했지만, 듣는 놈은 어려웠다. 자기 생각해서 푹 쉬고 오라는 이야기 같으면 이렇게 일부러 불러내어 말할 거리도 아니지 않는가. 하여간 그래도 윤여사가 학창시절에 서양화를 전공했다는 사실 하나 만은 새로 안 셈이었다. 어쩐지 튀는 차림새나 튀는 모양새가 보통 아니라고 했더니....
그러나 지금 말을 꺼내기 시작하는 그녀는 처음 본 모습과는 달리 차갑고 날카로운 인상을 주었다. 여자란 얼마나 다양한 표정을 지닌 동물인가. 하림은 자기도 모르게 긴장이 되어 앞에 놓인 술잔을 끌어당겼다.
“이야기하자면 좀 긴 이야긴데..... 사실은 제 고향에서 얼마 전 끔찍한 일이 하나 벌어졌어요.”
윤여사가 다시 말을 이었다.
하림은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귀를 세웠다.




글 김영현/그림 박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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