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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1장 동묘(東廟) 부근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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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1장 동묘(東廟) 부근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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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두 사람의 ‘여러분’ 앞에서 동철의 열변은 이어졌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할아버진 그때까지 남아있던 시골의 가난한 유학 부스러기였어. 어두컴컴한 작은 사랑방 아랫목에 꾀죄죄한 마고자 차림 한복을 입고, 긴 장죽 담뱃대를 물고 앉아 기침을 쿨럭쿨럭 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 나. 그런데 그 늙은 할아버지의 모습에선 범할 수 없는 어떤 기운 같은 게 느껴졌지. 양반은 얼어 죽어도 곁불은 쬐지 않는다는 그런 위엄 같은 것 말이야. 우리 할아버지가 가장 존경하고 마음에 두고 있었던 사람은 한말에 을사오적을 처형할 것을 주장하고, 일본에 저항하여 의병 운동을 일으켰던 면암 최익현 선생이란 분이었어. 면암 선생은 결국 대마도로 끌려가 거기서 단식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우리 할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선비는 오로지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었어. 면암 선생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민중 운동의 중심에 섰던 동학농민전쟁의 농민군들을 비적이라고 비판하고, 끝내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그 자신 역시 유학자 선비로서의 자기 역할을 다했던 거지. 지금 말로 하자면 그 분이야말로 진정한 보수였던 셈이야. 위엄과 예의, 너그러움과 절개를 다 갖추었던..... 목욕탕의 그 영감들이랑은 달라!”


동철이 열변을 토하는 동안 그새 손님들이 빠져나가 홀 여기저기가 비어 있었다.
저쪽 탁자에 늙수룩한 한패와 젊은 한 패가 술을 마시며 떠들고 있었고, 구석엔 허름한 차림의 늙은 사내가 혼자 깍두기 한 접시만 앞에 놓고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사내는 취했는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숙인 사내의 이마 위로 하얀 실타래 같은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흘러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하림은 개똥철학자 동철의 오랜만의 열변에 한편 취하면서도 동철이 언제 본론을 꺼내나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하긴 본론이 아니더라도 동철의 연설은 가슴을 한편 시원하게 해주는 구석이 없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너나 할 것 없이 심경이 똥 누고 뒤 안 닦은 것처럼 불편하던 터였다.


“그 영감들도 할 말이 있겠지. 보릿고개 넘어 새마을 운동, 조국 근대화, 총화단결의 최전선으로 달려와 여기까지 온 자부심도 있을테고.... 하지만 그 반대편에 깊게 드리워진 그늘들, 여러분, 국민교육헌장이라고 아나?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띄고 이 땅에 태어났다, 나라의 발전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하는 식으로 시작하는 그 국민교육헌장 말이야.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그 교육헌장을 외우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고, 저녁 여섯시면 길거리에서도 차렷자세로 서서 국기 하강식을 하고, 고등학교와 대학에선 목총을 들고 교련교육을 받고, 영화가 시작하긴 전엔 모두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애국가를 들으며 자랐던 그들. 통행금지에 쫒겨 12시엔 길거리가 계엄령이 떨어진 것처럼 텅텅 비고, 군대로 갔다가, 제대하면 다시 예비군이 되었다가, 예비군에서 민방위로, 일평생 군대식 교육을 받으며 오로지 국가와 한 사람에 대한 충성심, 그리고 북적(北敵)에 대한 증오심으로 길들여진 그들 말이야. 그게 우리 아저씨들이고, 우리 아버지들이야. 그게 툭, 하고 건드리면 터질 것만 같은 그들 분노의 정체야. 인간적 자존심과 존경심을 잃어버린, 애국심으로 위장된 분노 말이야. 그게 각하께서 한강의 기적과 함께 우리들에겐 남겨준 위대한 유산이지.”
망명정부 수반답지 않게 ‘여러분’ 앞에서 동철은 비분강개하고 있었다.
아니, 망명정부 수반이니까, 그런 정도의 비분강개를 토할 수 있는지도 몰랐다.






글 김영현/그림 박건웅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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