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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1장 동묘(東廟) 부근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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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1장 동묘(東廟) 부근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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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께 동네 목욕탕엘 갔는데 말이야.”
윤여사의 웃음 끝에 세똥철이 말했다.
“영감들이 탕 속에 목을 잠그고 목욕을 하고 있더란 말이야. 나도 그 속에 끼어 목욕을 하고 있었지. 토요일이라 제법 복잡했어. 그런데 목을 잠그고 앉아있던 영감 중의 하나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며 벼락같이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닌감.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이야. 모두들 깜짝 놀라서 영감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지. 영감의 손가락 끝 연장선 쪽을 보니 샤워기 아래 어떤 젊은 친구가 서있었는데, 그는 이제 마악 샴푸 통을 들고 손바닥에 그것을 짜려고 하던 참이었어. 뭐라 뭐라 욕을 해대며 일어난 영감은 물을 뚝뚝 흘리면서 금세라도 한 대 후려칠 듯한 기세로 그쪽을 향해 달려가더니 젊은 친구의 손에서 샴푸 통을 확 낚아채 버리더라구. 그때 영감이 내뱉은 욕을 나도 분명히 기억해. 아니, 목욕탕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똑똑히 들었어.. 나지막하고 증오에 찬 목소리로, ‘도둑놈!’ 하는 소리를 말이야. 그때까지 영문을 모르는 양 서있는 불쌍한 젊은 친구를 향해 던졌던 비수 같은 한 마디 말이었어. 알고 보니 그 젊은 친구는 거기에 있는 영감의 삼푸를 원래 목욕탕에 비치되어 있던 걸루 착각을 했던 모양이었어. 탕에 목을 잠근 영감이 누가 자기 걸 함부로 건드리나 하고 매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줄도 모르고 말이야. 어쨌든 그걸루 끝난 게 다행이라는 양 영감은 다시 탕으로 돌아왔고, 자존심이 형편없이 구겨져 얼굴이 하얗게 된 불쌍한 젊은 친구는 한두 번 물을 끼얹고는 나가버렸지.”
동철은 마치 그 광경을 지금 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그때 탕 안에는 영감과 나 외에도 대여섯 명이 목을 잠그고 있었지만,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다들 모르는 척 눈을 감고 있거나,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지. 물에 둥둥 떠 있는 그때 그 형상들.... 나는 그 형상들을 보며 언젠가 앙코르와트에 갔다가 본 화난 늙은 원숭이들의 부조들을 보는 기분이었어. 툭, 하고 건드리면 터질 것만 같은 현철의 봉선화 연정이 아니라, 툭하고 건드리면 불칼같이 화가 터져 나올 것만 같은 늙은 원숭이들의 얼굴들. 독선과 아집으로 단단히 무장되어, 날 건드리기만 하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결의로 다져져 있는 듯한 얼굴들. 보릿고개를 넘어 바야흐로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을 이루어냈다는 터무니없는 자만심으로 가득 찬 얼굴들. 가난한 나라 여행길에 올라선 함부로 그들을 업수이 여기고 제 안방처럼 떠들고 휘젓고 다니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얼굴들이 지금 내 앞의 김이 무럭무럭 나는 물 위에 수박처럼 둥둥 떠 있는 것이었어. 그리고 그 속에 내 얼굴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섞여 있는 거야. 언젠가 상해 임시정부 청사 유리창에 비쳤던 바로 그 내 얼굴이 말이야. 한없이 비굴하고, 야비하고, 뻔뻔스런 내 얼굴이.....”
동철의 얼굴론이 계속되었다.
“이젠 우리 사회는 아무도 더 이상 서로 존경하지 않아. 존경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걸 서로가 너무 잘 알기 때문이야. 벤츠, 에쿠스 타고 다닌다고 존경하나? 다들 속으로 그러지. 저 속에 든 자식은 부동산 투기해 돈을 벌었거나, 아니면 재벌 2세거나, 아니면 강남에서 몸을 파는 여자일거라고.... 반대로 마티즈 끌고나오면 저 인간, 지지리도 못난 놈이거나 남의 덕에 살려고 하는 놈일 거라고 생각하지. 여러분도 내 말이 틀렸다면 지금 당장 차를 몰고 오 분 간만 서울 거리를 다녀 봐. 오 분간만 차를 몰고 나가도 세 번 이상은 자기도 모르게 욕을 내뱉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테니까. 요컨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서로에 대한 쥐꼬리만 한 존경심도 없는 사회야. 쥐꼬리만큼도.....”
여러분이라 해봐야 윤여사와 하림이 자기 밖에 없었다.
그 두 여러분을 앞에 두고 지금 동철은 열변을 토하고 있었던 것이다.




글 김영현/그림 박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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