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메신저]슬픈 역사, 덕혜옹주의 옷](https://cphoto.asiae.co.kr/listimglink/1/2012101014255041505_1.jpg)
[송명견 동덕여대 명예교수]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덕혜옹주는 고종이 61살에 얻은 늦둥이 고명딸이다. 고종은 왕실의 법도를 무시하고 왕의 처소인 덕수궁 함녕전에 아기를 직접 재우기도 했고, 덕혜를 위해 덕수궁 안에 유치원도 개설했다. 나라를 잃고 시름에 잠겨 있던 고종에게 큰 위로와 기쁨이 되었을 것이다. 백성들도 덕혜의 탄생과 성장을 뿌듯하게 바라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덕혜옹주는 하얀 얼굴에 초롱초롱한 눈망울, 훤칠한 이마로 매우 아름다웠다. 동시를 지어 고종을 더욱 기쁘게 할 만큼 영특하기도 했다.
박물관 전시실에서 만난 덕혜옹주의 옷과 장신구들은 나라를 빼앗긴 채 살다 간 '비운의 황녀'의 일생을 아리게 전해주고 있다. 돌배기 아기 적에 입었던 앙증맞은 초록 당의(唐衣)에는 덕혜의 콧물이 더럽혔을 것 같은 얼룩까지 보였다.
당의와 붉은색 스란치마(화문과 길상어문을 금박한 단을 한 단 덧댄 치마)는 왕실 아기 공주나 옹주의 것으로는 유일한 소례복(명절·탄신일 등 작은 의식 때 입는 옷이나 평상시에도 입었다)이라는 가치를 지닌다. 금사로 섬세하게 수놓은 오조원룡보(다섯 개의 발톱이 달린 용무늬가 수놓아진 원형의 장식으로 왕족만 사용)가 붙어 있는 초록 당의와 남색 대란치마(스란단을 두 개 붙인 치마) 역시 유년기와 소녀기의 왕실 소례복이었다.
문헌을 통해서만 볼 수 있었던 어린이용 단속곳(치마 아래 입던 속옷)도 복식사적 가치가 높은 유물이다. 이와 함께 명절이면 때때옷이라고 해 입혔던 색동저고리와 까치두루마기, 그리고 풍차바지(대소변 가리기 전에 입혔던 밑이 터진 바지)와 돌띠저고리(옷고름을 길게 하여 옷이 벌어지지 않도록 몸통을 둘러 묶는 저고리)도 여염집의 어린아이들과 다름없이 입혔음을 증명하기에 충분했다. 모두 왕실의 섬세한 바느질 솜씨가 돋보이는 귀중한 유물들이다.
다 알다시피 주권 잃은 나라의 왕실에서 태어나, 열네살 때 일본으로 강제유학을 떠나야 했고, 독살의 공포와 외로움 속에서 정신분열증 환자가 된 상태로 일본인과 정략결혼까지 할 수밖에 없었던 게 덕혜옹주였다.
딸을 출산하고 병이 악화되어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 그녀는 일방적인 이혼 통보를 받는다. 이혼 후 딸이 실종되는 아픔도 겪었다. 1962년 고국으로 돌아왔으나 공항에 마중 나온 어렸을 적 유모도 알아보지 못하는 삶을 살다 78세를 일기로 1989년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지금 전시되고 있는 덕혜옹주의 유물들은 일본의 문화학원과 규슈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것들을 국립고궁박물관이 잠시 빌려다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중이다. 덕혜옹주 유년기와 소녀시절의 저고리, 치마, 두루마기, 버선, 두루주머니 등도 한스러운 듯, 수줍은 듯, 원망스러운 듯 진열되어 있다. 이 옷들은 왜 일본에 있어야 했나. 귀중한 사료들이 완벽하게 보존되었다는 '안도감'은 잠시뿐, 나라를 잃은 쓰라림과 부끄러움과 분노가 교차되는 대목이다.
옷은 역사다. 박물관에서 뒤늦게 만난 덕혜옹주의 유물들은 그것을 배우고 깨우치라고 소리친다.
송명견 동덕여대 명예교수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