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재범 기자]배우들을 보자. 출연작과 실제 모습이 결코 똑같을 수는 없다. 물론 자신의 성격과 비슷한 모습의 캐릭터를 만나 물 만난 고기처럼 출연작에서 마음껏 펄떡이는 배우들도 있다. 평소 단아하고 참한 모습이 호감을 느끼게 하는 배우 한효주는 앞선 두 가지 설명에서 모두 빚나가는 경우다. 기품 있는 중전이나 아니면 애절한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을 연상케 하는 얼굴을 갖고 있다. 정적인 연기를 주로 선보인 그이기에 활동력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번 영화만큼은 작정하고 달려든 것 같다. 앞선 두 가지 설명을 보기 좋게 깨트린다. 영화 ‘반창꼬’에서다.
5일 함박눈이 쏟아지는 날 시내 한 카페에서 만났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병아리들을 연상케 하는 노란 스웨터를 입고 왔다. ‘반창꼬’의 병아리 얘기를 꺼내자 이 배우 갑자기 속사포 같은 촬영 뒷담화를 전한다. 우선 영화를 보면 도로변에 쏟아진 수천마리의 병아리를 치우는 장면이 등장한다.
한효주는 “그 장면 찍을때 정말 더운 날이었다”면서 “아스팔트가 녹을 정도로 엄청났다. 그래서 병아리들을 죽지는 않을까 정말 걱정됐다”며 눈이 동그라진 채 촬영 당시 상황을 설명한다. 너무 많은 병아리들이 쏟아져서 현장은 일순간 아수라장이 됐다고. 때문에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밟히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했단다.
그는 “(고)수 오빠부터 스태프들한테 ‘밟으면 죽어!!!’를 외치며 병아리 사수 작전을 홀로 외롭게 펼쳤다. 너무 예쁜 고것들이 혹시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나”면서 “아마 몇 마리는 하늘나라로 갔을 것이다. 불쌍하다”며 이내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이 배우가 이렇게 수다스러웠나 깜짝 놀랐다. 언제나 작품 속에서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비련의 여주인공 단골이었던 한효주의 모습은 없었다. 사실 실제 모습은 왈가닥에 가까웠다. ‘반창꼬’ 속 그가 맡은 ‘고미수’처럼 말이다. 그래서인지 맞춤형 캐릭터인 듯 한효주에게 딱 들어 맞았다.
한효주는 “미수 같은 그런 적극성은 솔직히 내겐 많이 부족한 부분이다. 남자에게 먼저 적극적으로 대시하지도 못하고”라면서 “다만 정말 즐거운 촬영이었다. 일종의 대리만족이랄까. 평소의 내 모습과는 정말 다른 인생을 경험했다. 오히려 부담감도 없었다. 진짜 자유로웠다”며 웃는다.
그의 말대로 ‘반창꼬’ 속 한효주는 정말 원없이 활개를 쳤다. 강일(고수)에게 적극적으로 대시를 하며 사랑을 쟁취하는 적극성, 때론 걸죽한 욕까지 시원하게 내뱉으며 감춰진 욕구를 터트렸다. 남자들과의 ‘드잡이’ 액션에선 과감한 폭력도 서슴치 않는다. 우리가 알고 있던 한효주의 모습은 온대간대 없다.
그는 “매번 출연작에선 그 역에 많이 빠져드려 노력한다. 그래서 각각의 작품 속 내 모습이 실제 내 모습이라고 보면 된다”면서 “이번엔 미수의 적극성과 내 안에 있는 적극성을 많이 일치시키려 노력했다. 아마도 내가 출연했던 작품들 가운데 가장 활동적인 여성이다. 고집도 쎄고”라며 파안대소 했다.
이런 모든 부분이 한효주와 감독의 토론으로 정립됐단다. 당초 시나리오 상에서의 미수 캐릭터는 영화의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고. 한효주의 입을 빌리자면 “훨씬 더 싸가지 없고, 이기적인 캐릭터”였다며 “한 마디로 상식 밖의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전했다.
그는 “실제 이런 대사들이 있다. ‘아프리카 굶어 죽는 어린이들을 보면 어때’란 친구의 질문에 ‘더러워’란 것 등”이라며 “상식 선에서 대중들이 받아들이기에 힘든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좀 더 포장을 해서 지금의 미수가 나왔다”고 설명했다.
영화 속 미수를 보자면 ‘솔직함의 아이콘’이라고 불러도 손색없다. 그래서일까. 노출도 꽤 눈에 띈다. 극중 강일의 마음을 얻기 위해 벌이는 투신 소동이라던지, 강일과의 키스신과 베드신(진짜 베드에만 누워 있는)에선 꽤 섹시한 한효주를 볼 수 있다. 다만 숨은 트릭이 몇 가지 있다고.
한효주는 “팬티가 노출되는 장면은 솔직히 말하면 내가 아니다”면서 “난간에 매달린 채 두 대사와 팬티 노출 두 장면을 한꺼번에 찍을 수가 없었다. 결국 대역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수줍게 웃었다. 다만 키스신과 베드신은 한효주의 색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키스신은 정말 공을 많이 들인 부분이다. 잘 보면 아주 느닷없이 한다. 쌩뚱맞은 리얼함이랄까. 시간도 꽤 길고”라며 “그런 부분에서 관객들이 느낄 수 있는 미수와 강일의 사랑을 공감해 주길 바란다”고 전했다. 베드신에 대해선 “나도 좀 섹시한 면이 있지 않나”라며 다시 크게 웃었다.
음주 장면도 여느 멜로 영화와 달리 상당히 자주 등장한다. 모두 실제 술을 먹으며 찍은 것이라고. 특히 영화 속 고수의 벌건 얼굴은 정말 술이 취한 모습이란다. 한효주는 “수 오빠가 진짜 술 한 잔만 먹어도 얼굴이 홍당무가 된다. 근데 나는 반대로 허옇게 변한다”며 샐쭉한 표정을 짓는다.
쏟아지는 눈을 보며 시크해진다는 한효주. 고수보다 먼저 ‘반창꼬’에 합류했다. 연출을 맡은 정기훈 감독과의 인연이 신기했다.
한효주는 “데뷔 초기 디지털 카메라 CF를 찍은 적이 있다. 그때 콘셉트가 못추는 춤을 진짜 열심히 추는 것이었다”면서 “그 장면을 감독님이 기억하고 출연 제의를 해주셨다. 정말 열심히 할 것 같았다고 하면서”라며 다시 웃었다.
‘뭐든지 열심히’가 배우로서의 콘셉트인 듯 한효주는 인터뷰에서도 적극적이었다. 다만 한 가지 배우를 그만 둘 때까지 하지 못할 것이 있단다. 다시 말하면 절대 한효주가 출연안 할 작품을 뜻한다. 바로 ‘공포영화’다.
그는 “젤 무서운게 귀신이다. 깜짝 깜짝 놀라는 거. 연기지만 그건 진짜 못하겠다. 대신 다른 건 정말 다 잘할 수 있다. 맡겨만 주면 진짜 잘할 수 있다”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영화 ‘반창꼬’의 왈가닥 고미수, 한동안 한효주와 고미수의 매력이 남성팬들의 가슴을 울릴 듯하다. 함박눈이 쏟아지는 카페 밖 풍경. ‘미수앓이’와 함박눈, 그럴듯하게 어울리는 것 같다.
김재범 기자 cine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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