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채명석 기자] “인플레이션이라는 건 돈에 물을 타는 것과 같습니다. 물을 많이 타면 탈수록 양은 늘어나지만 그만큼 묽어지고, 가치가 떨어지게 됩니다.”
1983년 10월 9일 당시 북한이 벌인 미얀마 아웅산 묘소 폭탄테러에서 순직한 고 김재익 경제수석비서관은 생전 “인플레이션이 뭐냐?”는 노모의 질문에 이렇게 설명을 했다고 합니다.
공부 깨나 한 사람이 이론이나 지식을 설명할 때, 대부분은 원래 그래서든지 일부러든지 복잡한 용어와 전문가들이나 알 수 있는 용어를 써서 자신의 유식함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전문가는 고 김 수석처럼 누구라도 쉽고 이해가도록 지식을 전달하는 ‘잘 말하는 사람’입니다. 경제 분야에도 이런 전문가들이 많았으면 하는데, 현장에는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증권업계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이들이 발표하는 보고서나 자료를 보면 도대체 이게 한글 문장인지 영어 문장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들도 눈에 쉽게 안들어오는데 나이 드신 분들이 과연 100% 이해할 수 있을까요.
금융감독원이 ‘쉬운 펀드 투자설명서 작성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8월 1일부터 시행하겠다고 합니다. ‘투자자가 누구인지 고려하라’, ‘쉬운 용어로 설명하라’, ‘읽기 쉽게 작성하라’ 등이 주요 내용입니다. 외국어 대신 한글로 쓰고, 문장도 쉽게 다듬고, 편집도 눈에 확들어오게 기술의 묘를 발휘하라는 것입니다.
‘사장에게 올리는 보고서처럼 성의를 다하라’는 문항이 특히 눈에 띕니다. “사장에게는 없는 정성까지 들여 쉽게, 정확하게 만든 보고서를 제출하면서 회사를 먹여 살리는 고객에게는 도무지 이해가 안가는 무성의한 보고서만 만든다”는 것이죠.
국내에는 62개의 증권사가 있습니다. 이들은 고객을 끌어 모으기 위해 업계 최고 수익률 홍보는 기본이요, 거래수수료 인하, 맞춤형 자산관리 등 차별화라는 명분하에 갖가지 서비스를 내놓습니다. 그러면 뭐하겠습니까. 사전이 없으면 뜻도 알 수 없는 외국어로 나열된 증권사의 투자설명서는 첫 장부터 고객의 얼굴을 찌푸리게 만드는데요. 얼마나 고객의 목소리에 귀를 안 열었으면 금융당국이 가이드라인까지 지정해줘서 따라오라고 할 정도가 됐을까요.
한 언론사가 지난해 10월 한글창제 565돌을 맞아 삼성증권, 대우증권 등 11개 증권사 연구원 55명을 상대로 외국어 사용에 관한 견해를 물었더니 40명이 ‘문제가 없기 때문에’, ‘업계 관행 때문에’ 한글 대신 외국어를 계속 사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합니다. ‘한글을 사용하면 전문성이 부족해 보여서’라는 응답자도 3명이었다고 하네요.
최근 주식 거래량과 거래금액이 줄면서 증권사가 비상경영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사장님에게 들이는 정성의 반만 고객에게 들였다면 아무리 경제상황이 악화됐다고 해도 고객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렇게 주식시장을 급격히 떠나는 일은 없었을 것 같습니다.
채명석 기자 oric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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