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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업성장史]⑮조선-일본, 어획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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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업성장史]⑮조선-일본, 어획 전쟁 1936년 속초항 풍경<자료:설악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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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조선-일본, 어획 전쟁
1조원대 정어리 황금어장 동해
"배만 띄우면 만선" 꼬리 문 소문
38세 거장 설향동도 겨울바다로
일본, 조선서 魚油 공급 위해
경남에 일본식 어장 개발
50t 동력선에 비행기까지 동원
조선 부자들도 건착망 구입해 동참
근대 어업기법 도입했지만
물반 고기반 어장은 결국 황폐화

일제 강점기 일본이 조선 어업을 무참히 침략해 들어왔던 것은 풍부한 어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좀 더 얘기하자면 무엇보다 고급 어류가 많아서였다. 이미 무차별 남획으로 거의 씨가 말라버린 일본 연안에 비해 조선의 어장에는 전복, 해삼, 붕장어, 갯장어, 가자미, 상어지느러미, 도미, 방어, 삼치, 고등어, 정어리, 명태 등이 풍부했다. 이런 어류들은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고급 어종으로 판로도 언제든지 가능했다.

조선 어민들 또한 가만있지 않았다. 일본 어민들이 상륙하려 하면 돌을 던지고 어획물을 빼앗으려 들었다. 일본 어민들은 식수를 얻으려 했지만 좀처럼 상륙할 수 없었다. 때문에 일본 어민들은 당시만 해도 조선에선 매우 희귀한 성냥 양초 사탕과 같은 개화 물건을 주며 환심을 사려 애썼다.


하지만 소꿉장난 같은 이런 줄다리기도 한때였다. 마침내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일본 어민들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조선 어업을 무람없이 침투할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먼저 중요 지점마다 어항 시설을 갖추고 어장 개발을 주도하는 한편 조선 어민들에게는 어업조합 가입을 의무화시켰다. 그런 다음 그들이 보호하거나 장려하는 어업 종사자에게는 저리로 자금을 빌려주는 당근을 들고 나왔다. 이런 어업 정책으로 말미암아 조선 어민들은 대부분 일본 시장에 편입돼 일본으로 이출하는 어업에 대부분 종사케 됐다. 조선 어장은 전라남도 김 양식업, 함경도와 강원도 정어리어업, 함경도 명태어업, 경상남도와 전라남도는 붕장어와 갯장어어업 등 한 지역에서 한두 가지 어종으로 특화시켜 나갔다.


그 결과 조선 어업이 크게 바뀌게 됐다. 우선 수산물 증가가 눈에 띄게 증가했을 뿐더러, 조선의 어업 지도 또한 몰라보게 달라졌다. 사실 일본이 침투하기 이전만 해도 조선 어업하면 단연 전라도 지방이었다. 1910년 경술국치 이전 전라도의 어업 인구는 조선 전체 수산업 인구의 40%, 제조업 50%를 차지하고 있어 그야말로 전라도가 조선 어업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헌데 일본인들이 자국에서 가까운 경남 어장으로 대거 진출해 경남을 중심으로 일본식 어구가 보급되고 어장이 개발되면서 전라도 중심의 조선 어업은 쇠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일본은 동해안에 동력선을 동원해 정어리, 명태, 고등어를 조선의 3대 어업으로 개발했다. 그러나 이 3대 어업에서 전체 수산업 인구 가운데 3~4%에 불과한 일본인 소유의 동력선이 80%의 어획고를 독차지했다. 일본은 조선에서의 값싼 노동력과 풍부한 어장을 배경으로 자본주의 어업을 경영한 결과 몇 가지 어종만으로도 이같이 놀라운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특히 3대 어장 가운데서도 정어리어업은 단숨에 황금 어종으로 떠올랐다. 정어리 한 가지 어종만으로 조선의 전체 어획량 가운데 50%를 차지하면서 일약 1000만원(지금 돈 약 1조원)대로 커진 정어리어업은 그렇잖아도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는 자본가들을 불러 모으기에 충분했다.


그렇다면 정어리어업이 조선 해역에서 어떻게 이같이 갑자기 대량으로 어획될 수 있었을까. 1900년경 일본은 북해도에서 청어를 압착해 비료를 만들어 쓰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부산물로 어유가 생산됐는데, 이것을 유럽으로 수출하고 있었다. 당시 독일로 어유를 수출하던 스즈키상점은 정어리 어유를 원료로 해 경화유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동안 등유나 윤활유로만 사용되고 있었던 어유가 우지와 마찬가지로 화약을 비롯해 비누, 양초, 마가린, 방적, 비료, 각종 글리세린 제조, 화장품 등 여러 가지 전략 산업에 필요한 공업용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이 회사는 고체형 유지류가 부족하다는데 착안해 고래나 청어, 정어리기름을 이용한 경화유공업에 진출했다.


그러나 어유 생산량은 경화유공업의 생산 능력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부족해 무엇보다 원료 확보가 시급했다. 이같이 어유 부족 현상이 심각해지자 일본의 경화유 제조 기업과 어업 자본가들은 조선으로 눈을 돌리게 됐다.


1935년 일본 어유 총생산량이 약 6만t에 그친데 반해 조선에서 생산되는 어유는 약 10만t으로 일본 전체 생산량의 1.5배 이상에 달했다. 조선에서의 어유 생산량이 일본의 생산량을 크게 앞질러 조선어장은 공업용 원료를 보급하는 어유 공급기지로 변모케 된 것이다.


하지만 조선 정어리어업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선의 어선들은 하나같이 무동력이었다. 길이 9m, 폭 2m 안팎의 소형 목선 한척에 어부 5명이 승선하는 돛단배 수준을 넘지 못했다.


어업 방식 또한 순전히 어부들의 경험에 기대는 주먹구구식이었다. 일본식 자망을 구입해 저마다 정어리어업에 나서고 있긴 했으나 그저 어군이 통과할 것 같은 해저에 길이 58m짜리 자망을 내리고 어군이 들기만을 기다리는 형편이었다.


다만 어업 자금을 조달하는 문제는 별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다. 출어를 할 적마다 어망과 부속품의 대금, 어부 5명의 계약금, 식량 6개월분 정도가 필요했으나 정어리 제조업자에게서 어렵잖게 빌려 쓸 수 있었다. 이익 분배는 순이익에서 어선 소유주가 20%, 선장이 30%, 나머지는 어부 4명이 공평하게 나누는 조건이었다.


이에 반해 일본의 정어리어업은 대부분 기선건착망으로 어획에 나섰다. 기선건착망 어업은 40~50t 크기의 선박에 50인 승선이 기본이었다. 여기에 20t 안팎의 예선 1척과 보조선 1척을 비롯해 수십t급 이상의 운반선 2~6척이 모여 하나의 선단을 이루는 형식이었다.


어업 방식 또한 크게 앞섰다. 정어리 어군 발견은 어부들의 경험이 아닌 비행기로 했으며 무선을 이용해 이를 탐지했다.


정어리 어장은 주로 함경북도 두만강 유역과 경성만, 함경남도 마양도 일대, 강원도 장전 앞바다였다. 또 어선이 정박하는 항구에는 기계 설비를 갖춘 경화유 제조공장이 건설됐다. 청진항구의 경우 하루에 5000~6000통에서부터 1만통 이상을 처리하는 수백 명이 일하는 대규모 공장이 즐비했다고 한다.


그러나 1930년대 중엽에 이르러 경화유 원료 확보 경쟁이 일기 시작하면서 조선의 정어리어업 또한 그 체질을 달리하게 된다. 지금 돈 약 1조원대로 커진 정어리어업에 마침내 조선의 자본가들마저 너도나도 뛰어들면서 조선의 정어리어업 또한 동력을 장착한 건착망어선으로 일본어업과 양보 없는 각축전에 나섰다.


동해에서 정어리어업이 절정을 이뤘던 1930년대 중엽엔 조선과 일본의 양국 간 건착망어선의 소유 상황이 8대 2의 비율에 육박했다. 함북에서 일본인 소유 48척, 조선인 소유는 18척이었다. 함남·강원도·경상도 어장에서는 일본인 소유 55척, 조선인 소유가 17척이었다. 전체 153척 가운데 20% 가량이 조선인 소유의 건착망어선이었던 셈이다.


이를 다시 선박의 톤수 별로 구분해보면 20t 이하 소형 선박은 일본인이 50명, 조선인 9명이었다. 30t 이하는 일본인 12명, 조선인 2명이었다. 50t 미만은 일본인 27명, 조선인 8명이었으며 50t 이상 대형 선박은 일본인만 2명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수적으로 열세를 면치 못했던 건 순전히 조선총독부의 까다로운 인허가 조건 때문이었다. 조선총독부에선 성실한 경영자, 풍흉을 견딜 수 있는 자산가, 다년간의 어업 경험자, 지역 연고자 등을 우선으로 인허가를 내준다고 하였으나, 기실 그런 조건을 갖춘 조선인들이란 어업조합의 조합장이거나 감사, 이사와 같은 조선총독부 권력과 유착 관계가 깊은 자들로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당시 쌀 1000석에 해당하는 금액(지금 돈 약 2억원)이 건착망 1통에 대한 권리금이었으니 총독부와 인맥이 닿지 않는 자가 건착망 인허가를 갖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때 정어리어업에 뛰어들었던 조선인 건착망어선의 소유주이거나 투자했던 자본가들은 과연 어떤 이였을까. 먼저 38세의 젊은 설향동이 눈길을 끈다. 그는 해산물을 전문으로 하는 무역 거상으로 당시 50만원(지금 돈 약 600억원)을 투자해 동해수산공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또 포목과 곡물 무역상으로 뒤늦게 정어리어업에 투신한 신양극은 건착망어선은 물론이고 9256㎡(2800평) 규모의 어분 제조공장까지 직접 경영하고 나선 인물이었다.


한때 함북 나진 지방의 토지 대부분이 자신의 소유였으며 소초도와 대초도를 비롯해 경성 등지의 토지, 무산 일대와 멀리 북만주에서의 대규모 산림과 광산업 경영 등으로 경성에서도 손꼽힌 부호였던 김기덕조차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금광에서 노다지의 꿈을 캐면서 하루 아침에 벼락부자가 된 염경훈에 이어 그밖에도 저인망·정치망·자망업으로 진출한 김성화와 김종고 등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다시 말해 돈이 좀 되는 거라면 지금 돈 수천억을 소유한 재벌일지라도 한낱 정어리를 잡기 위해 너도나도 차가운 겨울바다 속으로 어선을 띄웠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동해안에는 정어리가 너무도 많았다. 승자도 패자도 따로 없었다. 그저 인허가를 따내어 배만 띄우면 만선의 깃발을 올리는 건 시간 문제였다. 물 반 정어리 반인 황금어장에서 모두가 승자였기 때문이다.


당시의 신문 보도에도 그 같은 사실이 잘 나타나 있다. 아직 어장의 절반 가량이 진행된 기간 중인데도 잘 잡는 배는 하루에 2000준(樽), 못 잡는 배도 700~800준, 평균 1200~1300준씩 잡았다.


이같이 조선 해역에서 어획, 제조된 정어리 제조품은 전량 일본으로 보내졌다. 일본으로 보내져 앞서 얘기한 경화유공업의 원료에서부터 미곡을 증산시키는 비료로, 가솔린 부족을 대신하는 기름으로, 아시아와 태평양의 각처에서 사우고 있는 일본군 군용 통조림 식량 등으로 두루 이용됐다.


그러나 1939년까지 연간 120만t을 헤아리던 정어리 어획은 1940년 90만t, 1941년 63만t, 1942년 2535t으로 급감하기 시작했다. 그 원인을 조선총독부는 급격한 해류의 변화라고 둘러댔다.


하지만 1940년 태평양전쟁에 돌입하면서 정어리 어획량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기선건착망이 가솔린을 쓰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조업을 단축시키고 말았다. 더구나 출어 기간이 돼도 가솔린이 없어 출어하지 못했다. 때문에 어유를 생산할 수 있는 대형 정어리 떼를 눈앞에 보면서도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이듬해엔 가솔린 부족이 더욱 심각해져 조선총독부에선 기선건착망 연료로 가솔린 대신 정어리기름을 사용토록 할 정도였다. 하지만 정어리조차 어획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정어리기름을 구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조선총독부는 최후 결전을 앞두고 정어리 건착망어업을 전면 중지시켰다. 그와 함께 경화유 제조공장은 휴업에 들어갔으며 청진에 있는 대규모 경화유 공장들은 군수용 알루미늄공장으로 전환해야 했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동시에 조선 해역의 정어리 떼마저 소멸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대도 1930년대 중엽 처음 동력선을 출어시켰던 이때를 우리 근대어업의 시작점으로 보긴 어려울 것 같다. 엄밀히 말해 우리 근대어업의 시작점은 이보다 훨씬 이후인 1948년 2월 28일로 봐야 한다. 당시 조선원양어업주식회사가 띄운 어선이 처음으로 제주도 남방 70마일 해상까지 진출했다. 이때의 출어 규모는 지도선 1척과 작업선 3척, 시험조사선 1척, 운반선, 유조선 등 총 24척으로 선단을 이룬 것이 그 효시였다.


하지만 1930년대 중반 동해안의 정어리를 놓고 일본어업과 각축전을 벌였던 이때의 출어는 분명 근대어업으로 도약해가는 분수령이었음이 틀림없다. 다시 말해 정어리를 원료로 하는 경화유공업이 발전해 산업화를 이뤄가는 초석이 됐을 뿐 아니라, 이후 원양어업으로 나아가기 위한 학습과 단련의 과정이 됐다는 사실이다.




작가 박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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