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 김옥교, 32세에 대형호텔 사업가 되다
요릿집 '천향원' 경영 대박..최초 여성기업가로 떠올라
최창학 등 당대 거부들과 함께 수억원짜리 자가용 굴려
앞서 ⑥회 연재 때 '쇠당나귀'라 불렸던 자동차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10년 전후였다고 밝힌 바 있다. 궁궐에서 왕실용으로 들여온 영국제와 프랑스제 자동차였다. 이 자동차는 궐 안에서만 맴돌았을 뿐 궐 밖으로 나오는 일이라곤 없었다.
그러나 궐 바깥에서는 벌써 총독부 고관을 비롯해 일본군 사령부, 외교관, 선교사, 그리고 이완용과 박영효 등 친일 귀족들이 앞다퉈 자동차를 구입한데 이어 광산 부자와 대지주들까지 그 뒤를 이었다. 1919년경에는 서울의 거리를 누비는 자동차 대수가 50대 안팎까지 늘어났다.
자동차와 관련해 '삼천리'는 1936년 6월호에 기사 한 토막을 실었다. 이른바 장안의 유명 인사들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의 가격표를 공개하고 나선 것이다.
서울 장안에서 하루에도 수업시 '아스팔트' 우으로 구으러 다니는 신형 '씨보레' 유선형 자동차가 이 거리에 쏘다니는 시정인(市井人)들의 말쑥말쑥한 옷자락에 몬지를 피우며 달아나고 잇다. 그런 중에는 서울 안 '명사'들의 자가용 자동차가 한 둘이 아니다. 맷 해 전만 하드래도 그런 줄 몰으겟든데, 요즈음에 와서는 장안에서 누구누구하는 '명사'들이란 거지반 자가용 자동차를 한 대쯤은 가지고 잇다. 이제 이 분들이 사유하고 잇는 자동차란 도대체 얼마나한 가격의 것들인가? 알어보면 아래와 갑다.
최창학(금광 발견으로 벼락부자) 1만3000원(지금 돈 약 15억6000만원)
민대식(조선 최고 부자 민영휘 아들) 8000원(9억6000만원)
김기덕(무역회사 동일상회 사장) 8000원
방응모(금광 발견으로 벼락부자) 8000원
임병기(대지주) 8000원
신석우(조선일보 사장) 7000원(8억4000만원)
한학수(건축회사 한청사 사장) 7000원
박영철(조선상업은행 은행장) 6000원(7억2000만원)
원인수 6000원
김옥교(천향원 사장) 6000원
김연수(경성방직 사장) 4000원(4억8000만원)
이밖에도 멧 사람 더 잇스련만도 위선 이만츰 해두기로 하겟다.
이때쯤이 되면 서울 시내를 무람없이 누비면서 '쏘단이는' 자동차 대수가 어느새 500대에 육박했다고 한다. 예컨대 앞에 열거한 이른바 '명사'들 말고도 '10전(지금 돈 약 1만2000원)짜리 인간들이 타고 다니는 뻐-스'가 떠나고 나서도 '80전(지금 돈 약 9만6000원)이나 하는 택시를 불러 타고 다니는' 팔자 좋은 이들이 그만큼 늘어났다는 얘기다.
그러나 서울의 거리에는 아직도 구부러진 어깨를 한 채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는 '이 세상에서 제일 못 견딜 일은 00(수사 기관의 고문을 일컬음)과 빚쟁이에게 졸리는 때'라는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당장 오늘 '저녁에 솟헤 너흘 쌀이 업서서' 어쩔 수 없이 '흡혈마 전식동물 고리대금업자'를 찾아갈 수밖에 없는 고단한 인생들이 즐비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런 인생이 곧 당대 식민지 서울의 거리를 오가는 대부분 보통 사람들의 삶이었다. 1936년 상업 중심의 근대도시 경성의 거리 풍경이었다.
그렇다면 당대 그처럼 대부분 보통 사람들의 삶은 어느 수준이었을까? 다음은 그들의 생생한 육성을 그대로 옮겨본 것이다.
▲가수
"전속 가수나 되면 월급 60원(지금 돈 약 720만원 ) 이외에 인세와 특별출연에서 수입되는 것을 합하면 100원(1200만원) 정도 되니다만 의복가지나 해입고 사교도 하자니 늘 회사에 빗지고 단임니다."
▲뻐스껄
"1일 수입은 75전(9만원)이고 노동 시간은 10시간인데 어머니와 동생과 나 세 식구가 사라감으로 보통 부족함니다."
▲신문기자
"월급 70원(840만원). 1일 노동 시간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생활비는 하숙대 20원(240만원), 담배갑 6원(72만원), 양말갑 1원(12만원), 술갑 10원(120만원), 양복 등 월부 15원(150만원), 그 외 잡비 15원…. 잘 하면 10여원이 남지만…."
▲여직공
"1일 수입 45전. 노동 시간 오전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1개월 기숙사비 9원(108만원) 주고 그 남어지 옷을 해입슴니다."
▲의사
"월급 100원(1200만원)은 보통이고 개업하며 현금 수입 300원(3600만원) 이상은 됩니다. 노동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밤중에도 환자가 부르면 가바야지요! 생활비가 상당히 나감니다."
▲카페 여급
"어듸 수입이 일정한가요. 이 집은 퍽 쓸쓸해요. 그래도 하로에 3, 4원 되는 때도 잇고 1원(12만원)도 못되는 때도 잇슴니다. 노동이라고 할 것은 업지만 오후 1시부터 밤 2시까지 일봄니다. 생활비로는 옷갑시 만히 나가빗진담니다."
▲두부장사
"하로 잘 해야 30, 40전(3만6000원~4만8000원) 생기지오. 소리 지르고 도라다니자니 막걸리 잔이나 먹어야지오."
▲인력거부
"잘해야 하로 50전(6만원) 벌지오. 비나 오면 돈이 생김니까? 만히 발면 만히 쓰고 벌지 못하면 굶는 것 밧게 업슴니다."
놀랍지 않은가. 어쩌면 이토록 지금의 생활 수준과 닮은 점이 많은지 한 세기 전의 얘기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다. 암튼 얘기를 되돌려 앞으로 다시 돌아가 보기로 하자. 이른바 수억대의 고급 승용차를 타는 이른바 '명사'들의 명단을 다시 보아주길 바란다.
이 자료에 따르면 당시 서울에서 가장 고가의 자가용을 굴리는 이는 금광을 발견하면서 하루 아침에 일본광업으로부터 800만원(지금 돈으로 약 9600억원)의 거금을 손에 쥔 벼락부자 최창학으로 나와 있다. 차종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 돈으로 15억원이 넘는 자가용이라면 당대 최고급 승용차가 아니었나 싶다.
또 한 사람 눈에 띄는 이는 명단 가운데 유일한 홍일점인 김옥교(金玉橋)다. 김옥교는 천향원이란 요짓집으로 큰돈을 벌어 당시 건설비용 60만원대의 대형 호텔을 건설하면서 이른바 '장안 명사'의 반열에까지 오른 젊은 여걸이다.
다음은 <삼천리> 1935년 11월호에 실린 여사장 김옥교가 짓는다는 호텔 관련 기고문이다.
60만원을 던져 순 조선식 호텔을 서울에 설립한다는 신문 3면 기사를 여러분은 보셧스리라. 사실 서울에는 이러타 하고 내여노을만한 순 조선풍 호텔이 업다. 이것은 근대적 감각을 가진 사람치고 누구나 통절히 늣기는 유감이 아닐 수 업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그래도 조선 정취가 올르는 호텔이나 고급 여관을 찾다면 겨우 잇다는 것이 견지동의 전동여관(典東旅館)-이 여관은 역사가 오래어서 유명한 기독교의 스타-박사 등 몃몃 분도 유숙한 적이 잇기는 하나 그 가옥 구조라든지 정원의 천석(泉石)이라든지 손님에게 대접하는 음식범절이라든지 침구 모든 것이 조선을 유람하는 영ㆍ미국 신사숙녀를 만족히 영접하도록 되지 못하고, 수 삼년 전에 요릿집 '식도원' 하든 안순환씨의 별장을 개조하여서 하는 광교 다릿까의 '중앙호텔'로 말할지라도 집은 비교적 드놉고 깨긋하나 모든 구조가 일류 호텔이라 할 수 업섯다. 나는 안도산(安島山, 안창호를 일컬음)께서 출옥 즉후 여기 체제하섯든 관계로 누차 이 호텔을 삿삿치 구경할 기회를 가뽘섯스나 외지에 비하야 엄청나게 손색(遜色)잇섯다. 그밧게 명동호텔 무슨 여관 모도다 40만이 사는 반도 대표도시에 자랑할 숙사는 못되엇다.
우리는 각금 지방을 여행하느라면 평양이나 대구, 경주 등지에 실로 여관 시설이 훌륭함을 볼 수 잇는데 엇재서 서울만이 이러케 뒤떠러져 잇는가 하고 생각할 때 안타갑기 그지업다.
그런 까닭에 조선 정취를 맛보자고 일부러 만리타국에서 온 제외국(諸外國) 손님들은 조선 여관을 찾다가 그만 조선 호텔에 드러 겨우 순종께서 즉위하시든 팔각당이나 어루만저 보고 만족하는 형편이고 가튼 조선 사람들도 지방에서 올너오는 실업가 등은 남촌의 여관에 여장을 푸는 현상이 대부분이다.
이때에 잇서 60만원이라는 거금을 던져 순 조선 정취가 흐르는 호텔을 경영한다 하니 일반은 유쾌한 생각으로 이 소식을 듯게 되엇다. 그러면 이 호텔을 누가 설하여 장차 엇더케 경영하여 가러하는고….
1935년 무렵 60만원(지금 돈 약 720억원)이라면 결코 만만한 자금 투자가 아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상당한 재력가가 아니고서는 좀처럼 손을 대기가 쉽지 않은 프로젝트다.
헌데 지금 돈으로 7억원대의 고급 자가용을 타면서 대형 호텔 건설을 선언하고 나선 그녀는 장안의 그 어떤 유력한 부호도, 재벌도 아니다. 이제 갓 서른 두셋에 불과한 젊은 여성 기업가 김옥교라는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누구나 잠깐 눈길이 머물 수밖에 없다. 아니 그녀가 누구인지 당시에도 궁금증을 갖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당시의 부호들이 그랬던 것처럼 무슨 고관대작의 후손이거나 대지주의 집안도 아니었다. 집안의 배경이나 물려받은 재산이라곤 없는, 그렇다고 최창학처럼 금광이라도 발견해서 하루 아침에 벼락부자가 된 것도 아니었다. 그녀 또한 그리 간단치만은 않은 인생 역정을 헤쳐 온 숨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서울 태생의 김옥교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변변히 학교조차 다니지 못했다. 하지만 미모가 워낙 뛰어나 머리를 길게 땋고 다니던 어린 시절부터 곧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곤 했다. 또 그 같이 집안은 가난하지만 얼굴이 빼어나게 예쁜 처녀들이 가는 길이란 으레 정해져 있곤 했다.
다름 아닌 기생이었다. 그녀 또한 어떤 '권번'에 기적을 두고 나비 같은 어여쁜 자태로 뭇 남성들 앞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녀가 아리따운 미모와 자태를 인정받는 데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기방에 출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미 소리 잘 하고, 춤 잘 추고, 거문고 잘 타는 '장안 1등 명기'란 칭송을 얻었다.
이쯤 되자 얼굴 잘 생기고 돈 잘 쓰는 남정네들이 그녀의 주위에 무시로 오락가락했다. 어떻게든 그녀를 차치해보려고 저마다 사족을 못 썼다.
하지만 화무십일홍의 덧없음을 알기나 하듯이, 그녀는 나이 서른 줄에 접어들 무렵 잘 나가던 기방에서 스스로 발을 뺐다. 그런 뒤 남편과 함께 인사동 조선극장 부근에다 '천향원'이란 조선 요릿집을 개업하면서 안주인으로 들어앉았다.
그러나 주위의 기대보다는 우려가 더 컸다. 당시 조선 요릿집 하면 명월관과 식도원이 규모에서 화려함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빈틈이라곤 없었다.
그런데도 김옥교의 천향원은 출발부터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 그녀의 올드팬들(?)로 이내 문전성시를 이뤘다. 더구나 오랜 불황기를 지나 때마침 불기 시작한 호경기를 타고서 요릿집 경영은 순풍에 돛을 단 듯 순조롭게 열려나가 시쳇말로 돈을 자루에 쓸어 담았다.
그렇게 불과 3, 4년 만에 요릿찝 천향원을 증축하는가 싶더니, 풍광 좋은 성북동에 별장을 지은데 이어 마침내는 거금 60만원을 쏟아 부어 서울 시내 한복판에다 대형 호텔을 짓겠다는 폭탄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권번의 기생에서 요릿집으로, 다시금 대형 호텔을 지어 올리면서 불과 서른 두셋의 나이에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 기업가로 자신의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이다.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