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상하가 쓰는 재계 通史
<11>조선극장과 단성사의 무한경쟁
1920~1930년대 접어들면서 서울의 거리 풍경도 사뭇 빠르게 변모해가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쇠당나귀'라고 불렸던 자동차의 출현이나 '강철 같은 별표 고무신'과 같은 갖가지 개화 상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낯설음과 신기함의 당대 문화현상을 그저 수동적으로 열광하는데 그친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해 견고하게 굳어 있던 전근대적인 화석에 균열이 가기에 이르렀고 그 균열의 틈새를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열렬하고 심각하게 갈망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무엇보다 그 같이 새로운 시대로의 불길을 댕긴 것은 '유행'이었다.
조선극장, 파라마운트와 계약..발성영화 국내 최초 상영
박승필의 단성사, 경영안정...'춘향전'으로 라이벌 구도
유행은 사회를 화석(化石)으로부터 구언하는 것이라-고 하느 말이 잇다. 그럴듯한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요사이 서울 길거리에는 여긔 이 그림과 가튼 괴이한 형상이 하늘을 울어러 저주하는 듯, 길거리를 왕래하는 사람, 사람을 깔아보는 듯한 표정을 띄고 실성한 사람 모양으로 혼자 중얼대며 짧은 다리를 무거운 듯이 옴기는 사람들이 잇다. 그는 금칠한 책을 거미발 가튼 손으로 움키어 쥐고, 풀대님한 바지에 '레인 코-트' 닙고 '사구라' 몸둥이를 들엇다. 그이 중얼거리는 소리는 이러하엿다. “조선 사람은 심각하지가 못해! 조선 녀성은 모두가 천박한 것들 뿐이야! 여긔서 무슨 문예(文藝)가 생기고 여긔에 무슨 련애(戀愛)가 잇겟는가? 아- 강렬한 자극을 밧고 십다. 사랑이라고 아조 악독한 녀성과 더불어 하고 십다. 아- 태양을 껴안고 십다. 아- 아모 것도 취할 곳 업는 조선을 벗어나야만 한다!”고. 여보게, 련애시 짓는다고, 선술집 안주만 업새는 친고들! 길을 똑바루 걸어라!
1925년 11월3일자 시대일보에 안석영이 처음으로 그리기 시작한 한 컷짜리 만화에 짧은 글이 결합한 만문만화의 전문을 인용한 것이다. 안석영은 이 만문만화에서 연애시를 혼자 중얼거리며 비틀대는 모던보이에게 '길을 똑바로 걸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대모테 안경을 쓰고 젬병 모자를 눌러쓴 모던보이나 짧은 치마와 작은 양산을 든 모던걸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되려 하루가 달리 이들의 유행은 경성의 거리로 급속히 번져나갔다.
그리고 그런 모더니즘적 유행의 형성에는 다른 무엇보다 활동사진의 역할이 컸다. 활동사진이야말로 이들의 유행을 만들어주는 밤거리의 가로등이었다.
이런 활동사진이 처음으로 등장한 건 1903년 6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성 거리의 전차 증설 공사를 맡았던 미국인 기업가 콜브란이 설립한 한성전기회사가 동대문 근처에 있는 전차 차고 겸 발전소 부지에서 활동사진을, 그러니까 서구에서 들여온 토막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했다. 전차 증설 공사장의 근로자들을 독려하고자 상영하던 것이었는데 입소문이 나면서 일반인도 입장료만 내면 영화를 볼 수 있도록 개방했다.
물론 처음에는 단순한 노천극장이었다. 스크린을 대신한 흰 옥양목 장막과 함께 영사기 등 간단한 설비만을 갖춘 보잘 것 없는 시설이었다.
헌데도 영화를 보겠다는 관객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매일 밤 입장료 수입만 100원(지금 돈 약 1200만원)에 달할 정도였다. 한 사람 관람료가 지금의 신문 한 달치 구독료에 맞먹는 10전(지금 돈 약 1만2000원)인 점을 미뤄 볼 때 어림잡아 매일 밤 1000여명에 달하는 관객이 몰려든 셈이다.
상영된 필름도 대부분 15~30m 안팎의 단편영화 형식을 띤 짤막한 실사 작품이었다. 더구나 화질과 내용 모두 조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난생 처음 영화를 관람한 관객들에게는 바로 눈앞에서 생생히 펼쳐지는 것처럼 실감 나게 비쳤던 모양이다. 철마라고도 불렸던 기차가 씩씩거리며 달려오는 장면을 본 관객들은 스크린을 대신한 흰 옥양목 장막에서 기차가 금방이라도 뛰쳐나와 자신들을 덮칠까봐 곧잘 비명을 내지르곤 했다.
그래서 영화가 모두 끝나고 불이 환하게 켜지면 관객들은 저마다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며 너도나도 장막 앞으로 몰려나갔다. 조금 전까지 실감나게 본 그 기차가 과연 어디서 어떻게 나타나 도깨비처럼 자신들을 깜짝 놀라게 한 것인지 못내 궁금해 장막을 들춰보거나 두드려보고는 했다.
이처럼 노천극장으로 출발한 활동사진은 밀려드는 관객의 성원에 힘입어 이내 관람 시설을 갖춘 전문 영화관으로 자리를 잡아나갔다. 그리해 1910년에는 경성고등연예관이, 1918년 무렵에는 황금관·우미관·단성사 등이, 1922년에는 조선극장까지 가세하면서 영화는 어느덧 서울문화의 한 축을 담당케 됐다.
최초의 조선 영화는 1923년에 만들어졌다. 영화를 찍어보겠다며 시사신문 기자직을 내팽개치고 뛰쳐나온 윤백남이 만든 '월야의 맹서'였다. 이 영화는 말할 것도 없이 변사가 해설하는 흑백 무성영화였다.
아, 여기는 서울 변두리의 어느 조용한 동리. 아침이면 새벽닭이 울어 사람들의 잠을 깨우고 저녁이면 개가 짖어 마실 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재촉하는 한적한 마을. 이 마을에 영득이라는 총각과 정순이란 처녀가 있었으니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약혼한 사이였던 것이다. …<중략>… 영득이는 서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인텔리 청년이었으나 무엇이 못마땅하고 무엇이 뒤틀렸는지 가사를 돌아보기는커녕 매일같이 주색잡기에 파묻히고 그로 인해 그래도 남부럽지 않던 가재를 탕진하고 말았다. 그렇게 되자 약혼자 정순이는 기가 막혔다. 기가 막힐 뿐 아니라 자기 약혼자가 그렇게 되매 정순의 고민은 이만저만 큰 게 아닌 것이었던 것이었다….
어둠 속에 영사기가 돌아가는 낮은 기계음이 물소리처럼 아련한 가운데 청산유수와도 같은 변사의 낭랑한 목소리가 관객의 심금을 쥐어짰다. 그와 함께 객석의 여기저기에선 남몰래 훌쩍이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당시 변사는 대개 스크린 왼편에 자리한 일반용 탁자에 앉아 책상 전등이나 손전등으로 대본을 비춰가며 영화 내용을 해설했다. 영화 내용의 등장인물을 소개하는 재담 못지않게 분위기를 띄우는 것 역시 변사의 중요한 몫이었다.
그래서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악대의 연주가 흘러나오면 변사는 모닝코트나 프록코트를 애써 걸쳐 입고서 박자에 맞춰 뽕뽕이 춤을 추며 등장하곤 했다. 관객의 흥을 돋우려면 배꼽 뽑는 우스갯소리도 필수였는데, 변사의 이런 재주에 따라 관객의 수가 오락가락했기 때문에 영화 광고에서 아무개 변사의 독연(영화를 여러 변사가 분담하지 않고 혼자서 여러 역할을 도맡은 것)이라는 문구가 웬만한 주연 배우의 이름보다 더 크게 등장하는 때도 허다했다.
또 이런 변사로 말미암아 경성 시내 극장들은 지역적으로 양분되기도 했다. 청계천을 중심으로 종로 일대의 북촌과 일본인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던 혼마치 주변의 남촌으로 양분된 것이다. 종로 쪽에는 우미관·단성사·조선극장 등이 조선인 관객을 놓고 삼파전을 벌이는 가운데 남촌에서는 황금관, 대정관과 같은 극장들이 일본인 관객을 끌어들였다.
물론 이들 극장이 관객을 따로 구분해서 입장시켰던 것은 아니다. 영화를 설명하는 변사들이 조선인과 일본인으로 나눠지면서 자연스럽게 관객들도 갈라졌다.
이런 영화에 관련된 1932년 4월호 삼천리에 흥미로운 기사 하나가 실려 있다. '조선극장이냐, 단성사냐. 서울 장안의 수십만 관객을 쟁탈하는 극장의 쟁패전은?'이라는 기고문이었다.
조선극장과 단성사는 서울에 잇서서 조선사람의 손으로 경영되어 나가는 오직 한낮의 민중 오락기관이다. 둘이 다 날마다 수백수천의 관중을 일일야야(日日夜夜)로 포용하야 혹은 연극으로 혹은 음악으로 혹은 영화로 기름끼 업는 30만 시민의 생활을 윤색케 하여 주고 잇다. 이제 우리는 이 두개의 오락 진영을 부감하여 보리라.
단성사와 더불어 종로의 영화산업을 이끄는 양대 극장 가운데 하나였던 조선극장은 지금의 인사동 탑골공원 근처에 자리하고 있었다. 3층 근대식 건물로 극장 안에는 상설부와 영화배급부 두 개의 부서가 있었는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종래에 영화 배급을 전문으로 하던 기신양행을 인수해 미국 파라마운트사와 직접 특약을 맺은 뒤 파라마운트 제작 영화를 조선극장에서 단독 상영한 것이었다. 그 뿐 아니라 파라마운트 영화를 전국의 상영관에 배급하기 시작하면서 이 배급을 통해 거둬들이는 수익금만도 월 3000원(지금 돈 약 3억6000만원)을 헤아렸다.
더구나 조선극장은 발성영화를 가장 먼저 수입해 여기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종래의 변사가 해설하는 무성영화가 세계적으로 빠르게 자취를 감추고 있는데 착안해 8000원(지금 돈 약 9억6000만원)의 거액을 투자해서 미국제 R.C.A. 영사기를 구매, '유쾌한 중위' '카라마조프의 형제' 등의 발성영화를 절찬리에 상영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발성영화라고 하면 장안에서 일본인이 경영하는 극장이건, 또 다른 외국인이 경영하고 있는 극장이건 간에 조선극장이 단연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경성의 각국 영사관 사람들은 대개 영화 구경을 할 때면 북촌의 조선극장으로 모여들곤 했다. 당시 소문에 따르면 발성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한 뒤부터 매일 밤 관객이 평균 700명 아래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고 하니, 발 빠르게 발성영화를 들여오기 시작한 조선극장의 전술은 일단 성공했다고 보아도 좋을 성 싶다.
그렇다면 이런 조선극장의 최대 맞수라는 단성사는 어땠을까?
단성사는 조선극장보다 4년 앞선 1918년 지금의 종로3가 그 자리에 변함없이 자리하고 있었다. 조선극장은 초창기 10년 사이에 무려 10여 번이나 경영자가 바뀌고 또 여러 차례 휴관 위기에까지 처했지만, 단성사만은 설립자 박승필 사장 체제로 별다른 기복 없이 비교적 순탄하게 운영돼 오고 있었다.
그러나 심각한 경제 공항으로 말미암아 박 사장의 개인 재력만으로는 그 한계점에 달하고 있었다. 따라서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전혀 새로운 경영 체제를 도입하게 되는데, 그것은 곧 20여명에 달하는 단성사 직원 일동이 극장을 공동으로 경영한다는 처방이었다.
그 뿐 아니라 단성사는 지금까지 미국의 유니버설사와 특별 계약을 맺으면서 무성영화만을 들여오던 관행을 바꿔 드디어 조선극장과 마찬가지로 '킹오푸' '짜즈'와 같은 발성영화를 들여와 상영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두 라이벌 사이에 다소 벌어져 있던 간극이 일거에 따라잡히면서 단성사와 조선극장과의 경쟁 관계는 앞으로 더욱 치열하게 전개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해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 장안의 영화산업을 이끄는 양대 산맥인 조선극장과 단성사의 속살까지도 속속들이 들춰 내보이고 나서 이제는 마지막으로 그 판정만을 남겨둔 순간이었다.
그러나 삼천리는 잠시 숨을 고르고 나서도 그만 판정을 유보하고는 만다. 조선극장이나 단성사 모두 당시 영화계에선 결코 누가 앞서고 있다고 말하기 어려운 쌍벽과도 같아서 어느 한 쪽의 손도 선뜻 들어주지 못하고 있다.
다만 두 극장의 흥행전만이 뒷날 이어졌을 따름인데 먼저 흥행의 대박을 터뜨리고 나선 극장은 단성사였다. 1935년에 만들어져 선보인 영화 '춘향전'은 한국 최초의 토키영화(talkie, 사운드트랙이 포함된 영화)라는 점에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경성촬영소가 제작한 춘향전은 단성사에서 개봉했는데, 입장료가 1등석 1원(지금 돈 약 12만원)과 2등석 70전(지금 돈 약 8만4000원)으로 비교적 비쌌음에도 개봉 첫날 흥행 수입이 1580원(약 1억8960만원)에 달했다. 당시 춘향전은 제작비가 8000원(약 9억6000만원)가량 들어갔는데 서울에서만 2주간 상영으로 벌써 제작비 대부분을 건졌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물론 경쟁 관계인 조선극장도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조선극장 또한 '은하에 흐르는 정열'이라는 영화를 개봉작으로 올렸는데, 첫날 흥행 수입이 1300원(약 1억5600만원)을 기록하면서 단성사에 뒤지지 않는 무한 경쟁을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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