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상하가 쓰는 재계 通史
활명수는 왜 부채표를 달았을까
19세기 말은 조선 상계의 종말과 함께 새로운 상인들이 다시금 등장하는 시대였다. 500년 전통을 자랑하던 종로 육의전의 허망한 붕괴 이후 앞서 살펴본 이경봉이 개항장을 무대로 삼은 상인이었다면, 궁중의 선전관이었으면서도 전의들과 교류하면서 틈틈이 궁중 비방을 습득하곤 했던 민병호는 대대로 내려오는 비기를 들고서 상계에 뛰어든 새로운 상인이었다.
민병호는 동의보감에도 나오지 않는다는 궁중의 비방을 토대로 계피 4g, 정향 3g, 감복숭아씨 6g을 침출기에 넣고 적포도주 150g을 가해 잘 혼합한 다음 3일간 침출시킨 뒤, 이 침출액에 다시 박하뇌 0.15g, 장뇌 0.03g을 넣고 백설탕 40g과 증류수 70g을 가한 후 잘 혼합해 용해한 후에 여과해 60㎖ 작은 병에 담은, '목숨을 살리는 물'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활명수(活命水)를 개발하면서, 동화약방을 창업했다. 이 때가 1897년 가을이었다.
이 무렵 국내 의약계의 사정을 살펴보면 1877년 부산포가 개항되면서 그곳에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제생의원이 세워졌고, 1885년에는 우리 정부가 세운 최초의 서양식 의료기관인 광혜원이 문을 열었다. 활명수는 나라에 빗장이 열리고 서양의학이 들어오기 시작하던 거의 같은 시대에, 궁중 바깥으로 걸어 나와 일반 대중을 위한 약품으로 등장케 된 것이다.
그러나 이미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민병호는 약방 경영에는 직접 참여치 않았다. 대신 후견인을 자처하며 자신의 아들인 민강을 초대사장으로 내세웠다.
동화약방의 활명수는 순식간에 인기를 끌었다. 오랫동안 내밀하게 전해 내려오던 궁중의 비방으로 만들어졌을 뿐더러 국왕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선전관을 지낸 인물이 만든 제품이라는 신뢰가 입소문을 탔다. 더욱이 전래의 한약처럼 굳이 달여 먹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과 복용하는 즉시 나타나는 신속한 효과로 손쉽게 대중 속으로 파고들어 안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순식간에 인기를 끌어 모은 게 화근이었다. 활명수가 빠르게 성공하자 그만 모방의 위험에 노출되고 만 것이다. 1912년경에는 선발 주자인 활명수를 모방한 유사 상표가 시장에 범람했다. 당시 유명하다는 약방들까지 죄다 나서 발매한 활명수의 유사 제품으로는 천일약방의 통명수, 화평당약방의 회생수, 모범매약의 소생수, 조선매약의 약수, 낙천당약방의 낙천약수, 조선상회의 활명회생수 등이 있다. 심지어 이경봉의 제생당약방과 일본인이 경영하는 나카무라약관 마저 보명수, 활명액이라는 짝퉁을 내놓을 정도였다.
더구나 조선상회의 활명회생수와 같은 경우는 라벨에 회생이라는 글자만을 일부러 작게 표기해 활명수로 오인하게끔 노골화하는가 하면 나카무라약관의 활명액은 선정적이기까지 했다. 여체의 상반신을 그대로 드러낸 자극적인 그림을 신문 광고에 지속적으로 싣기도 했다.
이쯤 되자 모방을 방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게 시급했다. 활명수의 상징이랄 수 있는 부채표를 1910년 국내 최초의 상표로 등록한 것이다.
부채표는 시경에 나오는 '지주상합(紙竹相合) 생기청풍(生氣淸風)'에서 얻은 말로, 대나무와 종이가 합해져야 비로소 부채를 이뤄 맑은 바람을 일으킨다는 뜻이다. 이는 곧 '민족이 합심하면 잘 살 수 있다'는 '동화(同和)'라는 회사 이름의 의미하고도 일맥상통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제품의 다각화에도 힘을 쏟았다. 창립 10주년이 됐을 즈음엔 활명수 외에도 인소환ㆍ백응고 등을 연이어 개발해 당시 유명 약방 중에서 가장 많은 98종의 의약품을 생산했다. 창업자인 민병호와 초대사장 민강이 활명수의 인기에 안주하지 않고 그동안 제품 개발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뒤늦긴 했으나 그동안 좀처럼 눈길을 주지 않던 선전에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1910년 대한민보에 근하신년 광고를 게재하면서부터 신문 광고 전략에도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다.
이때에도 동화약방이 내보낸 광고는 다른 약방 광고와는 차별성이 뚜렷했다. 무엇보다 활명수나 인소환ㆍ백응고 등과 같은 주요 제품에 대해서만 알린 게 아니라 약방의 창업정신과 특약점의 관리 규정 등을 함께 내보냈다는 점이다.
또 같은 해 9월에는 국내 최초의 광고대행사인 한성광고사가 특집 기획해 매일신보에 실은 광고에도 참여해 관허 품목이 90여 종을 헤아린다고 알렸다. 그 후 1913년의 근하신년 광고에서는 당시로선 매우 이례적으로 과감하게 전면 광고를 통해 동화약방의 사세를 과시하는 한편, 화장품부와 건재부 ㆍ서류부 등과 함께 특영영업부의 활약을 알리기도 했다.
이같이 초창기 신문 광고는 대개 사세를 내세워 소비자로부터 신뢰를 쌓는 기업광고 중심이었다. 따라서 광고 제작 역시 여느 약방과는 달리 요란스럽다거나 화려하지도 않았다. 제품 위주에서 벗어나 순전히 카피 위주의 제작이었다. 등록 상표인 부채표 말고는 딱히 이렇다 할 다른 비주얼 요소를 일체 찾아볼 수 없었다. 또 이때부터 이러한 선택과 집중적인 광고 전략이 있었기에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소비자들에게 '부채표 활명수'로 각인돼 남아 있는 계기가 됐는지도 모른다.
그런가하면 일찍부터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에도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1915년에는 초대사장 민강이 설립에 참여하고 교장으로 재직하기도 한 사립 소의학교에 이익금 전액을 기부하겠다는 내용으로 경품 없는 경품부 광고를 내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동화약방의 신문 광고는 이후 크게 줄어들었다. 사세를 과시하던 전 품목 기업광고를 지양하는 대신 활명수 등 주력 제품의 광고만을 간간이 볼 수 있었을 따름이다. 경쟁 약방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광고가 줄어든 셈인데 이것은 아무래도 초대사장 민강의 경영철학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지 않나 싶다.
그도 그럴 것이 민강은 1919년 3ㆍ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 시위 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일제의 눈을 피해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로 하는 한성 임시정부의 수립과 함께 국민대회 개최를 추진했다. 그는 연락과 준비 임무를 맡았으며 국민대회 취지와 임시정부의 약법(約法) 등을 작성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동화약방을 연락 거점으로 삼아 자금 조달 활동까지 펼치고 나섰다.
그는 이 일로 결국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르다 보석으로 출옥한다. 하지만 출옥 이후에도 독립운동 단체인 대동단에 가입하고 동화약방을 국내의 대동단과 국외의 상해 임시 정부가 비밀 행정부서로 설치한 서울 연통부의 거점으로 제공했다. 연통부는 국내 각 도 ㆍ시ㆍ군 ㆍ면 단위까지 조직을 갖추면서 각종 정보와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연통부 활동은 1922년 일제에 의해 일제히 적발돼 와해될 때까지 계속됐다.
초대사장 민강은 민족주의자이며 교육자이길 더 바랐던 것은 아닐까. 그는 기업을 단순히 영리 추구를 위한 수단으로 보기보다는 자신의 이상을 추구하기 위한 도구로 삼았던 게 아니냐는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 실제로 그가 약방 경영을 독립운동의 자금 조달을 하기 위한 창구로 사용하고 연락 거점으로 활용했던 흔적을 동화약방의 역사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그가 미시적 경영 기법인 광고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더욱이 병마에 시달리는 대중을 자신이 개발한 약으로 구제하겠다는 신념을 가진 그에게 판매를 촉진시키기 위해 소비자를 설득해야 하는 광고가 그리 탐탁지 않았으리라는 것도 쉽게 짐작이 가는 대목이다.
그러나 민강의 이런 비기업가적인 경영철학, 다시 말해 독립운동에 깊이 관여하면 할수록 동화약방의 경영은 어려움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최고경영자가 감옥에 가 있지 않으면 해외에서 망명생활을 하느라 회사를 제대로 돌보지 않는데 경영 상태가 좋을 리 만무했다. 동화약방이 보유했던 약품 허가 품목 수만 해도 전성기의 90여 종에서 24종으로 줄어들 만큼 사세가 크게 위축됐다.
물론 이런 경영상의 어려움을 타개하고자 나름대로 몸부림을 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경영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신규 사업의 진출도 그 중 하나였다.
그렇잖아도 동화약방의 전국 영업장에는 고객들이 약품을 주문하면서 심심찮게 각종 혼수용품이나 문방구, 시계, 축음기, 생활 잡화 등을 서울에서 구해달라는 주문이 들어왔다. 이런 주문이 적지 않자 1913년 동화약방은 사내에 부속 영업부를 신설하면서 새로운 사업 영역으로 진출했다.
그런가하면 같은 시기 화장품 사업에도 진출을 꾀했다. 동화약방이 이미 관허를 획득한 품목 가운데 동화백분은 여성용 화장품이었으며 옥용수는 주근깨나 마른버짐 제거에 좋고, 위생유는 비듬을 제거해주고 향가를 풍기는 머릿기름으로 알려진 제품이다. 하지만 1919년 이후 동화약방의 화장품 광고가 신문에서 종적을 감춘 것으로 보아 그런 신규 사업 진출도 신통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으로는 기업 공개였다. 동화약방을 주식회사 체제로 전환해 외부 자금을 수혈 받았다.
1931년 동화약방은 액면가 50원(지금 돈 약 600만원)의 보통주 2000주를 발행하고 '주식회사 동화약방'으로 경성지방법원에 등기를 완료했다. 당시의 주식 분포를 보면 민병호와 민강 부자가 각기 650주와 1000주를, 나머지 주식은 인척이거나 외부 인사 6명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동화약방은 주식회사 체제를 갖춰 침체에 빠진 기업의 면모를 일신하고 경영을 개선해보기 위한 노력을 미처 펼쳐보기도 전에 초대사장 민강이 그만 세상을 뜨고 마는 비운에 처하고 만다. 그의 나이 겨우 48세였다.
더욱이 갑작스런 그의 죽음은 그렇지 않아도 어려움에 처한 동화약방을 혼란에 빠뜨렸다. 동화약방의 창업자인 그의 아버지 민병호는 이미 74세의 고령인데다 민 사장의 장남 민인복은 이제 17살의 고등학생이었다. 최고경영자로서 민 사장의 뒤를 이를 적합한 인물이 없었다.
민 사장의 인척인 민영덕이 2대 사장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주식 150주를 보유한 민영덕은 바지사장에 불과했다. 경영의 실제 권한은 초대사장 민강의 부인인 이효민이 쥐고 있었고 그녀는 자신의 친정 조카인 이인영을 지배인으로 내세워 실질적인 회사 경영을 전담케 했다.
그러나 민영덕 사장이나 이인영 지배인 모두 경영에는 문외한들이었다. 동화약방의 경영이 호전되기는커녕 점점 더 어려워져갔다.
결국 2년 뒤인 1935년 중앙고보를 갓 졸업한 19살의 민인복이 아버지를 이어 새로운 사장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침몰해가는 동화약방을 구해내기에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동화약방의 영업 실적은 눈에 띄게 줄어갔고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만 갔다. 1936년 총매출액은 4만3000원(지금 돈 약 47억8000만원)에 불과했으며 부채는 식산은행에만 8만원(지금 돈 약 96억원)을 넘어서고 있었다. 활명수 판매는 겨우 30만 병을 채우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장고 끝에 민씨 일가가 내린 결론은 어떻게든 파산의 불행만은 피하자는 것이었다. 동화약방을 되살리고 키워나갈 수 있는 역량 있는 인물에게 회사를 넘기기로 결심한다.
민씨 일가와 회사 간부들이 상의하고 물색한 끝에 결국 동화약방을 윤창식(尹昶植)에게 넘기기로 뜻이 모아졌다. 그는 일찍이 보성전문 상과를 졸업한 뒤 정미업을 시작으로 큰돈을 모아 재력이 풍부한데다, 독립운동과 빈민구휼사업을 펼치면서 당시 민족 기업인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던 인물이었다. 창업 40년의 동화약방은 그렇게 민씨 일가에서 윤씨 일가로 넘겨져 오늘에 이르게 됐다.
동의보감에도 없다는 궁중 비방으로 만들어진 동화약방의 활명수는 분명 당대 블루오션이었다. 하지만 경영의 악화를 이기지 못해 결국 이 같은 결과를 초래했다. 과연 민강 초대사장은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를 잘못 타고난 것인가. 아니면 그의 반기업가적인 기업가의 경영철학이 끝내 선대 창업을 지키지 못한 것인가.
박상하 작가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