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박상하가 쓰는 재계 通史
19세기 말 일본의 조선 침략은 대단히 정교하고도 치밀한 것이었다. 1883년 무력으로 인천 제물포를 개항시켜 개항장이 들어선데 이어 1899년 제물포-노량진 간 기차 개통과 함께 1905년에는 맑은 하늘에 날벼락과도 같은 화폐개혁까지 기습적으로 단행했다. 전통적으로 널리 유통되고 있던 조선 상계의 어음이 한낱 휴지 조각이 됐다. 500년 전통을 자랑한 종로 육의전 숨통이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끊어졌다. 이것은 곧 조선 경제의 숨통이 끊어졌다는 의미다.
결국 종로 거리를 중심으로 한 조선 상계의 메카는 눈에 띄게 그 빛을 잃어갔고 끝내 바람처럼 허망한 종말을 맞이하고 말았다. 끝까지 버티던 몇몇 시전 상인들마저 결국에는 종로의 중심에서 밀려나 멀리 서대문 바깥으로, 동대문과 남대문 주변으로 저마다 뿔뿔이 흩어져갔다. 그러면서 종로 거리는 공허 속의 동토로 남게 됐다. 사람의 발길조차 끊긴 불모의 땅으로 잊혀져갔다.
그러나 역사는 항상 그렇게 시작된다. 사람의 발길조차 끊긴 공허 속의 동토에도 시나브로 봄은 찾아들고 또 언제 어떻게 뿌려졌는지 모를 씨앗들이 그 불모의 땅을 뚫고 움터 오른다.
일본은 대단히 정교하고 치밀하게 조선 경제의 숨통을 끊어놓는데 성공해 조선의 시전 상인들이 끝내 썰물 빠져나가듯이 모두 사라지고 말았으나 썰물처럼 빠져나간 그 빈자리에 언제부터인지 새로운 상인들이 또 새싹처럼 돋아나와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남대문 안 제생당약방의 이경봉(李庚鳳) 같은 이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약방에서 먹고 자란 그는 일찍이 자신의 경험을 한껏 살려 한약재에다 제물포 개항장에서 들여온 양약 종류를 한데 버무려 '청심보명단'이란 제법 그럴싸한 만병통치약을 만들어냈다. 동양과 서양의 약재를 한데 버무려놓았으니 소화제로서는 약효가 그만이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약효가 뛰어나다 해도 가만히 앉아서 약을 팔순 없는 노릇이었다. 약을 보다 많이 팔기 위해서는 대중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어가야 했다. 헌데 이경봉의 눈을 번쩍 띄게 하는 게 있었다. 1899년 9월 18일자 경인선 철도 개통을 알리는 신문 기사였다. '수레 속에 앉아서 영창으로 내다보니 산천초목이 모두 활동하야 닫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 대한 잇수로는 80리 되는 인천을 순식간에 당도하얏는데…'
신문 기사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인천에서 서울까지는 80리 거리. 새벽밥을 일찍 먹고 인천에서 출발해 부지런히 걸어야 점심 때 서울 삼각산이 아스라이 바라다 보이는 오류동에 닿았다. 오류동 주막집에서 점심을 배불리 먹고 막걸리 두어 사발을 들이켠 뒤, 다시 기운을 차려 부지런히 걸어야 성문이 닫히기 전에 서울 남대문 안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그러한 80리 거리를 불과 한 시간 남짓 만에 '검은 괴물'이라는 기차가 달렸다. 그것도 한두 사람이 아닌 수백 명에 달하는 승객들을 한꺼번에 싣고서 기운차게 칙칙폭폭 내달렸다.
소문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소문을 들은 설 멋든 개화꾼들에서부터 완고한 상투쟁이 영감들은 좀이 쑤셨다. 어쩌다 서울에라도 올라치면 일부러 노량진까지 나가 이 '검은 괴물' 기차를 타보는 것이 무슨 유행처럼 되다시피 한 것이다.
이경봉은 그런 신문 기사를 보고서 무릎을 쳤다. 때마침 개통돼 인천에서 서울을 오가는 경인선 기차 안에서 승객들을 상대로 자신이 직접 나서 만병통치약을 팔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이경봉다운 상재가 번뜩였다. 조금은 남다른 방식으로 대중 속으로 파고들었는데, 지금껏 입어오던 도포 차림을 벗어버린 채 개화 양복을 걸쳤다. 구두를 신고 가죽가방까지 든, 말쑥한 개화쟁이 신사 차림으로 이런저런 풍도 적당히 뒤섞어가며 청산유수의 달변으로 약을 팔았다. 거기에다 약효까지 뛰어났으니 청신보명단의 인기가 어떠했으리라는 건 짐작이 가고 남았다.
이쯤 되자 청심보명단을 파는 말쑥한 차림의 개화쟁이 젊은 신사 이경봉은 경인선 기차 안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명물이 되었다. 또한 경인선 기차 안을 무대로 행상으로 팔기 시작한 청심보명단 역시 '검은 괴물' 기차와 더불어 전국 방방곡곡으로 소문이 퍼져나갔다.
청심보명단이 점차 명성을 얻어가자, 이경봉은 약봉지 겉면에 검은 거미 한 마리를 그려 넣어 그것으로 상표를 삼았다. 청심보명단을 찾는 사람들 역시 약의 이름보다는 그냥 '거미약'으로 부르는 이가 많았다.
이경봉은 이런 이유 때문에 1908년 청심보명단을 거리표로 상표 등록을 하려고 나섰다. 밀려드는 일본 제품들 사이에서 자신의 상권은 물론 제품의 차별성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경성 남대문 안 제생당약방은 청심보명단을 창제 발매한 뒤 우금 8년에 영업이 발달하므로 사무가 번다하여 주무 이하 제약원이 주야를 불문하고 각기 직무를 수하야 비상히 호번(浩繁)한 상태를 정한다더라….'
이 신문 기사로 미뤄 짐작건대 이경봉의 제생당약방은 여러 해가 지난 뒤에도 여전히 상승세를 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상승세 속에는 다름 아닌 이경봉만의 숨은 상재, 약장사는 곧 '선전이 5할'이라는 상술이 번뜩였다. 누구도 따를 수 없었던 그만의 '시끌벅적한' 선전 전략이 비상처럼 효과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무렵 남대문 안 이경봉의 제생당약방 앞에는 매일 저녁때만 되면 소란스러워지면서 큰 구경거리가 났었다. 수십 채의 인력거를 불러 모아 인력거의 몸체에다 '청심보명단'이라고 쓴 화려한 깃발을 꽂은 뒤, 그 인력거에다 당대 일류의 기생들을 태워 장안의 화제와 이목을 끌게 하는 '시끌벅적한' 광고 전략 때문이었다.
볼거리가 그리 많지 않았던 시절에 수십 채의 인력거마다 울긋불긋한 깃발을 꽂고 북이며 장구ㆍ피리ㆍ징ㆍ꽹과리ㆍ날라리 등 신나는 풍악을 울리면서 거리를 유유히 지나는 풍경이란 여간 큰 눈요기가 아닐 수 없었다.
비단 서울만이 아니었다. 중부 지방은 물론이고 평안도와 충청ㆍ경상ㆍ전라도 지방을 석권한 뒤 멀리 만주의 안동까지 그가 직접 나서서 판매 영토를 넓혀나갔다. 그러나 이경봉이 정작 대박을 터뜨렸던 건 1909년 이 땅을 휩쓴 호열자(콜레라)가 창궐하면서였다. 세상이 온통 호열자로 죽어나가는 판에 이경봉은 때 아닌 특수에 그야말로 돈벼락을 맞았다.
당시 호열자가 어떻게나 심했던지 서울에서만 200여 명의 사망자가 속출했다. 또 상주들이 입는 상복의 삼베 값이 덩달아 뛰어오를 정도였다. 그런가 하면 동학농민전쟁 당시 전라 감사였던 이도재도 이 괴질에 걸려 죽었으며 친일의 나팔수 조직이었던 일진회 이용구 회장의 어머니도 이 병에 목숨을 잃었다.
이쯤 되자 죽어 나가는 이야 어쩔 도리가 없다 하더라도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큰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몸에 조금이라도 이상 신호가 오게 되면 호열자가 아닌가 하고 공포에 떨어야 했다. 때문에 뜬소문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소주와 마늘을 찾는 통에 그 값이 폭등하는가 하면 역질이 돌 때마다 감초처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소금 값이며, '구레싱'이란 이름의 크레졸 소독약 값도 자고 나면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
그럴 때 누군가가 "호열자에 청심보명단이 좋다더라"고 칭찬을 했다. 그리고 소문은 들불처럼 거침없이 번져나갔다. 사람들은 이경봉의 청신보명단을 마치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양 너도나도 맹신해 찾았다.
그러나 비상한 상재로 당시 약업계에 혜성처럼 등장했던 이경봉은 1909년 세밑에 그만 갑작스럽게 요절하고 말았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33세였다. 어쨌든 이경봉은 모두가 경이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던 제물포의 개항을 자신의 무대로 적극 수용한 새로운 상인이었다. 개항장에서 양약을 들여오고, 또 개항장에서 서울 노량진까지 오가는 기차를 이용해 약품을 팔면서 명성을 얻은 개항장 상인이었다.
이에 반해 민병호(閔竝浩)는 대대로 내려온 비기(秘技)를 상재에 접목시킨 새로운 상인이었다. 그는 원래 지금으로 치자면 경호실 간부에 해당하는 궁중의 선전관이었던 사람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국운이 다해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여 있던 시절이다.
이 시절 민병호는 궁중의 선전관으로 있으면서도 평소 의약에 대한 관심이 깊어 전의(典醫, 왕실의 의료원)들과 교류하면서 틈틈이 궁중 비방을 습득하곤 했다. 또 그는 기독교 신자로 서양 선교의사들과 접촉하면서 서양 의약에 대해서도 눈뜨게 됐다.
민병호는 이같이 동양 의학과 서양 의학에 대한 지식을 토대로, 궁중 비방에다 양약의 편리함과 이점을 더해 자신만의 약품을 만들어냈다. 100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시장에서 선두 자리를 굳건히 지켜오고 있는 1897년 동화약방의 활명수가 그것이다.
앞서 이경봉의 고민이나 '시끌벅적한' 선전과 달리 민병호의 활명수는 비교적 쉽사리 시장에 진입할 수 있었다. 왕정 국가에서 궁중의 비방으로 만들어진 약이 일반에게 판매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하나의 사건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국왕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는 선전관을 지낸 인물이 만든 제품이고 보니 소비자의 신뢰가 어떠했을지 짐작이 가고 남는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초기 활명수의 가격이다. 당시 신문 기사에 실린 활명수의 가격은 설렁탕 2그릇 값인 40전. 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해보면 대략 1만700원에 달한다. 이경봉의 청심보명단이 소비자를 찾아 나섰다면 민병호의 활명수는 궁중의 비방이라는 신뢰를 바탕으로 소비자를 불러 모은 셈이다.
새로운 상인들 가운데에는 전통적인 땅 부자들도 있었다. 놀랍게도 지금 돈 10억여 원을 호가하는 유선형 자가용 승용차를 끄는 부자들이 경성 거리에 십여 명이나 헤아리는 가운데 그 중 단연 돋보이는 인물이 민영휘(閔泳徽)였다.
당시 조선 최고의 부자로 불린 민영휘는 오랜 세월 고관대작을 지낸 인물이다. 영변 부사, 한성 좌우부윤, 평안도 감사, 시종원경겸임내대신을 지낸 그의 자산 규모는 자그마치 1000만원대. 지금 돈으로 환산해보면 대략 1조2000억원쯤 되는 액수다.
이런 그가 기존의 5만석지기에 달하는 대규모 지주경영 외에도 개항과 함께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온 새로운 상계에 전격적으로 뛰어든 것이다. 은행과 자동차, 부동산회사 등지에 손을 뻗치고 나선다.
또 이 시기 새로운 상인들 가운데는 지방의 소규모 지주들도 적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종로 거리의 화신백화점으로 유명한 박흥식(朴興植)을 꼽을 수 있다. 평안도 용강 출신의 박흥식은 그 지방 제일가는 부잣집이었다. 그의 집안은 10여 대째 내려오는 2000지기 지주였다.
그러나 부잣집 아들 박흥식은 마치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랐다. 16살이 되던 해 용강 읍내에 나가 쌀장사를 시작할 때까지 그는 자신의 고향을 떠난 일조차 없었다. 그 무렵 웬만하면 현해탄을 건너갔던 도쿄 유학은 고사하고 경성에 있다는 고등보통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다.
이런 그가 보다 넓은 세상을 찾아 경성 상계에 뛰어들게 된다. 그리고 끝내 조선 상계의 메카랄 수 있는 종로 2가 네거리에 당시 국내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화신백화점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혼마치(지금의 충무로) 거리의 일본 거대 자본 백화점들과 경쟁하면서 조선 상계의 자존심을 지켜냈다. 이때 그의 나이 불과 31살이었다.
그러나 개항장도, 대대로 내려오는 비기도, 더욱이 크고 작은 지주도 아닌 전연 새로운 상인의 등장 또한 없지 않았다. 그야말로 얼어붙은 빈한의 맨손으로 상계에 투신해 입지한 상인이 그들이다.
대표적인 인물이 1898년 박승직상점(지금의 두산그룹)의 박승직(朴承稷)을 들 수 있다. 종로 육의전의 붕괴 이후 바로 이런 다섯 유형의 새로운 상인들 가운데서 마침내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 기업과 기업가가 탄생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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