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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업성장史]⑭제물포 랜드마크 대불호텔, 서양인들 필수코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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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업성장史]⑭제물포 랜드마크 대불호텔, 서양인들 필수코스로 고종의 하사금으로 건축한 손탁호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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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조선의 호텔, 대불호텔에서 손탁호텔까지

1887년 개축한 대불호텔, 경인철도 개통 될 때까지 방 잡기 힘들 정도
한성서 가장 큰 프렌치호텔, 서대문 스테이션호텔 인수해 영화 상영
미스손탁, 러시아공광에 피신한 고종 시중들고 하사금 받아 호텔 신축


개항과 함께 제물포에는 수많은 외국인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일본인과 청나라 사람들 말고도 서구에서 먼 바다를 건너온 외교관, 선교사, 기업가, 의사, 특파원, 여행가, 탐험가, 사냥꾼 등 숱한 외국인들이 하루가 다르게 밀려들었다.

조선에 도착해 이들이 가장 먼저 겪게 되는 어려움은 무엇보다 숙박시설이었다. 지구를 반 바퀴나 도는 먼 뱃길을 달려와 제물포에 발을 내려놨다 하더라도 교통 시설이 따로 없었던 당시에 제물포에서 80리 거리의 한성까지 당일에 이동하기란 요원했다. 적어도 하룻밤 정도는 제물포에서 숙박을 해결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한 방에 여럿이 묵어야 하는 조선 주막집의 누추한 봉놋방에 들어가기도 뭐했다. 때문에 먼저 들어와 정착해 사는 서양인들의 호의를 기대하거나 그도 아니면 자기 나라 영사관에서 신세를 질 수밖엔 도리가 없었다. 조선엔 아직 호텔이라곤 없었던 탓이다.


이런 조선에 근대호텔이 맨 처음 등장하게 된 것은 역시 제물포에서였다. 미국 군함의 선상 요리사로 활동하던 일본인 호리 큐타로가 개항과 함께 제물포에 정착해 처음에는 빵 굽는 일부터 시작해서 정육점, 환전업, 제화업을 전전하다 세운 대불(大佛)호텔이 그것이었다.


그런데 대불호텔이 생겨난 초기의 시설은 보잘 것이 없었던 모양이다. 서양 요리는 형편이 없는 데다 호텔 지붕에선 빗물이 줄줄 샐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1887년 건축에 착수해 이듬해에 완공된 새로운 대불호텔은 서양인들을 위한 완전 서양식 호텔로 지어졌다. 당시로선 가장 서양식 유행을 따른 하이컬러 3층 높이의 붉은 벽돌 건축물은 단번에 개항 제물포의 랜드마크로 떠올랐다.


더욱이 이 호텔은 일어가 아닌 유창한 영어로 손님들을 맞이했으며, 식사 또한 서양인들의 입에 맞는 제대로 된 서양 요리와 함께 커피가 제공됐다. 객실 수는 침대가 딸린 방이 11개, 다다미방이 24개로 결코 적지 않은 규모였다. 숙박료는 당시 화폐로 상급이 2원50전, 중급이 2원, 하급이 1원50전이었다. 주변의 숙박 시설에 비하면 2배 이상 비쌌으나 늘 빈 방이 없을 정도로 인기가 높아 제물포를 통과하는 거의 모든 외국인들 예외 없이 이 호텔을 들러 가는 필수 코스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이에 반해 서울에 호텔이라는 이름을 내건 서양식 숙박시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1900년 무렵이 돼서였다. 제물포와 노량진 사이에 철도가 부설된 데 이어 한강 철교의 준공과 더불어 서대문역까지 경인철도가 완전히 개통된 게 직접적인 계기였다.


예전 같으면 제물포에 당도해도 으레 하룻밤 정도는 제물포의 호텔에서 숙박을 해결해야 했는데, 기차를 이용해 곧바로 한성까지 들어올 수 있게 되면서 굳이 제물포에 체류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제물포의 호텔들이 서서히 쇠락의 길로 접어든 데 반해, 한성에선 새로운 수요에 따라 전에 없던 서양식 호텔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국기업성장史]⑭제물포 랜드마크 대불호텔, 서양인들 필수코스로 손탁이 마차를 타는 모습.


새로운 황궁이 된 경운궁 영역과 인접한 곳에 자리했던 서울호텔, 경운궁의 정문인 대한문 앞 프렌치호텔과 임페리얼호텔, 서대문 부근(현 농협중앙회)의 스테이션호텔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세워졌다. 흔히 '미스 손탁'으로 알려진 앙투아네트 손탁의 손탁호텔(현 이화여고 100주년기념관) 또한 같은 시기에 등장했다.


먼저 이탈리아인 삐이노 소유의 서울호텔은 탁 트인 널찍하고 잘 갖춰진 침실이며 고급스런 프랑스 스타일의 요리를 선보였다. 호텔 부속 식료품 가게에는 그동안 구경조차 할 수 없었던 갖가지 서구 상품이 이목을 끌었다. 새로 입하한 프랑스·독일·이탈리아·러시아산 와인이며 샴페인, 맥주, 농축 및 무가당 우유, 각설탕, 식탁용 건포도, 이집트산 담배, 일본산 광천수, 영국산과 미국산 통조림 등이 즐비했다.


이 호텔에는 한때 외국 용병들도 투숙한 적이 있었다. 예컨대 1898년 9월 우리 정부의 외부 고문관 그레이트 하우스의 주도 아래 황궁 수비를 목적으로 중국 상하이에서 고용한 30명의 외국인 용병들이 이 호텔에 머물렀다. 미국인 9명, 영국인 9명, 독일인 5명, 프랑스인 5명, 러시아인 2명으로 구성된 외국인 용병들은 그러나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서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황궁도 지키지 못하느냐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따라 이 용병들은 황궁 경비 임무에 투입돼 보지도 못한 채 공연히 1년치의 급료만 지급하고는 곧바로 해산하고 마는 소동이 일기도 했다.


프랑스풍의 프렌치호텔은 호텔 정면 2층에 근사한 베란다가 설치돼 있던 당시 한성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호텔이었다. 이 호텔의 첫 주인은 론돈이었다. 론돈이라면 개항장 제물포는 물론이고 한성에서도 대창양행을 운영하고 있던 무기판매의 거상이었다. 이 때문에 초기 프렌치호텔은 '론돈여관'으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 호텔은 3년 뒤 새 주인을 맞이했다. 론돈이 운영하는 제물포 대창양행의 직원이었던 마르텡으로 호텔의 소유주가 바뀌게 된 것이다. 요컨대 프렌치호텔은 론돈에 의해 개설됐으나 이 호텔의 운영권은 대창양행의 직원이었던 마르텡에게 넘겨진 것으로 보인다.


호텔의 새로운 소유주 마르텡은 사업 수완이 매우 뛰어난 이였다. 1905년에는 서대문 부근에 자리한 스테이션호텔까지 인수해 이곳에 영화 상영관을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건 이 프렌치호텔에 묵었던 서양인 투숙객들이 한결같이 이 호텔에 그다지 좋은 인상을 갖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건 아무래도 이 호텔이 목욕시설을 갖추지 않은 불편함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운궁(혹은 덕수궁으로 부름) 대한문 앞에는 이런 프렌치호텔 말고 또 하나의 서양식 호텔이 있었다. 요리사 출신의 프랑스인 물리스 소유의 임페리얼호텔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임페리얼호텔 역시 프렌치호텔과 마찬가지로 투숙객들로부터 그다지 좋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던 것 같다. 다름 아닌 목욕시설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 호텔에 처음 들어선 투숙객들은 목욕시설이 구비돼 있는지부터 물었으나 호텔 주인 물리스는 '일본인 구역(혼마치)에 있는 목욕탕을 이용해야 한다'는 얘기 밖엔 들려줄 수 없었다.


그러나 새 황궁의 정문인 대한문 바로 앞에 자리한 이 호텔의 지리적 이점은 매력적이었던 것 같다. 이 호텔 2층 베란다는 한성의 명사들에게 새 황궁을 드나드는 모든 풍경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훌륭한 전망대 역할을 해줬다. 간혹 고종 황제의 행차를 호텔 베란다에서 내려다보다 불경죄로 처벌되는 사례도 없지 않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 호텔은 그런 지리적 이점에도 불구하고 이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문을 연 지 불과 3년여 만에 폐업하고 말았다.


서대문 부근의 스테이션호텔은 영국인 선교사 엠벌리 소유였다. 이 호텔의 초기 모습은 담장 대신 나무를 둘러 세운 장식만이 조선식이 아닐 뿐 건물 모두가 순전히 조선식 단층 기와집 수준이었다.


그렇대도 '스테이션'이란 이름 그대로 이 호텔은 임페리얼호텔과 마찬가지로 남다른 지리적 이점이 있었다. 제물포에서 경인철도를 타고 단번에 한성으로 들어오는 외국인 탑승객들이 주로 찾는 호텔이 됐다. 더구나 1899년 미국인 사업가 콜브란에 위해 개통된 청량리~서대문 구간의 전차 종착점이 되면서 여러모로 교통의 이점을 가진 호텔로 부각될 수 있었다.


때문에 엠벌리는 초기의 기와집을 헐고 서양식 신축 건물을 지어 올렸다. 정면에 성탑이 우뚝 솟아있고 그 꼭대기에 다시 높다랗게 깃대를 세운, 한성의 그 어떤 호텔보다도 멋지고 품위 있는 호텔로 거듭 태어났다.


그러나 엠벌리가 독립신문을 인수해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이 호텔은 앞서 얘기한 프렌치호텔의 마르텡 소유로 바뀌게 됐다. 그러면서 마르텡은 이 호텔의 이름을 애스터 하우스로 바꿨다.


특히 마르텡이 인수한 뒤에는 애스터 하우스가 단순히 숙박시설을 넘어 때로는 영화 상영관으로, 또 때로는 한성과 제물포에 거주하는 서양인 음악가들이 출연하는 유료 콘서트를 개최하는 등 새로운 문화 공간으로 폭넓게 활용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조선의 마타하리'로 불렸던 일본의 밀정 배정자가 세 번째 남편인 박영철과 결혼식을 올린 곳도 다름 아닌 이 애스터 하우스였다. 아직은 서양식 결혼식조차 흔치 않았던 시절에 요즘 유행하는 호텔 결혼을 해 원조가 된 셈이었다.


하지만 애스터 하우스의 운명 또한 그다지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한·일병합 이후 일제 강점기에 접어들면서 호텔의 소유주였던 마르텡의 종적은 물론이고 애스터 하우스마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여기에 빠질 수 없는 게 손탁호텔이었다. 손탁은 프랑스 태생의 독일인이었다. 여동생의 남편이 러시아 주한공사인 웨베르였는데 그를 따라 1885년 한성으로 들어온 당시 32세의 젊은 미망인이었다.


하지만 한성에 들어온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그녀는 웨베르 공사의 추천으로 명성황후를 소견하고 황궁에서 외국인을 접대하는 관리로 촉탁됐다. 더욱이 명성황후에게 자주 불려가 서양 세계에 대한 이야기 상대가 돼 주면서 그녀의 존재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재기 발랄한 데다 영어와 불어에서부터 조선어까지 능숙해 명성황후는 물론 드디어 고종의 지척에까지 갈 수 있기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1895년에는 정동에 있는 황궁의 토지와 가옥을 일부 하사받고 황궁의 외국인 접대 외에도 황족들에게 서양 식기를 비롯해 서양의 장식 등을 소개하면서 지냈다.


그러던 손탁에게 명성황후 시해 이후 고종의 아관파천은 예기치 않은 행운이었다. 그녀는 갑작스레 러시아 공관으로 이어한(임금의 거처를 옮기다) 고종의 식사에서부터 일상에 이르기까지 정성껏 시중을 들었다. 고종은 그런 손탁을 유달리 마음에 들어해 나중에는 황궁의 요리에서부터 연회의 일체를 맡기면서 거액의 하사금까지 내렸다.


그녀는 고종으로부터 받은 하사금으로 러시아공사관 건너편의 자리를 사들여 1902년 서양식 2층 규모의 큰 건물을 신축했다. 어느새 사십대 중반이 된 그녀는 거기에 손탁호텔이라고 이름을 짓고 스스로 여주인 겸 총지배인으로 호텔을 경영하고 나섰다. 지금의 정동에 있는 이화학당 건물이 그 자리이다.


하지만 손탁호텔은 한성의 다른 호텔들과는 달리 황궁 국내부의 '프라이빗 호텔(예약된 손님만 투숙하는 특정 호텔)'의 형태로 운영됐다. 한데도 손탁호텔만이 유명해지고 역사에 적바림돼 있는 까닭은 처음부터 한성에 거주하는 서양인들의 일상적 회합 장소로 자리매김하게 된 데다 무엇보다 반일친미 세력의 회합 장소로 알려졌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1904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자 손탁호텔에도 돌연 위기가 찾아들었다. 러시아 세력이 크게 위축되면서 손탁호텔 또한 그럭저럭 명맥만을 유지하는 수준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그러다 이듬해인 1905년에는 당시 일본의 최고 실력자인 이토 히로부미가 이곳에 투숙하면서 이른바 '을사늑약'을 배후에서 진두지휘한 비운의 역사를 간직한 공간이 되기도 했다.


결국 그녀는 역사의 격랑을 이기지 못해 프랑스인 보에르에게 손탁호텔을 매각한 뒤 24년 동안의 조선 생활을 마감한 채 내쫓기듯 프랑스로 돌아갔다. 프랑스로 돌아가 풍광 좋은 니스 지방에 별장을 지어 극동의 왕국에서 가져온 재산을 쌓아두고 만년을 유유히 보낼 계획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재산의 대부분은 여동생인 웨베르 부인의 명의로 러시아은행에 예치된 채 러시아 기업에 투자됐다. 그러나 러시아혁명 이후 공산 정권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그녀의 저금도 투자도 한순간에 사라지고 만 채, 1925년 71세의 노양(老孃·노처녀)으로 그만 러시아에서 객사하고 말았다.


돌아보면 개항과 함께 서양식 숙박 시설인 근대호텔이 이 땅에 탄생했다가 역사의 격랑 속으로 하나둘 사라져갔다. 하지만 이때 등장하게 된 근대호텔은 한성에 정착한 서양인들에겐 하나의 문화 공간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스러져가던 대한제국의 쇠망기를 고스란히 지켜본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그것도 가장 긴박했던 역사적 시점의 생생한 현장이었을 뿐더러, 이들 호텔의 운명 또한 그 궤를 같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개항기에 처음 등장하게 된 근대호텔은 단순히 외국인들을 위한 숙박 시설로서만의 역할이 아닌 여러모로 주목받는 문화와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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