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K에 바란다 - (하) 학계·협력사
안티세력 생기는건 그들과 소통 노력 부족 탓일수도
이젠 효율과 유연성의 시대 됐다
도요타 대규모 리콜 '반면교사' 실수없는 시스템 유지해야
현대차 질주에 협력사도 잘 나가 '슈퍼갑' 대신 상생모드로
[아시아경제 최일권 기자] "정몽구 회장은 정말 생각이 많은 사람입니다. 정 회장의 말투가 어눌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잘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남들보다 몇 단계를 앞서가면서 생각하는 습관 때문에 그게 말로 연결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정 회장이 단어 하나하나를 연결해 핵심을 지적한다고 평가합니다."
국내 자동차연구모임인 코리아오토포럼의 회장을 맡고 있는 조동성 교수(서울대 경영학과)는 지난 여름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에 대해 이 같이 평가했다.
조 교수는 현대ㆍ기아차 출범 이후부터 10여년 간 줄곧 기아자동차 사외이사를 역임하고 있어 비교적 오랜 기간 동안 정 회장을 지켜봐온 인사다. 기아차 사외이사를 맡게 된 데는 정 회장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조 교수는 "기아차가 현대차에 인수된 직후 정 회장으로부터 '사외이사를 맡아달라'는 연락을 직접 받았다"면서 "개인적으로도 기아차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수락했다"고 말했다.
조 교수 뿐만 아니라 정 회장에 대한 평가는 다른 경영학자들도 동의한다. 익명을 요구한 한 교수는 "정 회장은 말을 두서없이 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를 곱씹어 보면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많은 생각이 함축된 것 같다"고 언급했다.
조 교수를 비롯한 국내 경영학자들 사이에서 현대차와 정 회장은 시나브로 연구대상이 됐다. 경영학자들이 정 회장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것은 10년 간 현대차가 일군 놀라운 성과 때문이다. 세계에서 거들떠 보지 않던 자동차 회사를 단기간 내에 세계 5위로 이끈 정 회장의 원동력을 찾는 게 핵심이다.
서울대학교 학부생을 대상으로 현대ㆍ기아차 기업전략 특강을 개설한 이동기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정 회장의 리더십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고조되자 그의 경영관을 학문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최근 현대차그룹 비즈니스 사례 연구에 돌입했다. 이 교수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올 연말이나 내년 초 쯤 결과물이 나올 것"이라며 "2000년 초반까지만 해도 세계 10위권 밖에 머물렀던 현대ㆍ기아차가 지금은 '세계 자동차 메이커 빅5'에 진입했다. 운(運)만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다고 보고 연구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대학교 내에서도 앞 다퉈 현대차그룹 관련 강의를 개설하고 있다. 서울대에 이어 고려대와 연세대도 지난해부터 '현대차' 관련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고려대는 아예 현대차 마케팅에만 초점을 맞춘 전문화 된 강의를 열었다. 현대차그룹 임원들이 돌아가면서 특강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다고 한다. 그만큼 현대차의 위상이 커졌음을 반영하는 증거다.
교수들의 정 회장 평가는 비교적 후하다. 유지수 국민대 경영학과 교수는 "정 회장의 '양적 1위보다 질적 1위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방향은 좋다"고 평가했다. 김기찬 가톨릭대 경영학과 교수도 "정 회장은 돈을 많이 벌어도 호사스럽게 쓰지 않는다"면서 "서민형 최고경영자(CEO)라는 장점이 드러나는 대목이 아니겠냐"고 반문했다.
현대차에 대한 기대감도 숨기지 않았다. 유 교수는 "혹자는 우리나라의 서비스업 비중이 낮으니 그쪽 산업을 키워야 한다고 말하지만 제조업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면서 "우리나라 제조업 중심에는 자동차가 있고, 그 안에는 현대차가 자리잡고 있다"고 무게감을 언급했다.
◆"변화를 통한 21세기형 제조업 만들기를"
후한 평가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학계에서 현대차에 거는 기대감은 크다. 현대차가 국가기간산업의 위상을 지닌 만큼 조언도 잊지 않았다.
경영학자들의 공통적인 조언은 앞으로의 성장동력이 기존과는 달라야 한다는 점이다. 그동안 일군 성장은 칭찬할 만하지만 미래에도 이러한 추세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다른 시각의 접근 또한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동차에 대해 기술적인 요소 뿐 아니라 감성적인 측면도 완벽히 갖춰야 한다는 게 핵심이다.
유 교수는 모듈화를 예로 들면서 "처음에는 인건비를 줄인다는 단순한 생각에서 출발했으나, 생산관리 등 시스템 전체에서 부차적 이익을 발생시켰다"면서 "이런 경험을 살려 현대차도 이제 사용자의 감성 등 신영역으로 자동차 연구를 확대시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동에 대한 인식이 바뀐 점도 정 회장이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정 회장의 트레이드마크는 '돌관정신'(단숨에 일을 해결한다)으로 표현할 수 있다. 즉, 과거에는 최고경영자(CEO)가 직원들에게 지시를 내리면 밤을 새워서라도 적극 추진하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무조건 지시한다고 해서 자신을 버리는 직원들을 기대하기가 어려워졌다. 노사관계를 연구해 온 한 대학교수는 "CEO도 이제 일을 많이, 오래 시키기 보다는 생산효율을 높일 수 있는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실수 없이 자동차를 만드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도 정 회장을 비롯한 현대차의 과제라는 지적도 나왔다. 일본 도요타자동차가 지난 2010년 대규모 리콜 사태 이후 위축된 사례를 감안할 때 실수 하나가 회사의 존폐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업계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실수 없는 생산은 더욱 중요해졌다.
특히 최근 들어 자동차 트렌드는 옵션이 늘어나는데다가 모델 수명이 짧아지는 등 기존 대량 생산체제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생산량 계획도 그에 맞춰 즉각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쪽으로 변했다. 한 대학교수는 "결국 현대차도 장수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욱 빠르고 지속적인 혁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외부와 교류 활성화해야"
현대차가 개선해야 할 또 다른 과제로 '교류의 활성화' 또한 지적됐다. 기업이 영속하기 위해서는 교류가 활발해져야 한다. 교류의 범위는 임직원ㆍ협력사ㆍ소비자는 물론 심지어 자동차와 관계 없는 일반인들에 이르기까지 가치사슬에 묶여있는 모든 이해관계자가 포함된다.
하지만 현대차그룹은 다른 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교류가 취약하다는 지적을 많이 받는다. 현대차 연구를 진행 중인 한 대학교수는 "현대차는 내부적으로만 보고서를 돌리는 등 문제를 회사 안에서만 해결하려는 경우를 많이 목격했다"면서 "다른 기업에 비해 교류할 수 있는 통로가 막혀 있다는 것인데, 잘 나갈 때는 문제가 없지만 불황으로 접어들 때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다"고 강조했다.
가장 중요한 고객과의 대화도 좀 더 많은 배려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왔다. 현대차는 파워 블로거, 동호회 등을 대상으로 다양한 행사를 열지만 이러한 행사는 정기적이지 않고, 필요할 때만 열곤 한다. 유 교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예로 들자면 현대차는 그 흔한 공식 트위터나 유튜브조차 없다. 유튜브의 경우 해외공장은 개설했지만 국내공장은 없다"고 지적했다. 해외에서 호평을 받는 현대차가 유독 국내 시장에서 괜한 미움을 받는 것은 바로 소통의 부재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경영학과 교수는 "안티 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은 현대차가 변화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라면서 "사안에 대해 솔직히 밝히고 오류를 인정하는 자세가 기업의 생존을 좌우하는 시대로 진화하고 있는 만큼 현대차 또한 그 흐름에 따라야 할 것"이라고 전했다.
현대차가 추진하고 있는 브랜드 고급화에 대해서도 학자들은 "길은 옳지만 보다 구체화된 방법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미국에서 에쿠스 시승차를 집 앞까지 배달하는 서비스를 실시해 새로운 시도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전체적으로 놓고 봤을 때 브랜드 가치를 상승시킬 수 있을 만큼 구체적인 방법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영학자들은 올 초 현대차그룹이 '새로운 생각이 새로운 가능성을 만든다'(New Thinking, New Possibilities)는 새 슬로건을 발표한 만큼 앞으로 에쿠스, 제네시스 등 같은 프리미엄 차종에 걸맞는 차별화 된 서비스를 발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협력사 "지속적인 동반성장 됐으면"
한편 현대ㆍ기아차 협력사들은 정 회장의 리더십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무엇보다 현대차와 기아차 판매대수가 늘어나면서 협력사 실적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정 회장은 본사에서 품질회의를 열 때면 으레 협력사부터 언급한다. 자동차 품질의 근원이 협력사에서 나오는 만큼 이들 업체 관리에 더욱 신경 쓰라는 지시를 내린다. 애로사항과 원하는 점을 파악해 불편함이 없도록 하라는 말도 덧붙인다. 명절 조기 대금지급, 협력사 교육 등은 모두 이 같은 파트너십에서 비롯됐다.
자동차 한 대에 들어가는 부품 개수는 약 2만~3만여 개 정도. 현대ㆍ기아차에게 부품과 소재를 공급하는 1, 2차 협력사만 해도 2400여개에 달한다. 현대차그룹 고위 관계자는 "(정 회장은) 협력사는 현대ㆍ기아차의 실적을 좌우하는 중요 파트너라는 확고한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현대ㆍ기아차 질주에 협력사들의 실적도 덩달아 상승했다. 1차 자동차부품업체들의 모임인 한국자동차공업협동조합 신달석 이사장은 "현대차와 기아차가 선전하고 있어 부품업체 입장에서도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도 바라는 점은 있다. 정 회장이 그리는 동반성장이라는 큰 그림이 실무진 선으로 내려가면 아직 기대에 못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매년 초면 발생하는 부품단가 할인 요구가 대표적인 사례다.
자동차부품을 만드는 대기업 고위 관계자는 "현대차는 한편으로는 상생을 강조하지만 다른 측면에서는 생산비용을 협력사에 전가하기 위해 매년 초 부품단가 인하를 요구할 때가 많은 데 올해는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면서 "노조의 압박에 밀려 자체 생산 시스템의 개혁 노력은 부진한 상황에서 협력사에게 부담을 강요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불만을 털어놨다.
'슈퍼갑'이라고 표현할 만큼 제품 개발 단계에서 협력사에 대한 강경한 자세를 취하는 것도 글로벌 기업이라는 현대차의 명성에 해를 입히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또 다른 부품 소재 공급업체 임원은 "자동차는 최초 차량의 개념 설정 단계에서부터 협력사와 함께 제품 개발에 참여하는 시스템이 정착되고 있지만 현대차 임직원들은 모든 일을 자신들이 일방적으로 주도하며 협력사에게는 통보하는 자세를 고수하고 있다"며 "그들의 요구대로 시제품을 만들었다가 품질이 떨어지면 오히려 협력사에 패널티를 가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이 임원은 "항공기ㆍ선박ㆍ고속전철 등과 마찬가지로 자동차는 볼트 하나만 거꾸로 끼워도 치명적인 사고를 유발할 수 있다"며 "협력사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현대차라는 완제품에 속한 수천개의 협력사 중 종업원 수 서 너명 밖에 안 되는 작은 업체 하나가 문제가 발생할 경우 전체 회사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정 회장의 상생정신이 현대차 말단 현장 직원들에게도 이어져 모든 이해관계자들이 함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고 당부했다.
최일권 기자 ig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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