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⑬남다른 家治
-소탈함 물려받은 정의선 부회장 남 하
대하는 모습 절대 안 보여
-故 이정화 여사 미화원에 명절선물 자애로운 모습 '집안의 귀감'
[아시아경제 이정일 기자]지난 7월1일 오후 1시40분께 김포공항 국제선 입국장.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닷새간의 미국 출장을 마치고 입국장으로 들어섰다. 오랜 비행 탓인지 발걸음은 다소 무거웠다. 이내 정 회장의 시선이 마중 나온 가족들에게 향했다.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을 비롯해 장녀 정성이 이노션 고문, 차녀 정명이 현대커머셜 고문, 삼녀 정윤이 해비치호텔앤드리조트 전무가 반갑게 인사했다.
정 회장의 세 사위인 선두훈 선병원 원장, 정태영 현대캐피탈·현대카드 사장, 신성재 현대하이스코 사장도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정 회장의 얼굴이 일순 환해졌다. 발걸음도 이내 가벼워졌다. 귀향의 안도감, 그리고 가족과의 재회가 긴 여정의 피로감을 말끔히 씻어낸 듯 보였다.
자식들의 따뜻한 마중 속에 정 회장은 그렇게 밝은 표정으로 공항을 빠져나갔다. 현대차그룹 측은 “정 회장을 중심으로 가족 간의 유대감이 각별하다”며 “가족 내부에서 잡음이나 시비가 없는 것도 정 회장이 엄하면서도 자애롭게 자식들을 이끌어왔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덕분에 정 회장은 내치(內治)가 아닌 외치(外治)에 주력할 수 있었다. 남다른 가족 간 유대감은 결국 현대차그룹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숨은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가족 간 유대감은 현대차그룹 성장의 원동력
정 회장은 2009년 10월 작고한 이정화 여사와의 사이에 1남 3녀를 뒀다. 정 부회장과 누이 셋은 정 회장 생일(음력 3월19일)이나 고(故) 이정화 여사 기일(10월5일), 고 정주명 명예회장 기일(3월21일), 고 변중석 여사 기일(8월17일) 등 집안 경조사에는 빠짐없이 참석해 가족애를 나눈다. 올해 이 여사 기일에도 제사를 지낸 뒤 온 가족이 산소에 다녀왔다.
정 회장의 자녀 교육은 사실 선친인 정주영 명예회장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른바 '밥상머리 교육론'이다. 이는 '일근천하무난사(一勤天下無難事·한번 부지런하면 천하에 어려운 일이 없다)'라는 족자가 걸린 청운동 정 명예회장 자택의 아침 밥상에서 시작됐다.
정 명예회장은 새벽 5시 청운동 자택으로 자식들을 불러 아침식사를 했다. 혹시라도 식사 시간에 늦으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 자리에서 정 명예회장은 때론 헛기침으로 자식들을 꾸짖었고 때론 호탕한 웃음으로 격려하고 칭찬했다. 아침식사 시간은 단순히 허기를 때우는 자리가 아니었다. 웃어른을 섬기고, 형제 간의 우애를 쌓고, 근면함과 성실함을 깨우치는 '의식'이었다.
밥상머리 교육이 몸에 밴 정 회장도 선대의 뜻을 자식들에게 가르치는 데 게으르지 않았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이 없다지만 현대차그룹 4남매가 이전투구 없이 무탈하게 잘 지내는 것은 그 같은 정신적 유산 덕분이라는 게 재계의 평가다.
물론 검소와 근면함을 한평생 실천했던 이정화 여사의 가르침도 빼놓을 수 없다. 이 여사는 손윗동서인 이양자 여사가 1991년 타계한 뒤 사실상 현대가의 맏며느리 역할을 기꺼이 떠안았다. 새벽 5시 아침식사를 챙기는 일도 이 여사의 몫이었다. 새벽 3시 어김없이 일어나 아침 준비를 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었다.
19년간 시어머니 병 수발에도 지극정성을 다했다. 친척 경조사는 잊지 않고 챙겼고 신문배달원이나 미화원들에게도 명절날 선물을 건네는 자애로운 어머니였다. 그런 모습은 자식들에겐 산 교육이었다.
이 여사는 자식들에게 '겸양'도 강조했다. 자식들에게 가장 많이 들려준 속담은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였다. 현대차그룹의 한 임원은 “이 여사는 어린 자녀들에게 겸양의 미덕을 강조했다”며 “자녀들에게 귀감이 되도록 스스로 이를 실천하신 분”이라고 회고했다.
이 여사는 현대·기아차그룹 계열사인 해비치리조트의 지분을 소유한 대주주로서 고문을 맡고 있었지만 '내조'에 주력했다. 겸허함과 검소함, 근면함으로 시아버지와 남편을 섬겼다. 사실 그 덕분에 정 회장도 마음 편히 그룹 경영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한평생 헌신해온 그녀의 존재감은 더없이 컸다. 그래서일까. 2009년 10월10일 오전 거행된 이 여사의 영결식에서 정 회장은 끝내 눈물을 흘리며 애통했다. 생전 이 여사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정 부회장도 슬픔을 감추지 못하고 눈물을 훔쳤다.
◆ 정 부회장, 어려서부터 밥상머리 교육
현대차그룹 4남매 중 정의선 부회장에 대한 가문의 사랑은 각별했다. 외아들인 데다 장차 그룹을 이끌 재목이라는 이유에서다. 여러 손자들 가운데 밥상머리 교육도 가장 먼저 받았다. 정 부회장은 정 명예회장으로부터 “같이 아침을 먹으면서 남을 배려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 자신을 낮추면서 남을 높이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기본 예절을 배워야 한다”는 말을 숱하게 들었다.
1999년 현대정공(현 현대모비스) 시절 그를 곁에서 지켜본 한 임원은 “공장 직원들과 만날 때는 나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절대 하대하지 않았다”며 “젊은 혈기를 휘두를 만한데도 늘 겸손했다”고 회상했다.
특히 부친 정 회장 앞에서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지난해 9월 방한한 아널드 슈워제네거 당시 캘리포니아 주지사와 정 회장 간 면담 자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정 부회장은 약속 시간 1시간 전부터 호텔 입구에서 정 회장을 기다렸다. 이윽고 정 회장이 도착하자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서너 발자국 떨어져 정 회장을 따랐다.
정 부회장은 모친의 성품을 많이 닮았다. 내성적이지만 우직하고 겸손하며, 남 앞에 나서서 떠드는 것보다는 남의 말을 주로 듣는다. 한번 맺은 인연을 쉽게 저버리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정 부회장은 경복초등학교 4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조현식 한국타이어 사장, 구본상 LIG넥스원 사장과 지금까지 살갑게 지낸다. 지난 7월2~3일 강원도 태백에서 열린 '2011 코리아스피드페스티벌(KSF)'에 참석할 때는 조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동행도 제안했다.
“친구야, 태백에 가자”는 정 부회장의 말 한마디에 조 사장도 흔쾌히 길을 나섰다. 재계 관계자는 “이해 관계가 아닌 오랜 신뢰와 믿음으로 지인들과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며 “사람과 사람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정 부회장의 성품은 집안 어른들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정 부회장은 정주영 명예회장 등 가문의 축하를 받으며 지난 1995년 정지선(정도원 삼표그룹 회장 딸)씨와 화촉을 밝혔다. 이 여사가 그랬듯 이제 현대차그룹의 안살림은 부인 정씨가 묵묵히 책임지고 있다.
◆ 내조에 주력하는 세 자매
정 부회장과 달리 누이 셋은 언론에 등장하지 않는다. 현대가 특유의 보수적인 가풍 때문이다. 그나마 활발한 대외 활동을 보이는 이는 맏딸 정성이 이노션 고문이다. 정 고문은 이화여대 행정학과 졸업 후 선두훈(현 대전 선병원 이사장)씨와 결혼해 내조에 전념하다가 2005년 현대차그룹의 광고대행사 이노션 설립을 통해 경영에 나섰다.
이노션이 전문 경영인 체제여서 정 고문의 행보는 그리 튀지 않지만 현대·기아차의 신차 발표회는 물론 해외 모터쇼에 자주 참가하면서 보폭을 넓혀가고 있다. 그룹 관계자는 “대그룹 회장 딸들이 흔히 취하는 신비주의와는 거리가 먼 수수한 성품”이라며 “요란스럽지 않은 행보로 현대차그룹의 광고 전략을 구상하는 한편 가족 행사도 잘 챙긴다”고 평가했다.
정 회장의 차녀 정명이 현대커머셜 고문도 남편인 정태영 현대카드 사장을 내조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정 사장은 1987년 현대종합상사에 입사한 이후 현대모비스, 기아차를 거쳐 2003년 현대카드 사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파격적인 마케팅으로 현대카드를 4년 만에 상위권 업체로 올려놓는 수완을 발휘했다.
이 과정에서 정 고문의 내조가 큰 힘이 됐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지난 6월14일에는 릫정 사장의 아내릮로서 릫살림의 여왕릮 마사 스튜어트를 극진히 접대하기도 했다. 이날 정 사장은 마사 스튜어트를 서울 여의도 현대카드 본사에 초청해 임직원과 회원들을 대상으로 '슈퍼 토크-당신의 인생을 바꾸라'는 주제의 강연을 가졌다.
강연 후 음식 애호가인 마사 스튜어트에게 한국 전통음식을 소개하는 자리에 정 고문도 합석했다. 마사 스튜어트는 정 고문과의 만남을 사진으로 촬영해 자신의 블로그(@MarthaStewart)에 띄웠다.
두 사람의 만남은 '살림의 달인'과 '내조의 여왕'의 교감이란 점에서 화제를 낳았다. 마사 스튜어트가 요리, 인테리어, 수공예, 원예 등에 조예가 깊은 것처럼 정 고문도 한발 뒤에서 묵묵히 남편을 지원하는 등 '여성'에 방점을 찍은 두 사람의 행적이 비슷한 궤적을 그리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정 회장의 셋째 딸 정윤이 현대해비치호텔앤드리조트 전무도 남편 신성재 현대하이스코 사장을 적극 후원한다. 신 사장이 현대정공 근무 시절 연애 끝에 두 사람은 결혼했다. 특히 신 사장은 올 상반기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30.5% 증가한 1865억원을 기록하는 호실적을 이끌었다.
세간에서는 올 초 김원갑 부회장과의 공동 대표이사 체제에서 단독 대표에 오른 이후 '홀로서기 경영'에 성공했다고 평가했지만 정 전무의 숨은 내조를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이 재계 안팎의 공통된 평가다.
MK리더십 특별 취재팀(이정일·채명석·최일권·김혜원·조슬기나 기자) MKlea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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