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스파이 명월>은 무사히 종영할 수 있을까. 지난 14일 배우 한예슬이 <스파이 명월> 촬영을 거부하고 미국으로 떠난 후 촬영이 불가능해지면서 15일 방송은 스페셜 방송으로 대체됐고 , 16일에는 주연배우 촬영분이 40%도 채 안 되는 분량으로 11회가 방송됐다. 온갖 소동 속에 한예슬은 17일 귀국, <스파이 명월>에 합류할 예정이라고 밝힌 상태다. 하지만 한예슬의 촬영장 이탈은 어쩌면 가벼운 헤프닝에 그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스파이 명월>이 최소한 1,2회라도 방영분을 미리 찍어둘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한예슬이 몇 일동안 촬영에 불참해도 방송은 나갈 수 있었다. 한예슬 역시 촬영 불참의 이유로 열악한 제작 환경을 들었다. 촬영 자체를 거부한 한예슬의 행동은 비판받을 소지가 있지만, 배우가 몇일만 촬영을 거부해도 당장 다음회 방송이 불가능해지는 드라마 제작 시스템이 정상은 아니다.
한국 드라마 제작 시스템의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이순재는 최근 드라마 제작발표회에서 한예슬 “제작자와 배우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시청자와의 약속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왜 이런 문제가 생겼는지 살펴봐야 한다. 미니시리즈를 하다보면 내리 밤을 새야 한다”며 드라마 제작 환경의 문제를 지적했다. SBS <싸인>, SBS <시크릿 가든> 등은 그 날 방영분을 그 날 찍는 제작일정으로 제작진이 최종 편집본을 제대로 검토하지 못해 방송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SBS <무사 백동수>에 출연 중인 유승호와 KBS <공주의 남자>의 홍수현은 교통사고를 당했다. 홍수현은 갈비뼈에 금이 갈 만큼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부상을 견디며 촬영에 참여할 수 밖에 없었다. 홍수현은 갈비뼈에 보호대를 착용하고 드라마를 촬영할 정도였다. 이런 배우들의 행동은 종종 ‘부상 투혼’이라는 말로 포장되기도 하지만, 촉박한 촬영 스케줄을 맞추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다. 최근 방영한 드라마들은 얼마 전 폭우로 비가 왔을 때도 촬영을 강행할 수 밖에 없었다.
촬영 전 준비를 제대로 할 수 없는 환경
촉박한 제작일정에 대한 문제가 제기될 때 나오는 상식적인 의문은 왜 방영 전 미리 많은 분량을 촬영할 수 없느냐에 대한 부분이다. 드라마 업계에서는 오랫동안 사전제작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지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드라마가 넉넉한 시간을 두고 촬영에 들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 드라마 제작사 관계자는 “천천히 촬영하는 감독도 있고 시청자 반응을 보면서 대본을 쓰는 작가도 있지만, 제작사 입장에서는 방송사로부터 편성을 언제 받을지 모르기 때문에 미리 촬영을 여유롭게 해 놓을 수 없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제작사는 일반적으로 드라마 제작비 중 상당부분을 투자를 받는다. 방송사로부터 받는 제작비는 말 그대로 일부다. 제작에 들어간 상황에서 방송사의 편성이 미뤄지거나 좌초되면 위험부담이 커질 수 밖에 없다. 드라마의 원활한 방영을 위해 정상적으로 촬영을 진행할 수 있는 기간은 방영 전 5~6개월 정도다. 하지만 편성 등의 변수로 그 기간을 확보하지 못하는 경우가 상당수다. 이 관계자는 “방송사에서도 검증된 작품을 찾기 때문에 작가, 감독, 배우 등을 고려하다보면 편성 확정이 늦어지고 결국 대본도 별로 없는 상황에서 촬영이 시작된다”고 덧붙였다.
편성이 불확실해지면 작가 역시 방송 시점의 트렌드를 반영하지 못할 수 있어 미리 대본을 탈고하기 어렵다. 제작사 관계자는 “‘쪽대본’을 하고 싶은 작가들은 없다”며 “제작 전에 대본을 탈고할 충분한 시간이 있지만 작가는 작가대로 언제 방송될지 몰라 쓰고 싶어도 못 쓰게 된다”고 말했다. 한 방송사 홍보 관계자는 “사전제작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미리 대본을 완성하고 제작에 들어가도 시청자로부터 너무 일찍 써 두면 급변하는 트렌드를 맞추지 못해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로 MBC <로드 넘버원>은 100% 사전제작제로 만들어졌지만 대중적으로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고, 현재 tvN에서 방영중인 <버디버디> 역시 사전제작 후 지상파 편성이 잡히지 않아 방영이 미뤄졌다. ‘쪽대본’이 작가의 능력문제만은 아닌 것이다. 캐스팅 문제도 무시할 수 없다. 제작사 관계자는 “최근 배우들도 최대한 좋은 작품에 들어가길 원해서 작품 선택을 빨리 하지 않는다”며 “여러 가지 문제와 조건을 살핀 후 캐스팅 확정을 하기 때문에 캐스팅이 막판에 가서야 결정되고 자연스레 촬영도 늦게 시작된다”고 덧붙였다. 편성부터 캐스팅까지, 제작진에게 최대한 급하게 작품을 만들면서도 높은 시청률을 요구하는 모순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작가들이 쪽대본을 쓸 수 밖에 없는 현실
이 모든 난관을 뚫고 드라마 제작에 들어가도 순조로운 촬영은 보장할 수 없다. 한 방송사 홍보 관계자는 “미니시리즈는 1,2회 시청률이 낮으면 대본을 고치게 된다. 촬영 중 대본을 수정하려면 그만큼 시간이 필요하고, 촬영이 늦어지면서 생방송처럼 일정이 흘러갈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 제작사 관계자는 “몇몇 거물급 작가를 제외하고 보통 작가들은 시청률과 배우에 의해 대본을 수정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성공이 담보되지 않은 신인 작가들의 경우 대본 수정은 흔히 있는 일이다”라고 덧붙였다. 또한 인기 배우들은 드라마 촬영 도중 CF나 방송 프로그램 스케줄을 잡기도 한다. 한 드라마 관계자는 “중년 배우들이나 몇몇 배우들은 드라마가 잡히면 다른 스케줄을 전혀 잡지 않는다. 하지만 최근에는 인기 스타의 경우 어쩔 수 없이 드라마를 하면서도 광고나 방송 프로그램 등을 소화하고 영화를 동시에 찍기도 한다. 배우들에게 다른 일정이 생기면 촬영 일정도 계획대로 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스파이명월>은 이런 드라마의 제작현실이 총체적으로 부딪혀 생긴 사건이라 할만하다. 배우는 촬영 스케줄에 스트레스를 느꼈다는 이유로 최악의 선택을 했고, 시청률 부진과 작품에 대한 비판 등으로 작가가 중도에 바뀌기도 했다. 한 드라마 관계자는 “이번 <스파이 명월> 문제는 지금까지의 드라마 제작 환경에서 감독, 작가, 배우 등의 문제가 한꺼번에 터진 경우다. 어느 누구 한 사람이 잘못했다고 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한예슬이 다른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피해를 준 것도 사실이지만, 현재의 제작 시스템 역시 정상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배우 개인의 태도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지만, 이번 사건을 단지 한 배우의 문제로 결론지은 채 덮어서는 안 될 이유이기도 하다.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스파이 명월>에는 여전히 6%대의 시청자들이 보고 있다. 그 시청자들을 위해서라도 특정 배우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에서 나아가 더 제대로 된 제작 시스템을 위한 논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10 아시아 글. 한여울 기자 sixteen@
10 아시아 사진. 채기원 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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