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 이태원 짝퉁시장 '체험취재'
-천만원짜리 가방 30만원, 단속피해 즉석에서 로고 새겨
[아시아경제 박은희 기자, 오주연 기자, 이민아 기자] "이런 가방 말고 더 진짜 같은 건 없어요?"
지난 14일 서울 동대문 의류전문매장. 매대에는 명품 프라다(PRADA)를 연상시키는 '파라데(PARADE)', 샤넬의 기호를 연상시키는 '∞' 장식의 가방 등이 진열돼 있었다. 2만~3만원대인 이 물건들은 그냥 보기에도 '짝퉁' 같았다.
"더 좋은 물건 찾으시는구나? 그럼 이 쪽으로…" 직원이 안내한 곳은 검은 벽사이 한사람 겨우 통과할 틈에 위치한 쪽방이었다. 매장 뒤에 꾸려놓은 창고식 방은 성인 4명이 한쪽 벽만 보고 앉으면 꽉 찰 정도로 좁았다. 필요한 물건을 꺼내오는 창고라고 보기에는 일부러 전시한 것처럼 가방들이 정돈돼 있었다. 곧이어 매장 주인인 듯한 남성이 들어왔다.
동대문서 11년간 짝퉁장사만 했다는 J씨는 '100% 국내 제작' '확실한 A/S' 등을 강조했다. 방에 진열된 제품들은 만일의 단속에 대비해 브랜드 로고만 떼어낸 모조품들이었다. 구매가 이뤄지면 브랜드명과 로고 등을 그 자리에서 새겨준다.
"우리 물건은 정말 좋은 거야. 국내서 한 땀 한 땀 직접 만들었고 가죽이랑 안감까지 정품이랑 거의 똑같아. SA급들은 안감이 달라 이건 면으로 된 거야. 만져봐, 다르지? 이건 A급이라고 해서 파는 건데 나일론이거든"
한참을 침튀기면서 설명하던 J씨는 "지갑과 시계도 보여 달라"고 하자 어디선가 007가방을 들고 왔다. 가방 안에는 정품과 똑같은 모조품들이 30만~50만원대에 판매되고 있었다. 정상가 1000만원을 호가하는 제품들이다.
"지갑은 왜 안 들고 왔냐"고 묻자 J씨는 "한꺼번에는 안 돼. 이거 잘못하면 쇠고랑차! 아무래도 불법이라서 조금씩 가져와야 해"라며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제 입으로 '불법'임을 시인하면서도 십 여 년간 이 일을 반복해왔다는 점이 마치 아슬아슬하게 외줄 타는 곡예사처럼 보였다.
작년 국내 명품 시장 규모는 5조원대. 짝퉁시장도 수조원 대에 이를 것으로 업계는 추정하고 있다. 지난해 관세청에 적발된 짝퉁 상품 규모만 해도 1조5000억원에 이른다. 이태원가 동대문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짝퉁상권'은 단속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점차 더 교묘하게 진화하고 있었다.
같은 날 오후 용산구 이태원. 지하철 역에서 나와 몇 걸음을 채 옮기기도 전에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힙합스타일의 한 청년이 "가방이나 옷 안 보세요?"라는 말을 던진다. 청년을 따라 지하1층 매장에 들어가니 보세가방들이 진열돼 있다.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가게 주인아저씨는 "백화점 조명아래에서 태닝된 진품을 보고 와서 아직 한 번도 태닝이 안 된 우리 제품과 비교하는 건 말이 안 된다"면서 "우리 제품도 쓸수록 색이 짙어진다. 진품과 똑같다"라고 강조했다.
더 보고 오겠다는 인사말을 건네고 건물을 빠져나와 바로 네다섯 걸음을 떼자마자 야구 모자를 쓴 깡마른 청년이 길가에 서서 "가방 안 보세요?"라고 나지막이 말을 건넨다.
그를 따라 이태원 시장 대로변 가게 뒤 내리막길로 한참을 내려가니 재개발 중인 동네의 신축 오피스텔 앞에 멈춰 섰다. 인적이 드문 내리막길과 동네에 들어서자 겁이 덜컥 난다. 청년은 오피스텔 출입문에 비밀번호를 누른 뒤 지하층에 마련된 8평 남짓한 방으로 안내했다.
잠시 뒤 나타난 그는 첫 번째 이태원 매장에서 본 것과 똑같은 제품을 보여주며 22만원을 제시했다. 가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자 "누님, 진짜 이것보다 좋은 건 없어요. 우리 단골들은 다들 한 번 써보면 나 믿고 계속 거래해요"라며 험악하게 인상을 쓴다.
닫힌 공간 안에서 그가 짓는 표정은 긴장된 분위기를 만들었다. 짝퉁 지갑 몇 개를 구매하고 나서야 그 지하조직 같은 방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오는 길 역시 쉽지 않았다. 출입문을 열어주기 전에 그는 좌우로 바깥 동태를 살피며 단속반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오피스텔 출입문을 열어줬다.
어렵게 오피스텔을 빠져나와 대로변으로 나가는 길목. 그와 비슷한 인상의 청년이 "가방은 사셨어요?"라며 말을 걸어온다. 취재차 이동한 이태원역 4번 출구에서 30미터 이내 길목에는 적어도 20명이 넘는 청년들이 행인들의 눈치를 살피며 같은 말을 던지고 있었다.
박은희 인턴기자 lomoreal@
오주연 인턴기자 moon170@
이민아 인턴기자 ma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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