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김은별 기자] 삼성전자, 반올림(반도체노동자의건강과인권지킴이), 가대위(삼성직업병가족대책위원회) 등의 의견을 조율하기로 한 조정위원회가 7개월여만에 조정권고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대부분 반올림의 의견을 수용한 권고안이 나와 협상이 원점으로 돌아갈 위기에 놓였다. 김지형 조정위원장은 23일 법무법인 지평 사무실에서 3개 주체가 모두 모인가운데 기자간담회를 열고 "삼성전자가 1000억원을 기부해 공익법인을 설립하고, 이 법인이 보상 등 절차를 수행하길 권고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삼성측이 권고안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공익법인을 설립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공익법인 이사회에 삼성전자 등 재계 관계자가 전혀 포함되지 않는데다 1000억원을 소진하면 추가 출연이 필요하다는 점, 옴부즈만 시스템을 구성해 삼성전자의 영업기밀 시행 규정을 공익법인이 만들고 이를 시행한다는 것 자체가 경영권 침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조정위가 권고한 공익법인의 발기인은 대한변호사협회, 한국법학교수회, 경실련, 참여연대, 산업보건학회, 한국안전학회, 대한직업환경의학회 등 7곳의 단체로부터 1명씩 추천받아 위촉된다. 발기인은 공익법인 설립 후 공익법인의 이사가 돼 의사결정기관인 이사회를 구성하게 된다. 법인은 조정권고안에서 정한 원칙과 기준을 준수, 보상과 대책과 관련된 사업을 수행한다. 이 공익법인에는 재계 측의 입장을 반영할만한 이사는 한 명도 반영되지 않는다. 삼성전자도 포함되지 않도록 돼 있어 삼성전자는 기부만 할 뿐, 보상 산정 과정에서 관여할 수 없다. 조정위가 잡은 보상범위도 늘어났다. 조정위는 백혈병, 림프종, 다발성골수증, 골수이형성증, 재생불량성 빈혈, 유방암, 뇌종양, 생식질환, 차세대질환, 희귀질환, 희귀암, 난소암 등 12종을 질환 범위로 잡았다. 당초 삼성이 요구했던 질환의 범위보다 질환 범위가 넓어졌다. 보상대상자 역시 '삼성전자(주)의 반도체 및 LCD 사업장에서의 반도체 및 LCD 생산 등 작업공정, 관련 시설의 설치ㆍ정비 및 수리 등 업무에 2011년 1월1일 이전에 종사하기 시작한 근로자로서, 기준에 따라 일정 기간의 최소 근무기간 이상 재직한 후 발병한 사람'을 대상자로 조정위는 권고했다. 이 경우 1차 협력사는 물론이고 2차 협력사까지 보상 대상에 포함될 수 있어 예상보다 범위가 크게 넓어진다. 퇴직 후 최대 잠복기도 최대 14년까지로 잡은 점도 부담이 크다. 정년 연장이 되면 65세에 퇴직을 맞게 되는데, 14년 후인 80세에도 보상을 받을 수 있게 할 경우 '반도체 사업장과 연관이 없는 노인성 질환'의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향후 재발방지대책에 대한 이견도 또다시 생길 것으로 보인다. 조정위는 공익법인이 선정ㆍ위촉하는 3인 이상의 옴부즈만을 구성해 매년 삼성전자의 재해관리 시스템을 확인하도록 권고했다. 옴부즈만은 삼성전자 내부의 재해관리 시스템 운영 상황과 사업장 내 산업안전보건관리 현황 등에 관해 필요한 정보를 삼성전자로부터 매년 정기적으로 제출받아 검토, 평가하는 '종합진단'을 맡는다. 이외에 ▲예방대책사업에 관한 기본계획과 구체적 실행방안의 수립 ▲재해예방을 위한 각종 조사 및 연구활동 ▲삼성전자 사업장에서 사용하는 유해화학물질에 대한 정보공개와 삼성전자의 영업비밀 관리를 위한 구체적 규정 제정, 시행을 위한 제반활동 등도 기타 재해예방대책으로 권고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삼성전자가 협상 초기부터 '영업기밀에 해당하는 것'이라며 공개하기 어렵다고 밝힌 것이라 협상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것으로 보인다. 조정안에 대해 삼성전자는 "오랜 시간의 숙고를 거쳐 권고안을 제안해 준 조정위에 감사드리고 가족의 아픔을 조속히 해결한다는 기본 취지에 입각해 신중히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권고안 내용 중에는 회사가 여러 차례에 걸쳐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밝힌 내용이 포함돼 있어 고민되는 것이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가대위는 "신중하게 검토하겠다"고 말을 아꼈지만 불만스러운 표정이다. 권고안 자체가 공익 법인 설립과 삼성전자에 대한 감시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 피해자들의 보상 문제 등은 소홀한 부분이 없지 않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신속한 보상을 원하고 있는 피해자들의 입장은 고려하지 않은 채 우선 공익 법인을 설립한 뒤 이를 통해 보상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조정위의 권고안은 그동안의 진전된 협상을 다시 원점으로 되돌릴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반올림은 상당히 만족스럽다는 입장이다. 황상기 반올림 교섭 대표는 "자세한 내용은 서류를 면밀히 살핀 후 밝히겠지만 큰 줄기는 상당히 신경을 많이 썼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조정권고안에 이의가 있다면 10일 내에 제기할 수 있다. 수정제안이 있고, 다시 절충할 여지가 있다고 판단되면 후속 조정절차가 진행된다. 조정위는 지난 7개월 동안 3개 주체를 대상으로 의견을 청취한 뒤 이번 조정 권고안을 내 놓았다. 하지만 한쪽의 일방적인 의견만을 반영해 마땅히 거쳐야 할 조정 작업을 조정위가 맡는 대신 반올림을 비롯한 시민단체의 의견만 적극 반영해 나머지 협상 주체에게 협상을 강요한다는 비난도 일고 있다. 김은별 기자 silverstar@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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