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라쇼몽'의 한장면
신문기자가 될 사람이면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의 소설 ‘라쇼몽’, 혹은 구로자와 아키라의 동명의 영화를 꼭 봐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한 남자의 죽음에 관해, 현장에 있던 사람들의 서로 다른 증언들. 그 증언들은 자신의 입장에서 불리한 것을 빼버리고 이야기를 꿰맞춘 것이다. 과연 살인자는 누구인가에 대한 궁금증에서 스토리는 출발하지만, 급박했던 당시의 상황으로 들어갈 수록 비굴하고 사악한 인간 군상이 드러나면서, 초점이 바뀐다. 등장인물 저마다의 나약함과 탐욕스러움이 조금씩 거들어 사건을 만들어낸 것을 알게 된다. 이 작품은 입장과 관점이 진실을 왜곡하는 현상을 다룬 고전이다.입장(立場)이라는 말은 ‘서 있는 자리’라는 뜻이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느냐에 따라, 관점이 달라진다. 인간은 자기의 ‘입장’에서 볼 수 밖에 없는 한계를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다. 기자의 설득력있는 관점, 혹은 객관적인 견해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이 태생적 한계를 인식하고 뛰어넘는 일이다. 인간이 자기의 입장이 아닌 타인의 입장에서 보고 생각할 수 있는가. 자기의 견해를 넘어서서 다채로운 관점에 열려 있고, 그것을 통합하는 조망을 할 수가 있는가. 이 문제이다.자기의 기사 속에 하나의 뷰 만이 아닌 다양한 뷰가 공정한 기회를 얻을 수 있는가. 라쇼몽 속의 증언들은 다양한 뷰가 왜, 그리고 어떻게 진실에 접근하는지를 웅변한다. 사회면의 1단 짜리 기사 하나에도, ‘라쇼몽 현상’은 존재한다. 그 기사의 스토리에서 소외된 어떤 발언과 사실들이 침묵의 마스크를 쓴 채 고통스러워 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늘 긴장해야 한다. 많은 경우 진실은, 주도적인 발언 속에 모두 들어있는 게 아니라, 흩어진 침묵 속에 파편으로 숨어있을 수 있다. 라쇼몽의 관객들은 이 ‘뷰’들의 진위를 꿰뚫고 정리하고 조망하는 안목을 지니게 된다.
애니메이션 ‘빨간 모자의 진실’의 한장면
2006년에 개봉된 애니메이션 ‘빨간 모자의 진실’(코리 에드워즈 감독)은 라쇼몽의 구성을 빼닮았다. 의심할 틈도 없이 무의식 속에 심어진, 오래된 동화의 일방적 진실을 전복(顚覆)하려는 취지도 가상하다. 다만 비평가들의 비웃음을 산 것은, 전복하려는 취지만 있었지, 뒤집은 뒤에 무엇을 말할 것인가에 대한 준비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할 말이 없으니, 서둘러 싱거운 깜짝쇼로 바꿔버린다. 딱하게도, 대담하게 뒤튼 자기의 아이디어의 기세를 스스로 수습하지 못해, 설사를 해버린 꼴이다. 하지만, 우린 이 영화에서 멋진 논술선생을 하나 만났다고 생각해도 좋다. 알다시피, 빨간 모자 소녀는 숲 속의 할머니 댁에 심부름을 갔다가 할머니를 이미 잡아먹은 늑대에게 잡아 먹힌다. 영화는 늑대가 할머니 분장을 하고 빨간 모자를 속이는 그 장면에 태클을 건다. 자, 이쯤에서 화면을 ‘일시 정지’ 시켜놓고, 한번 생각해보잔 말이다. (1)늑대는 과연 나쁠까. (2)할머니는 과연 나약할까 (3)빨간 모자는 주의력이 모자랐을까 (4)늑대가 과연 속임수를 썼을까. 터무니없어 보이는 이 질문들이 이야기를 폭발시킨다.영화의 원제목은 hoodwinked이다. 수건을 눈을 가리는 후드윙크에 ed가 붙어있다. 눈속임에 당하다,라는 의미다. 늑대에게 빨간 모자가 결국 속았다. 진짤까? 진짜 속았을까? 영화는 이 시비에서 출발한다. 앞에서 내놓은 네 개의 질문을 뒤집기의 축으로 삼는다. (1)늑대는 ‘굿맨’이다. (2)할머니는 강하다. 그리고 살아있었다. (3)빨간 모자는 용감하고 지혜롭다. (4)빨간 모자를 잡아먹으려한 게 아니다. 상식을 전복하는 전략은 이렇게 섰다. 다시 각본은 정교해진다. (1)늑대는 취재를 위해 온갖 위험을 감수하는 프로페셔널한 기자이다. (늑대를 그 형상 만으로 악의 화신으로 모는 건 편견이다. 이 대목에서 늑대=기자 라는 등식에 대해선, 민망한 기분이 없지 않다.)(2)할머니는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는 원더우먼이다.(노인을 약골로만 몰아 무기력하다고 표현하는 것도 편견이다.) (3)빨간 모자는 숲속의 평화를 지키는 정의의 사자이다.(아이를 어리석고 순진하다고만 말하는 것도 편견이다.) (4)속임수를 쓰는 자는 따로 있었다. (가장 순하게 보이는 것이 악당일 수도 있다.)늑대는 할머니와 빨간 모자의 기사를 쓰기 위해 할머니 댁에 먼저 가 있었다. 할머니는 그 시각에 산 속에서 열리는 익스트림 스포츠 대회에 출전하고 있었다. 빨간 모자는 ‘비전(秘傳) 요리법 책’을 할머니집에 보관하러 갔다. 그 문제의 자리에는 동화에는 없던 ‘도끼맨’이 느닷없이 등장한다. 이 ‘사건’에 대한 수사가 시작된다. (그런데 이 수사의 목적이 무엇인지가 명쾌하지 않다. 빨간 모자를 잡아먹으려 한 늑대의 혐의를 밝히기 위해서였다면, 빨간 모자와 도끼맨, 할머니를 모두 묶은 건 무엇 때문일까.) 곰경찰관과 개구리형사가 나온다. 곰경찰관은 일면적 사고, 단선형의 사고의 대표 주자다. 개구리형사는 사건을 통념으로 단정짓지 않는다. 개구리형사가 현장에 있던 각자에게 발언기회를 줌으로써 사건은 재구성된다. 늑대의 주장과, 할머니의 고백, 그리고 빨간 모자의 진술과 도끼맨의 사연. 이 네 존재의 발언들은 각자 자기 입장에서 사건을 기술하는 것이기는 하되, 아귀가 딱 맞다. 그렇다면 네 명 모두에게는 이렇다할 죄가 없다. 이제 개구리형사는, 4명이 움직이는 자리에 늘 있었던 토끼라는 존재를 의심한다. 아니나 다를까 토끼는 근육질 스키선수들을 거느린 악당 두목이었다. 수사는 갑자기 ‘요리책 도둑’ 색출로 바뀐 듯 하다. 스토리의 우왕좌왕은, 속도감 있는 애니메이션의 눈요기로 달랠 수 있으리라. 아주 소박한 구성의 빨간 모자 이야기가, 익스트림 스포츠, 저널리즘, 무좀광고와 수사극 모티프를 집어넣음으로, 모던하고 속도감있는 퓨전이 됐다. 이 논술기법을 주목하라.
영화 ‘12인의 노한 사람들’ 포스터
2006년의 빨간 모자는 진실의 다면성을 포착하려 애쓰는 건 아니다. 진실 따위엔 별로 신경쓰는 눈치도 아니다. 낯익은 스토리의 굳은 신화를, 다양한 관점으로 파괴함으로써 ‘낯설게 하기’의 즐거움을 누리려는 태도에 가깝다. 이 영화에 비한다면 1957년에 나온 시드니 루멧 감독의 영화 ‘12인의 노한 사람들’은 정통 논술의 힘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한 소년이 아버지를 살해했다. 증거도 있고 증인도 있으며 정황도 거의 확실하다. 12명의 배심원이 모여, 이 소년의 평결을 논의한다. 사실 논의하고 말 것도 없어 보였다. 소년이 범행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는 아무 것도 없어 보였다. 12명의 배심원은 서둘러 소년의 유죄를 결정짓고, 급하게 제쳐놓고 온 자기 생업을 위해 떠나려고 한다. 모두가 ‘길티(GUILTY)'를 외치는데 한 사람이 문득 브레이크를 건다. “유죄가 아니라는 건 아니지만...한 사람의 목숨이 달린 결정인데 이렇게 쉽게 내서야 되겠습니까.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의견이라도 얘기해봅시다.”다른 사람들은 짜증스럽게 이 제안자를 바라본다. 해봤자 뻔한 얘기를 뭐하러 다시 한단 말인가. 이미 법정에서 다 듣지 않았는가. 사방에서 궁시렁거린다. “범행 현장에서 소년이 가지고 있던 칼이 발견되었소. 소년은 그 칼을 얼마 전 동네 가게에서 샀다고 말했소. 더군다나 그 칼은 희귀한 칼이어서 다른 데서 구하기도 어려운 것이라고 하지 않았소?” 누군가가 마지못해 하는 말투로, 범행용 칼에 대한 얘기를 꺼낸다. 그리고 그런 주장을 강화하기 위해 현장에서 발견된 칼을 가져오라고 말한다. “바로 이 칼이오. 소년이 사용한 희귀한 칼이란 말이오.” 그때, 토론을 제안했던 사람이 주머니에서 범행용 칼과 똑같은 칼을 꺼낸다. “제가 그 동네의 가게에서 산 칼입니다. 이건 희귀한 게 아니고 흔하디 흔한 칼이라고 합디다.” 주위가 소란해졌다.이렇게 논의는 시작된다. 전철 창문으로 범행 장면을 목격했다는 여자 증인은 눈이 몹시 나빠 순간적으로 지나간 그 장면을 보는 것이 불가능했을 거라는 주장이 나오고, 아래층 복도에서 “죽일 거야”라는 목소리를 들었다는 목격자 할아버지는 다리를 절고 있어서 그 짧은 시각에 복도까지 이동할 수 없었을 거라는 의견이 나오고, 아들이 아버지를 찔렀다고 말해지는 각도가 정상적인 방향이 아니라는 얘기도 나온다. 확고할 거라고 처음에는 믿었던 사건이, 의심을 하기 시작하자 매우 허술한 증거와 논리에 의해 구성되어 있음을 좌중들은 점차 깨닫는다. 차츰 배심원들은 무죄 쪽에 손을 들기 시작한다.영화가 시작하면서 끝날 동안, 장소의 변화도 거의 없고 인물의 변화도 거의 없는, 단조로운 스토리 라인 속에서도 전혀 지루함을 느낄 수 없을 만큼 팽팽한 논리들의 긴장이 영화의 생기로 작동한다. 고정관념과 주도적 의견, 혹은 상식을 뒤집는 ‘이성’의 힘. 문제를 가리는 편견들을 걷어내는 집요하고 성실한 안목들. 곧 우리가 ‘생각하고 표현하는 기술’이라고 말하는 논술이 갖춰야할 핵심 미덕을 이렇게 울림있게 보여주는 영화가 또 있었을까. 2006년 빨간 모자의 전복(顚覆)과 1957년 12인의 노한 사람이 펼치는 재고(再考). 진실은 다면체라는 진실. 뜻밖에 영화는 훌륭한 기자의 교과서이다.이상국 편집부장·디지털에디터 isomis@asiae.co.kr<ⓒ세계를 보는 창 경제를 보는 눈,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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