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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오늘] 병오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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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오늘] 병오박해 허진석 시인·한국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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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은 한국천주교회에서 정한 ‘순교자 성월’이다. 그리고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이다. 역사를 살피면, 1846년 6월 5일 김대건 신부의 체포를 계기로 시작된 병오박해가 종결된 날이다. 김 신부는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3일 후 현석문이, 20일에는 임치백과 남경문, 한이형, 이간난, 우술임, 김임이, 정철염이 목숨을 잃었다. ‘승정원일기’는 마지막 일곱 명이 맞아죽었다고 기록했다. 그들이 장살형(杖殺刑)을 선고받았지만, 모진 매를 맞고도 목숨이 붙어있던 사람들은 교수형으로 숨을 끊었다는 기록도 있다.


한국천주교는 이승훈이 1784년에 베이징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신자가 되면서 시작되었다. 서양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스스로 복음을 받아들인 특별한 역사다. 하지만 신앙의 자유를 누리기까지 100여 년에 걸쳐 순교로 점철된 죽음의 행진을 면하지는 못했다. 신유박해(1801년) 때 서울에서만 300여 명이 희생됐다. 기해박해(1839년) 때 참수된 신자는 70명이요, 매를 맞거나 옥중에서 병사한 신자도 60명 이상이다. 병인박해(1866년)의 순교자는 8000~1만 명으로 조선 전체 신자의 절반에 이르렀다.


기해박해 때 순교한 정하상은 죽음을 앞두고 박해를 주도한 우의정 이지연에게 보내는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쓴다. 복음의 이치와 신앙의 자유를 역설한 글이다. 믿는 사람의 결기가 선명하거니와 참혹함 또한 외면하기 어렵다. “성교(聖敎)를 믿는 사람들은 우리 임금의 자식이 아니란 말입니까? 옥중에서 죽어가고 성문 바깥에서 처형되는 것이 끊이질 않아 피눈물은 도랑을 이루었고, 통곡이 하늘에 울리고 있습니다.”정하상은 곤장을 무수히 맞고 주뢰(周牢)형을 당했다. ‘술재상서 정보록일기(述宰相書 丁保祿日記)’는 “두 넓적다리와 살갗은 모두 벗겨져 떨어져 나가고 뼈가 드러났다. 피는 용솟음쳐 땅으로 흘러들었지만 얼굴빛은 평소와 다름없었다”고 기록했다.


우리는 조선이 천주교를 박해한 이유를 ‘조상제사 거부’라고 단순히 생각한다. 조상제사 거부는 유교 국가의 근본 질서, 즉 왕과 권력 구조의 절대성에 대한 거부를 함축한다. 그래서 천주교의 교리는 조선 체제의 정당성을 해체할 수도 있는 폭약을 간직했다. 사람은 누구나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라는 의식은 계급에 대한 도전이다. 약자에 대한 착취와 폭력을 제어하지 않는 제도와 관행에 짓눌려 살다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정의와 평등, 사랑의 가르침은 혁명을 예고하고 있다. 조선 기득권층은 분노와 공포를 함께 느꼈을 것이다.


천주교 박해의 역사는 1886년 6월 4일 조불수호조약(朝佛修好條約)과 더불어 종언을 고한다. 프랑스는 조약 전문 제9조 2항에 ‘교회(敎誨)’를 명기함으로써 포교의 자유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승훈의 세례로부터 235년, 김대건 신부의 순교로부터 173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도록 천주교의 사명은 미완으로 남아 있다. 과잉과 결핍, 권력과 민중 사이의 단층은 변함없이 선명하다. 변화와 개혁에 대한 열망은 언제나 시간의 수레바퀴를 붙들어야만 지속 가능한 기득권의 저항에 부딪친다. 그리하여 박해는 계속된다. 그 주체이자 도구는 정치와 미디어, 법과 제도를 적용하는 대상과 방식의 차별, 마타도어, 가짜뉴스와 같은 것들이다.



허진석 시인·한국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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