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풍경을 넘어 '기억의 지형'으로
관계와 기억을 선으로 엮는 작업
노화랑서 3월5일까지
도시는 늘 완성된 풍경처럼 보이지만, 실은 수많은 시간과 감정이 덧대어진 미완의 집합체다. 인사동 노화랑에서 열린 김란의 첫 개인전 '드로우 백(Throw Back)'은 그 사실을 '선'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조형 언어로 끈질기게 증명한다.
멀리서 마주한 화면은 익숙한 도시의 윤곽을 닮았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서면 도시는 더 이상 평면적 풍경이 아니다. 실오라기처럼 가느다란 선들이 수십 차례 겹쳐 쌓이며 화면에 밀도와 리듬을 만든다. 이 반복된 선들은 도시를 이루는 건물이나 도로가 아니라, 그 위를 지나간 시간과 기억의 흔적에 가깝다.
김란의 작업은 도시를 '기억의 축적 장소'로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 전주 한옥마을, 덕수궁, 수원화성, 대구 이월드 같은 장소들은 작가 개인의 경험을 통과해 다시 배치된다. 인물은 등장하지 않지만, 빛의 배열과 건물의 밀도는 그곳을 스쳐간 삶의 흔적을 또렷하게 남긴다. 특히 공중에서 내려다본 버드뷰 시점은 과거와 현재가 한 화면에 공존하도록 만든다. 도시를 내려다보는 시선은 곧, 기억을 한 발짝 떨어져 바라보려는 태도에 가깝다.
수십 차례 반복된 선들이 만들어내는 밀도와 리듬은 감각을 압도한다. 이 선들은 단순한 조형 요소가 아니다. 얽히고 겹친 선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그 안에서 발생한 감정의 흔적을 은유한다. 도시의 풍경은 곧 관계의 지도이자, 위로의 메타포가 된다.
작업 방식은 수행에 가깝다. 캔버스에 스케치한 뒤 모르타르 미디엄과 아크릴을 혼합해 채색하고, 짤주머니에 구멍을 내 물감을 실처럼 짜 올린다. 한 번으로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열 번, 스무 번 겹쳐진 선이 화면을 채운다. 이 반복은 시간을 통과하는 과정에 가깝다. 푸른색과 붉은색, 모노톤의 색층은 하루의 시간대처럼 미묘하게 다른 정서를 불러낸다.
전시에 등장하는 장소들은 전주 한옥마을, 덕수궁, 수원화성, 대구 이월드 등 작가의 기억이 깃든 공간들이다. 특히 한옥의 기와지붕 곡선은 김란에게 중요한 출발점이었다. 얇은 실처럼 느껴지는 그 곡선에서 지금의 선 작업이 시작됐다. 전주 한옥마을을 배경으로 한 작품에는 친구들과의 여행, 한복을 입고 거닐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겹쳐 있다. 개인의 추억은 선을 통해 보편적인 정서로 확장된다.
전시는 공간 구성에서도 작가의 변화를 드러낸다. 1층에는 최근 작업들이, 2층에는 상대적으로 초기의 작품들이 놓였다. 선을 과감하게 분출하던 시기에서, 점차 밀도를 조율하며 화면을 다져가는 흐름이 자연스럽게 읽힌다. 인사동 노화랑의 노세환 대표가 김란의 작업을 "10년 가까운 축적의 결과"로 바라본 이유도 이 지점에 닿아 있다. 첫 개인전이라는 형식은 단기간의 실험이 아니라, 그 시간 위에서 선택된 지점에 가깝다.
흥미로운 점은 작가가 직접 가보지 못한 도시들이다. 뉴욕, 런던, 파리 같은 장소들은 실제 경험보다 오히려 더 강렬한 색과 선으로 채워진다. 미디어를 통해 축적된 이미지와 상상이 또 다른 형태의 기억으로 작동한다. 현실의 기억과 상상의 기억이 같은 밀도로 취급되는 순간, 도시라는 주제는 개인사를 넘어 보편적 감각으로 확장된다.
'드로우 백'은 도시를 그린 전시이지만, 실은 각자의 기억을 호출하는 장치에 가깝다. 누군가는 화면 속 남산에서 자신의 퇴근길을 떠올리고, 누군가는 한옥의 곡선에서 오래된 여행의 감각을 불러낸다. 작품 앞에 오래 머무는 시간, 각자의 기억이 조용히 겹쳐지는 순간이 이 전시의 핵심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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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은 얇고, 반복은 집요하다. 그 결과 화면은 화려하기보다 단단하다. 도시의 시간을 직조한다는 말이 과장이 아닌 이유다. 이 첫 개인전은 김란이라는 작가가 앞으로 어디까지 이 선을 밀고 갈 수 있을지를 예고하는 출발점이다. 전시는 3월5일까지.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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