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반출·망 사용료·자동차 안전기준까지 요구 확대
한미 통상 협상추 '세율→제도' 이동
미국이 대(對)한국 통상 현안의 초점을 관세에서 규제, 즉 비관세장벽으로 옮기며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단순한 세율 조정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제도와 규제 자체를 손보라는 요구가 이어지면서 한미 통상 협상의 무게추가 관세표에서 법·제도 영역으로 이동하는 양상이다.
16일 통상가에 따르면 현재 미국이 가장 문제 삼는 분야는 디지털 규제다. 고정밀 지도 데이터의 해외 반출 제한이 대표적이다. 미국 측은 자국 플랫폼 기업이 지도 서비스를 고도화하는 데 필수적인 데이터 접근이 막혀 있다고 보고 규제 완화를 요구해 왔다.
여기에 망 사용료 도입 논의와 온라인 플랫폼 규제 입법 움직임 역시 미국 정보기술 기업에 불리한 장치로 작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데이터 국외 이전 제한과 클라우드 서버 현지화 규정, 개인정보 이전 절차 역시 글로벌 서비스 운영을 제약하는 장벽이라는 문제 제기가 반복된다.
자동차 분야도 미국 요구가 집중되는 영역이다. 미국 연방 자동차 안전기준(FMVSS)을 충족한 차량에 대해 한국의 별도 안전·환경 기준을 추가로 적용하는 방식이 사실상의 인증 장벽이라는 주장이다. 특히 연간 5만대로 설정된 미국산 차량 수입 상한을 폐지해야 한다는 요구는 협상 테이블에서 지속적으로 언급돼 왔다. 미국은 관세보다 인증과 기준이 더 큰 시장 진입 장벽이라고 보는 셈이다.
농식품과 의약·의료기기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농산물 위생·검역 절차와 통관 기간, 검사 항목 확대가 수입 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지적과 함께 의약품·의료기기 허가 기간과 자료 제출 방식이 복잡하다는 문제 제기가 반복되고 있다. 화학물질 등록·평가 제도와 환경·에너지 효율 기준, 탄소 배출 관련 규정도 미국 측이 꾸준히 거론해 온 사안이다.
서비스와 투자 규제 역시 미국이 비관세장벽 범주에 포함시키는 항목이다. 방송·미디어 분야 외국인 지분 제한, 일부 전문 서비스 시장 진입 규정, 공공조달 절차의 국내 기업 우대 구조 등도 미국 무역대표부(USTR) 보고서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된다. 온라인 콘텐츠와 지식재산권 보호 체계, 저작권 단속 방식 또한 통상 이슈로 분류된다.
이 같은 요구가 단순한 의견 제시에 그치지 않는 이유는 관세 변수와 맞물려 제기되기 때문이다. 미국이 관세 재인상 가능성을 시사하는 국면에서 규제 완화 요구를 동시에 내놓을 경우 협상 지렛대는 배가된다. 우리 정부로서는 소비자 보호와 데이터 보안, 공정 경쟁이라는 국내 정책 목표와 통상 압박 사이에서 선택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현재 한미 통상 당국자들은 관세·비관세 이슈 전반을 놓고 잇따라 접촉을 이어가고 있다.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은 지난 11일 릭 스위처 미국 USTR 부대표와 약 1시간 30분가량 비관세장벽 현안을 논의했다. 양측은 지난해 11월 한미정상회담 공동 설명자료(조인트 팩트시트)에 포함된 비관세장벽 개선 이행 현황과 향후 계획을 공유하면서, 디지털·자동차 분야 비관세 장벽 해소 내용 등을 집중적으로 협의했다는 설명이다. 여 본부장은 "생산적으로 논의를 해 나가자"고 언급하며 향후 협의 지속 의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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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우리 정부는 국내 규제가 공익 목적에 기반하며 국제 규범 범위 내에서 운영되고 있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다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공동위원회 등 공식 협의 채널을 통해 조정 가능한 사안은 검토하겠다는 기조다. 통상가에서는 통상 협상의 초점이 관세율이 아닌 규제로 서서히 이동하면서 비관세장벽 문제가 상시 의제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커졌다고 보고 있다. 관세 협상이 숫자 조정이라면, 규제 협상은 법 개정과 정책 변경이 수반되는 만큼 난도가 높다는 지적이다.
세종=강나훔 기자 nahu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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