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년 소련 붕괴 냉전종식 계기
美 신자유주의 보편 이념으로
유럽 극우파와 트럼프 등장
세계의 질서 다시 변화 시기
![[최준영의 월드+]세계화의 종말과 새로운 시작](https://cphoto.asiae.co.kr/listimglink/1/2020011010510690196_1578621067.jpg)
한 해가 저물고 있다. 2024년은 유달리 일이 많았던 해처럼 느껴진다. 여러 국가에서 선거가 치러졌고, 그 결과 많은 것이 바뀌었다. 올해는 마무리될 것 같은 전쟁은 계속되고 있고, 더 많은 지역이 불안해지고 있다. 세상이 뭔가 안 좋은 경로로 접어들었고 희망보다는 우울함과 걱정스러움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가득하다.
사람을 비롯한 생명체에는 수명이 있다. 생명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무심히 흘러가는 시간은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만든 질서와 체계도 수명이 있다. 지난 100여년을 돌이켜보면 국제적인 질서의 수명은 대략 40년으로 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1947년 본격적으로 시작된 미국과 소련의 냉전은 1991년 소련의 붕괴로 막을 내렸다. 44년 만의 일이었다. 1978년 문화대혁명의 잔해 속에 시작된 중국의 개혁개방 역시 대략 40년 정도 진행되었다. 지금도 중국은 여전히 개혁개방을 지속하고 있다고 표방하지만 2018년 미국과의 무역분쟁이 본격화되면서 다른 경로로 접어들었다는 것은 명확해진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지금 사는 시대는 1991년 냉전의 종식과 더불어 33년 지속되었다. 이 시기를 다양하게 명명할 수 있겠지만 주요한 흐름을 고려해보면 세계화 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가 하나로 엮여서 긴밀하게 움직이는 모습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세계화라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지구 반대편에서 원료와 부품을 가져와서 가공하여 물건을 만들어 다시 지구 반대편으로 보내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고 저렴하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과 좀 다르다. 상식과 다른 이런 시스템은 역사적으로 드물게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람의 생각, 원활한 정보의 흐름 그리고 안정적이고 저렴한 물류라는 세 가지 요소가 동시에 나타날 때 세계화는 등장한다. 세계화를 떠받치는 이런 요소 가운데 하나라도 붕괴한다면 세계화는 막을 내리게 된다.
첫 번째 세계화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진행되었다. 나폴레옹 전쟁의 후유증이 처리되고 금본위제가 도입되었으며, 중상주의 대신 비교우위론에 입각한 자유무역이 대두되었다. 대서양 해저에는 전신케이블이 깔려 세계를 실시간으로 연결하기 시작했으며, 증기선과 수에즈 운하가 해상 물류를 안정적이고 저렴하게 만들었다. 특정 지역과 땅에 묶여있던 사람들은 기회를 찾아 이동하기 시작했다. 여권도 비자도 필요 없던 시절이었다. 가난한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부유한 아르헨티나로 돈 벌러 떠난 엄마를 찾는 모험을 경험하는 마르코 이야기인 ‘엄마 찾아 삼만리’는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모두가 만족스럽게 느끼고 미래는 오늘보다 더 밝을 것이라고 확신하던 첫 번째 세계화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하루아침에 막을 내렸다. 세계화라는 체제를 붕괴시켜 이득을 볼 세력은 아무도 없었지만 그런 일이 벌어졌다.
두 번째 세계화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과 유럽, 그리고 아시아의 일부 지역을 중심으로 조심스럽게 시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44년 미국 브레튼우즈에 모인 연합국의 대표들에게 미국은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전쟁 이후 모두가 관세를 낮추고 환율을 마음대로 조작하지 않는다면 유일하게 남아있는 구매력 있는 시장인 미국시장을 개방하겠다는 것이었다. 패전국으로부터 막대한 배상금을 받아내는 형태로는 또 다른 불안과 전쟁을 가져올 뿐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 제안은 세계를 바꿔놓았다. 금에 연동된 달러를 축으로 하는 새로운 체계가 등장한 것이다. 미 해군이 안전을 보장하는 바다를 통한 자유로운 무역은 폐허로 변했던 유럽과 일본을 빠르게 복구할 수 있도록 해주었으며, 달러에 고정된 환율은 예측 가능성을 높여주었다.
19세기 후반의 세계화와 달리 이 시기의 세계화는 자본과 사람의 이동은 자유롭지 못했다. 물건만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이 허용된 시기였다. 20년 동안 유지되던 전후 복구의 황금기는 1970년대 초반 붕괴하였다. 미국은 달러를 금으로 바꿔주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저렴했던 원유는 하루에 4배씩 가격이 인상되었다. 인플레이션이 찾아왔고 세계를 이끌던 미국은 베트남에서 패배하고 철수했다.
1980년대 초반 레이건 대통령은 패배와 인플레이션 속에서 무너지던 미국을 되살리기 위해 1930년대 이후 지속되던 뉴딜 체계를 붕괴시키고 시장이라는 존재를 부각했다. 보이는 손 역할을 했던 정부는 다시 무대 뒤편의 심판으로 위치를 변경했다. 많은 것이 바뀌고 무너지는 혼란의 시기에서 미국은 위기를 탈출했고, 소련은 무너졌다. 그리고 우리가 익숙하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세 번째 세계화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경쟁자가 없는 유일 패권국의 이데올로기인 신자유주의는 보편적 이념으로 받아들였다. 인터넷은 세계를 하나로 단단하게 묶어놓기 시작했다. 거대한 컨테이너선들은 해상물류의 비용을 다시 한번 파격적으로 낮추면서 세계화를 완성했다. 평평해진 세계에서 기업과 개인들은 과거와 비교해 훨씬 더 많은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시장은 넓어지고 노동력의 공급은 증가하였다. 경기가 좋아지면 물가가 오르던 시대는 막을 내렸다.
대한민국은 1960년대 이후 점점 넓어지는 세계화라는 기회의 문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신생국 대부분이 수입대체공업화라는 소극적 산업화 전략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선진국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공산품 수출에 도전했다. 피와 땀, 그리고 의지와 운이 결합하면서 경제는 성장했다. 냉전 종식을 전후해 대한민국의 기업들은 이전까지 외면받던 중국을 비롯한 많은 지역에 도전적으로 진출했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지만, 기반을 선점할 수 있었고, 이들 국가의 성장과 함께 도약했다. 기업들은 대규모 투자를 신속하게 결정·집행하면서 시장을 확보했다. 특정 국가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세계 시장을 목표로 한 규모의 경제를 달성할 수 있는 스케일의 공장들을 건설했다. 냉전 종식 이후 새롭게 시작된 세계화의 물결을 대한민국과 대한민국의 기업들은 가장 잘 활용했고, 그 결과 우리는 명실상부한 선진국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연하고 안정적으로 보이던 이런 흐름은 점차 변화하고 있다. 세계화의 시대에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한 많은 국가와 국민들은 변화를 요구하기 시작했고 이것이 유럽에서는 극우파의 부상으로, 미국에서는 트럼프의 등장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는 일회성이 아니다. 세계의 질서가 다시 변화하기 시작했고, 익숙한 것은 사라지고 있다. 좋든 나쁘든 세상은 변화하기 시작했고,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2024년 연말 우리는 막연한 과거로의 회귀를 기대하기보다는 두렵지만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과거의 행복했던 기억을 잊고, 눈앞의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다시 고군분투해야 할 시기가 도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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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영 법무법인 율촌 전문위원(글로벌 법률·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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