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유지태 인터뷰
디즈니+ '비질란테' 조헌役
좌우로 갈린 사회…사적 복수 '대리만족'
"칸·오스카 휩쓴 영화인들, 하청업자 안돼"
"나 사랑하니?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헤어지자."(영화 '봄날은 간다'中) 배우 유지태(47)는 오랜 시간 청춘의 얼굴이었다. 이별을 고하는 연인에게 순수하게 "내가 잘할게"를 외치는 더벅머리 청년에게 우리는 뜨겁게 열광했다. 그는 영화 '동감'(2000) '봄날은 간다'(2001) '올드보이'(2003) 등 한국영화에서 태동한 '무비스타'다. 업계에서는 '신사'라 불린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법에 모순이 있어도 옳은 길로 가겠다는 신념을 지닌 괴물 형사로 돌아왔다.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유지태를 만났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디즈니+(플러스) 시리즈 '비질란테'(감독 최정열) 공개를 마친 후 나선 인터뷰였다. 넓은 어깨가 한눈에 들어왔다. 검은색 후드티로도 가릴 수 없는 거대한 덩치였다. 큰 키에 넓은 어깨, 묵직한 저음까지 강렬했다.
이내 그의 앞에 놓인 터질 듯 빵빵한 장지갑이 눈에 들어왔다. (지갑에서 연식이 느껴졌다) 그 안에 뭐가 들어있냐고 묻자 "돈은 없다"며 활짝 웃었다. 반달눈으로 환하게 웃자 아이 같은 얼굴이 불쑥 나왔다.
"모순적인 한국사회, 사적 복수가 가려운 곳 긁어"
'비질란테'는 구멍 난 법을 대신해 돈과 권력을 이용해 법망을 피해 간 범죄자들을 직접 심판하며 자신만의 정의를 보여주는 비질란테(남주혁 분)의 모습을 통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비질란테의 행동은 정의로운가, 범죄인가. 악(惡)이 난무하는 세상이 만들어낸 다크 히어로를 통해 법과 정의에 대해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본다.
유지태는 "다크 히어로물은 사회적 화두를 던지기 어렵고, 강한 인상을 주기 어려운데 '비질란테'는 사회 부조리와 한국사회의 모순 등 가려운 곳을 잘 긁어주지 않았나. 현실적이고 사실적으로만 조명했다면 어둡고 재미없을 테지만, 액션 장르로 잘 풀어내면서 접근할 수 있는 화두를 흥미롭게 던졌다. 캐릭터에 집중하면서 서사도 잘 보여주는 기회가 될 거라고 보고 접근했다"고 말했다.
기존의 다크 히어로물과 다르다고 힘주어 말했다. 유지태는 "고전 히어로물인 홍길동, 배트맨은 현실적이고 동떨어진 느낌이 있었지만, '비질란테'는 우리 사회를 고스란히 담으면서 쾌감을 주는 콘텐츠라고 본다. 팀 버튼이 연출한 '배트맨'은 만화 같다. 이후 크리스토퍼 놀런의 '조커'는 완벽히 현실적인 사람이다. 조커에 집중해 연민을 이끌어 호감을 준다. 땅에 발 디딘 히어로물로서 공감을 자아낸다"고 차별점을 꼽았다.
최근 사적 복수, 사적 단죄를 다룬 콘텐츠가 쏟아져나오고 있다. 이는 '비질란테'를 관통하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상을 묻자 '교수님' 모드로 차분하게, 쉬지 않고 말을 이었다.
"우리 한국사회가 좌우로 극명하게 갈려있죠. 이상하게 섞여 있는 듯이 분리돼 있어요. 제로섬 게임을 하고 있고, 흑백논리가 유난히 짙죠. 그러다 보니 마녀사냥을 하기도 좋고. 일련의 사건을 통해 너무나 많은 모순과 불합리가 섞여 있는 사회라는 걸 느끼죠. 대중은 현실에서 피로를 느끼고 있어요. '비질란테'가 그런 부분을 조명하면서 대중성을 갖추지 않았나."
유지태는 극 중 광역수사대 팀장 조헌으로 분한다. 범죄자에겐 인권 따윈 없다고 생각하는 그는 법과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질란테를 추격한다. 그는 "현실적인 인물이면서 정의를 잘 파악하고 있다. 그런 캐릭터가 나오기 굉장히 어렵다"고 바라봤다.
"우리 사회는 이데올로기가 모호해요. 신세대들의 문화는 또 다르죠. 뭔가 정의하기 힘든 사회잖아요. 선악의 변별도 시대에 따라 바뀐다는 점에서 모순적이에요. 조헌 같은 개인이 많지 않나요. 사회 시스템을 이해하고 모순과 부조리를 이해하죠. 소속 집단에서 잘못된 점을 알면서도 그 삶을 계속 살아내면서 변화되기를 꿈꾸고 그러한 활동을 해요. 어른의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가잖아요. 조헌은 판타지를 반영한 가공된 인물이지만 쾌감과 대리만족을 주는 역할로 잘 만들어졌죠."
비질란테로 활동하는 경찰대학생 김지용(남주혁 분)은 밤마다 법망을 피해 풀려난 범죄자들을 찾아 나서 직접 심판한다. 지용과 조헌은 정의를 향하지만, 그 정의를 구현하는 방식에서 다른 형태를 취한다. 유지태는 "조헌의 정의에 완벽하게 동의한다"고 했다.
그는 "조헌에게는 아픔도, 실패도 있지 않았을까. 선과 악을 구분 짓기 힘든 사회 속에서 경찰 나름대로 정의를 실현한다. 깊은 철학을 품었기에 더 올바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제가 연기해서 그런지 훨씬 더 큰 애정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제가 만약 피 끓는 청춘이었다면 지용에게 공감했을지도 모르겠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다소 경솔한 행동을 할 수도 있겠다"고 덧붙였다.
조헌은 세계관에서 가장 '센 캐릭터'다. 한 손으로 동전을 구기는 괴력을 지녔다. 유지태는 운동을 통해 체격을 벌크업 했다. 체중도 20kg 증량해 멋진 액션을 구현했다.
유지태는 "피지컬에서 자연스럽게 묵직함이 나올 거라고 봤다. 가라데에서 비롯된 쿠도, 절권도를 떠올렸다. MMA(종합격투기)가 못하는 영역까지 쿠도는 한다. 원컷맨에서 그치는 게 아닌 실전 무술을 하고 싶었다. 빠른 기술 액션도 소화하고 싶었다. 또 액션에 감정을 담고 싶다는 감독의 의도가 잘 담긴 거 같다"고 말했다.
온라인상에서는 일명 '센캐'인 조헌과 영화 '범죄도시' 시리즈에서 '원샷원킬'로 활약한 마동석이 연기한 마석도 형사와 싸우면 누가 이길지 궁금하다는 반응이 나왔다. 이를 언급하자 유지태는 "반응을 봤다"며 "나도 누가 이길지 궁금하다"고 답했다. 그는 "가족들도 그런 이야기를 해서 '그럼 내가 맞아야 하는 거 아냐? 나 맞기 싫다'고 말했다"며 웃었다.
"韓영화, 제도적 지원 필요…제2의 봉준호·박찬욱=희망"
이제 영화를 통해 '무비스타'(Movie Star)가 탄생하기 어려워졌다. 할리우드에 '라스트 무비스타' 톰 크루즈가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유지태, 박해일이 있다. 이는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부진을 겪은 한국영화계의 현실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하다. 유지태는 이러한 상황에 관해 밀도 있는 이야기를 나누며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이제는 '무비스타'가 나오기 힘든 환경이긴 합니다. 그래도 영화는 계속 이어질 거고, 그 끈질긴 생명력을 우리가 지켜볼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야기는 뭐냐면, 사실 박찬욱, 봉준호, 류승완 감독님이 정부의 지원을 받고, 제도적 지원 속에서 성장한 사람들이 아니죠. 비디오 가게 알바, 막노동을 하면서 영화를 만들었거든요. 그런 정신을 가진 누군가가 또 좋은 영화를 만들어낼 거라고 믿습니다"
할 말이 많아 보였다. 유지태는 쉬지 않고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어떤 말도 주저하지 않았다. 얼굴에는 피가 돌았다. 잠시 자세를 고쳐 앉은 후 말을 이었다.
"속상해요. 코로나19 이후 한국영화가 쇠락의 길을 걷고 있고, 대기업이 한국영화 투자에 손을 떼면서 존폐에 대한 부분이 현실로 다가오니까. 영화를 사랑하고 공부하고 20여년간 몸담아온 배우로서 서글프죠. 박탈감, 회의, 혼란을 느꼈습니다. 다른 나라는 제도적 지원을 통해 팬데믹 이후 어려움을 회복했는데 우리나라만 허우적대고 있는 게 아닌가. 유럽은 문화정책을 적극적으로 폅니다. 프랑스는 신사업을 하면서 CNC(프랑스국립영화영상센터), 즉 정부가 관여해요. 자국 영화에 일정부분 투자해야 한다는 규율이 있죠. 우리나라도 있지만, 신사업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은 갖춰져 있지 않죠. 소극적일 수밖에 없달까요."
그러면서 유지태는 "우리나라의 배급 시스템은 오로지 '머니'에 집중돼 있다. 미국 스타일과 비슷한 '산업'이다.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었다. 돈의 흐름에 따라 문화를 살릴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를 보호하기 위해 제도적 지원이나 풀뿌리 창작자들을 위한 복지 제도를 만들었어야 했다. 몇몇 감독들이 성과를 냈지만, 재난이 왔을 때 대응하지 못하고 함몰했다. 아카데미(오스카)와 깐느(칸영화제)를 석권한 훌륭한 자원들이 제작 하청업자 신세로 전락하는 건 안타깝다. 만드는 사람이 IP(지식재산권)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배우가 아닌 다른 '자리'에는 관심이 없다고 했다. 유지태는 "배우는 중립에 서야 하고, 나는 배우라는 직업을 사랑한다. 배우는 공직자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렇게 기자님들도 만나 부족하고 개선되길 바라는 부분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 그게 행복한 삶이 아닐까"라고 힘주어 말했다.
"대중은 갈대와 같아요. 당연히 만드는 사람들이 재밌게 만들어야죠. 한국 콘텐츠의 경쟁력을 높이는 게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는 일이 아닐까요. 우리가 잘하면서 뭔가 만들어낼 때 나름의 방식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죠. 제가 직접 (유인촌) 장관님을 만나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이이슬 기자 ssmoly6@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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