닌텐도와 다이슨, 같은 디자인 철학 공유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현대 건축 효시
일본 게임회사 닌텐도의 슈퍼 마리오. 영국 가전업체 다이슨의 진공청소기.
둘 다 각 회사를 대기업으로 만들어 준 대표 상품입니다.
언뜻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두 제품은 사실 동일한 디자인 철학을 뿌리로 두고 있습니다.
배관공이 거북이 밟는 게임? …사실 모두 '치밀한 설계'
닌텐도는 원래 화투나 장난감을 만들던 회사였습니다. 지금처럼 게임 업체로 전환한 건 1980년 '동키콩'이라는 오락실 게임이 북미에서 예상치 못한 대박을 터뜨린 이후입니다. 이후 게임 개발자 미야모토 시게루를 필두로 한 닌텐도 직원들은 콘솔 게임기 전용 '슈퍼 마리오'를 내놓고, 이 게임이 글로벌 시장을 휩쓸면서 닌텐도는 단숨에 일본을 대표하는 건실한 대기업으로 도약했습니다.
오늘날 마리오는 누구나 다 아는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했지만, 얼핏 살펴보면 논리적인 구석이 하나도 없습니다. 주인공은 붉은 모자를 쓴 배관공이며, 점프로 공중의 벽돌을 깨부수거나 거북이를 짓눌러 무찌릅니다. 초록색 파이프를 타고 스테이지를 이동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마리오는 스테이지 구성부터 캐릭터 아트까지 모두 단 하나의 주제를 두고 치밀하게 고민한 끝에 나온 결과물입니다. 바로 '어떻게 해야 점프로 진행하는 게임을 만들 것인가'라는 주제입니다.
심지어 게임의 시작 화면조차 디자이너의 의도입니다. 이용자가 오른쪽 키를 눌러 이동할 수 있게끔 캐릭터는 왼쪽에 치우쳐져 있고, 시작하자마자 점프 키를 누를 수 있도록 물음표 마크가 새겨진 블록을 공중에 노출시켰습니다. 이용 매뉴얼이나 게임 내 설명 단 한 문장 없이도 게이머에게 게임의 핵심 기능을 이해시킨 겁니다.
이같은 설계 방식은 지금까지도 닌텐도의 전통이자 게임 철학으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게임 저널리스트 마크 브라운에 따르면, 닌텐도의 이런 디자인 기조를 'Form Follows Function(형태는 기능에서 나온다)'이라고 합니다.
즉, 닌텐도는 새 게임을 개발할 때 아트나 세계관, 스토리, 심지어는 수요 고객층도 고려하지 않습니다. 우선 '어떤 게임 플레이를 만들지' 결정한 뒤 나머지 요소를 구체화합니다. 브라운은 이를 두고 "게임 플레이 방식이 게임의 겉모습까지 결정하는 것"이라며 "스토리, 아트를 구성한 뒤 거기에 어떤 게임 플레이가 맞을지 구상하는 다른 개발사와는 완전히 역순"이라고 설명합니다.
"디자인은 성능에 뒤따를 뿐" 다이슨의 디자인 철학
그렇다면 다이슨은 어떨까요. 다이슨은 창업 초기부터 'Form Follows Function'을 전면에 내세웠던 기업입니다.
다이슨의 'Form Follows Function'이 가장 잘 드러나는 사례는 무선 진공 청소기 개발사입니다. 창업자 제임스 다이슨은 원래 운반용 수레를 디자인하던 사람입니다.
어느날 진공 청소기로 방 안을 청소하던 중 전선과 필터백이 불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를 해결할 방안을 모색하다가 지금의 일체형 진공청소기를 탄생시켰습니다.
다이슨의 제품은 디자인 측면에서도 호평 받습니다. 특히 첫 진공 청소기는 우아한 디자인 덕분에 1983년 출시와 동시에 여러 디자인 전문 잡지의 표지를 장식했습니다. 하지만 다이슨의 디자인은 절대 '우아한 제품'을 만들려는 고민에서 출발한 게 아닙니다.
다이슨 창업자는 2014년 한 해외 매체와 인터뷰에서 "우리는 절대 뭔가를 더 아름답거나 인기 있어 보이게 꾸미지 않는다. (디자인적으로 호평 받은) 청소기의 노즐, 움직이는 부품 등은 먼지가 기계를 망가뜨리지 않게 하고, 진동과 소음을 줄이려는 대책일 뿐"이라며 "우리의 제품 구상은 오로지 '성능 극대화'에서 출발한다. 디자인의 독특한 부분은 단지 거기서 뒤따른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Form Follows Function'에 대한 다이슨의 집착은 제품 색깔이나 원료, 마감에까지 이어집니다. 예를 들어 다이슨은 고객이 별다른 매뉴얼 없이 제품을 정비할 수 있도록 투명한 디자인, 고정 나사 없는 부품 등을 고집합니다. 처음엔 제품 기능의 일관성을 위한 조처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것이 다이슨의 브랜드로 자리 잡았습니다.
모더니즘 건축 효시 'Form Follows Function'…IT에도 영감 줘
Form Follows Function은 원래 IT 산업이나 가전장비 업계에 통용되던 디자인 문법이 아닙니다. 그 원류는 20세기 초 미국에서 활동했던 건축가 루이스 설리번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고층 빌딩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그는 반듯한 직사각형 형태의 고층 건물을 정착시킨 장본인입니다. 그는 1896년 쓴 에세이에서 "형태는 언제나 기능을 따른다(Form ever follows function). 이것이 법칙이다"라는 문장을 남겼는데, 이것이 Form Follows Function 건축 사조의 시작이 됩니다.
설리번의 건축 철학은 미국 최고의 건축 설계자로 손꼽히는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까지 이어져 내려오면서 '모더니즘'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건축 양식을 완성했습니다. 하지만 '기능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해 유기적으로 디자인을 완성한다'는 그의 디자인 방법론은 IT를 비롯한 기술업계에까지 영감을 줬습니다.
특히 닌텐도와 다이슨의 제품 개발을 완성한 이들은 원래 프로그래머나 공학자로 경력을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슈퍼 마리오를 비롯한 닌텐도의 모든 흥행작을 만들어낸 미야모토 시게루는 일본 가나자와미술공예대학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예체능계였고, 장난감 스케치에 관심이 많아 닌텐도에 입사했습니다.
제임스 다이슨도 영국 왕립 예술대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뒤 발명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또 진공청소기를 개발할 때는 일본의 제조업체를 두루 견학하면서, 당시 일본 산업디자인에 영향을 준 여러 특징들을 받아들였습니다.
기능미가 브랜드를 만든다
Form Follows Function이 반드시 기업의 성공을 보장하는 건 아닙니다. 일례로 닌텐도는 한때 '게임 산업의 왕'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으나 소니, 마이크로소프트 등 다른 게임기 개발사의 추격을 허용했고, 2010년대에는 부진을 면치 못해 위기설이 도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다이슨은 창업 이래로 수많은 '실패작'을 양산한 회사입니다. 최근에는 전기차 프로젝트에 돌입했다가 비용 문제로 취소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Form Follows Function은 제품에 '독창성'을 부여합니다. 닌텐도는 2023년 현재까지 다른 게임 회사들과는 다른 '독특함' 덕분에 주목 받습니다. 다이슨 또한 팬 없는 선풍기, 헤어 드라이기 등 과거엔 없었던 디자인 덕분에 뚜렷한 브랜드 가치를 가집니다.
이는 디자인과 기능이 서로 별개인 일반 제품과 달리, 두 회사는 '기능에서 디자인을 이끌어내는' 노력에 투자하기 때문입니다. Form Follows Function은 회사를 '넘버 원'으로 만들 순 없어도 확고한 '온리 원'으로 만들어주는 셈입니다.
임주형 기자 skepped@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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