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위기에서 가까스로 탈출…"참혹한 장면 계속 떠올라"
"사고 이야기 나오면 생각 정지되고 숨쉬기 어려워" 호소
문제 회피·현실 도피 성향 계속되면 성격·인격에도 영향
당장엔 어려움 못 느끼더라도 반드시 전문상담 거쳐야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지난달 29일 밤, 사고 현장에 갇혀있다 간신히 귀가한 20대 이모씨는 사흘간 집에서 나오지 못하고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다. 녹사평역 인근에 희생자 추모 공간이 마련됐다는 소식에 1일 낮에야 용기를 내 이곳을 다시 찾았지만 지하철에서도, 길거리에서도 눈물이 앞을 가려 발걸음을 옮기기조차 힘들었다. 이씨는 "인터넷 기사에 '밤늦게 마약 하려고, 하룻밤 불태우려고 놀러 갔냐'는 식의 댓글이 달리는 것을 보며 속사정을 털어놓고 싶어 나왔다"며 "누군가의 아들, 딸로 평범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내 눈앞에서 허무하게, 비참하게 죽어가던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다"고 또 다시 울먹였다.
인파에 휩쓸렸던 직장인 정모씨(20대)도 밤낮으로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지점에서 다소 뒤편에 있었기에 그나마 다리만 삐끗하고 현장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없었단 생각에 희생자들에게 죄스러운 마음뿐"이라며 "아침에 6호선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데 이태원역·녹사평역을 지나갈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눈물이 나 업무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있고, 결국 오늘은 반차 휴가를 내고 분향소에 들렀다"고 말했다.
그날 밤, 이태원 그 좁은 골목길에선 한두 발자국 차이로 생과 사의 갈림길이 엇갈렸다. 참사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156명, 부상자는 173명이지만, 이보다 훨씬 많은 수천명의 사람이 가까스로 현장에서 빠져나왔고, 사고가 난 사실조차 몰랐던 주변 사람들이 뒤늦게 부상자를 옮기고 심폐소생술(CPR)에 나서 한 명이라도 더 살리고자 안간힘을 썼다. 현장이 수습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간 후엔 사고를 피했다는 안도감도 잠시, 참혹한 현장 모습이 다시 떠오르거나 미처 구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
재난경험자, 트라우마 급성기 지나면 우울·자책 더 심해져
김동욱 대한정신건강의학과의사회 회장은 "참사 당시 현장에 있었던 분들은 직접적인 재난 피해자이고, 현재 정신적 외상(트라우마)이 나타나는 '급성기'를 지나고 있기 때문에 허탈함, 무력감, 분노, 불안 등의 감정을 느낄 것"이라며 "시간이 지나면서는 더 우울해지고, 내가 왜 그랬을까, 그 때 이랬다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생길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증상은 1~2주 이상 지속되지 않도록, 가능한 빨리 치료를 받아야 한다. 급성기를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회복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회복되지 않는다면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대개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환자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점은 예측할 수 없는 사고를 당하고, 본인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충격을 받고, 피해를 벗어날 수 없었다는 무력감"이라며 "특히 참사를 직접 경험한 경우 당장엔 감정이 억눌려 있고 어려움을 미처 못 느낄 수 있지만 반드시 한 번은 전문상담가와 면담하라"고 권했다.
사고 현장에서 100m 떨어진 바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 자정 넘어 도롯가에 나왔던 양모씨(21)도 상황을 설명하던 중 눈물을 쏟았다. 양씨는 "소방차와 구급차가 계속 오가길래 어디 불이라도 난 줄 알았는데, 술집을 나서니 길바닥 여기저기에 혈흔이 낭자하고 수십명의 사람들이 정신없이 CPR을 하고 있고, 또 한쪽에서는 휴대폰으로 영상을 찍는 이들이 있었다"며 "술 취한 일행을 챙겨 큰길가로 나오면서 본 시신들과 심정지로 구급차에 실려 간 사람들의 모습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양씨는 "참사 다음 날인 일요일, 월요일까지 마음을 안정시키려 외출도 하지 않고 참다가, 화요일 학교에 가려고 지하철을 타는 순간 숨이 턱 막히며 울음이 터졌다"면서 "슬프고 무섭다기보단 사고 이야기만 나오면 머릿속 필름이 끊기듯 답답해지고 숨이 쉬어지지 않으면서 '그날 바로 옆에서 그렇게 큰 사고가 났는데도 왜 나는 모르고 신나게 놀고 있었나' 하는 자책감에 괴롭다"고 했다.
참사 직후 현장에서 심정지 환자들에게 직접 CPR을 했다는 이모씨(33)는 "나보다 어려 보이는 사람들이 입술이 파래지고 피를 토하고 있는데 손 쓸 방법이 없었다"며 "TV 뉴스에서 사고 관련 화면만 나와도 차마 볼 수가 없고, 그날 그 현장에서 본 모습들이 잔상처럼 계속 떠올라 그 일을 입에 올리기조차 힘들다"고 전했다.
"밖에 나갈 엄두도 안나" … 참사 현장에 남겨진 사람들
사고를 직접 겪거나 바로 옆에서 지켜봐야 했던 이들뿐 아니라 참사 현장 인근 거주민들과 자영업자, 지역 공무원들도 트라우마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다.
이태원 주민 박모씨(50)는 "당장 가족이나 친척, 친구 중에 그날 사고로 희생을 당한 사람은 없지만 지금은 해밀턴호텔 쪽은 물론 아예 집 밖을 나서기가 꺼려진다"고 말했다. 그는 "지역 토박이인지라 골목골목 길이 훤해 뉴스를 보지 않아도 현장의 모습이 그려진다"며 "이태원은 수십 년 동안 국적과 인종을 초월한 사람들이 만나고 놀던 곳인데, 가슴이 아파 당분간은 가족들과도 동네 산책도 못할 것 같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많은 인파가 몰릴 것을 예상하고도 교통 통제 등 행정력을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도 마음이 괴롭긴 마찬가지다. 용산구청 공무원 A씨는 "핼러윈 축제는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 행사로 기대가 컸다"며 "사고 발생 소식에 다들 달려 나가 한 분이라도 더 구하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고 했다. 또 다른 공무원 B씨는 "현재 구청 직원들은 모든 업무와 일정이 사고 수습과 피해자 지원 등 후속 조치를 집중돼 있다"면서 "이미 가족, 친구, 전국민에게 죄인된 신세라 힘들어도, 트라우마가 생겨도 어디 가 말도 못 하는 상황"이라고 고개를 숙였다.
정정엽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이사(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재난 등 충격적인 상황에서 개인의 기억이 원래와는 다르게 기억되거나, 비슷한 상황에서 더 예민하게 반응하게 되는 것이 트라우마"라며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문제를 회피하려 하거나 아예 현실에 무감각해질 수도 있고, 개인의 인격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했다. 정 이사는 "스스로가 내면의 안정을 되찾으려 노력하고, 주변에서도 계속 지지해 준다면 분명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회복할 수 있다"며 "심리적인 안정감을 줄 수 있는 장소에 머물면서 가능한 초기부터 적절한 심리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인경 기자 ikjo@asiae.co.kr
김영원 기자 forever@asiae.co.kr
변선진 기자 sj@asiae.co.kr
공병선 기자 mydillon@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