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정현진 기자]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자국 내 반도체 생산 시설 확보를 지원하기 위해 만든 ‘반도체 지원법(Chips and Science Act·CSA)’의 구체적인 시행 계획을 내놓았다. 반도체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내년 봄부터 390억 달러(약 54조 원)에 달하는 자금을 지원하며 글로벌 반도체 기업을 미국으로 끌어들이겠다는 것이다. 미국 내 투자 계획을 발표한 한국 기업들은 지원금을 기대할 수 있게 됐지만 이른바 ‘중국 투자 제한’이라는 가드레일 규정으로 난감한 상황에 놓이게 됐다. 이런 가운데 한국에 투자하려 했던 해외 기업이 미국으로 향하는 일까지 벌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반도체 지원법, 내년 봄 일부 자금 집행 기대"
바이든 행정부는 이날 ‘미국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한 지원 전략(A Strategy for The CHIPS for America Fund)’을 공개했다. 지나 러몬도 미 상무부 장관은 백악관 브리핑을 통해 집행을 위해 내년 2월 이전에 기업들로부터 지원금 신청을 받을 계획이라면서 "내년 봄에는 일부 기업에 지원금이 지급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지난달 9일 바이든 대통령이 반도체 지원법에 서명한 지 한 달 만에 구체적인 시행과 관련한 내용을 공개한 것이다.
미국은 반도체 지원법에 담긴 520억 달러 규모의 지원 금액 중 390억 달러를 우선 미국의 반도체 산업 발전과 기술적 유지를 위한 시설 건립 지원에 사용한다. 이 중 반도체 기업들이 가장 주목하는 반도체 시설 건립 지원과 관련해 미 상무부는 약 280억 달러를 ‘정밀한 제조 과정에 필요한 첨단 로직 반도체와 메모리 반도체’의 미국 내 생산에 지원하기로 했다. 약 100억 달러는 자동차나 군사, 의료 기기에 사용되는 성숙 공정 반도체 생산시설 확대를 지원하는 데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러몬도 장관은 이와 관련한 세부 신청서 내용은 내년 2월 초 발표할 예정이며 조만간 구성될 50명가량의 전문가 집단이 이를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하나씩 이 거래와 관련해 협상하고자 한다. 기업들은 지원금이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지 여부를 입증해야 한다"고 말했다.
◇"美 지원받고 中 첨단 반도체 투자 시 자금 회수"
러몬도 장관은 다만 세금이 투입되는 만큼 ‘가드레일’을 세워 자금이 미국 반도체 생산 능력 확대에 집중될 수 있도록 제한하겠다고 밝혔다. 한국 반도체 업계가 주목하고 있는 대중 투자 제한과 관련해 그는 "자금을 지원받는 기업은 향후 10년간 중국 내에 첨단 공정 시설을 지을 수 없다"면서 "중국 시장을 위한 중국 내 성숙 공정 공장만 확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러몬도 장관은 컴퓨터 모니터나 자동차에 사용하는 수준의 성숙 공정에 저렴한 반도체 생산 정도만 가능하다면서 "만약 지원금을 받고 이를 넘어선다면 자금을 회수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미 반도체 지원법에는 구체적으로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분야는 28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미만은 중국에서 신규 투자를 하지 못한다고 적혀있다. 러몬도 장관은 기자들이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 추가로 묻자 "개별 사례별로 살필 것"이라면서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이(중국 관련 가드레일)를 시행하는 첫 번째 목적은 바로 미국의 국가안보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기업을 평가할 때 살필 모든 요소는 국가안보 보호라는 렌즈를 통해 보게 될 것"이라고 답했다.
러몬도 장관은 백악관 브리핑 과정에서 글로벌 반도체 업체들이 미국에 잇따라 투자를 발표했다는 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는 "미국 마이크론은 이 법이 통과하지 않았다면 아이다호에 대규모 확장 계획을 밝히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고, 지난 6월 발표된 대만 반도체 업체 글로벌웨이퍼스의 50억달러 규모 텍사스 신공장 건설 투자로 이 법의 효력을 느낄 수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러몬도 장관은 이날 공개된 월스트리트저널(WSJ)과의 인터뷰에서 "우리가 중국과 경쟁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미국에서의 투자"라면서 "미국이 핵심 광물, 전기차 배터리, 반도체, 인공지능(AI) 등 특정 기술 분야를 지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와 관련해 도널드 트럼프 전 행정부의 전직 국가안보 고위 관료들과 접촉, 반도체 지원법에 대한 의회의 지지를 뒷받침한 사실도 뒤늦게 공개했다. 러몬도 장관은 경호팀원으로부터 H.R. 맥매스터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팟캐스트에 나와 자신을 칭찬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맥매스터를 포함한 4명의 트럼프 전 행정부 관리들을 초청해 반도체 지원법이 미국의 국가 안보를 위해 초당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맥매스터 전 보좌관은 당시 만남에 대해 "중국과의 경쟁을 초당적 현안으로 규정한 대화"였다고 술회했다고 WSJ는 전했다. 넉 달 뒤 반도체 지원법은 공화당 상원의원 17명의 지지에 힘입어 상원 문턱을 통과했다.
◇난감한 韓, 美에 투자 뺏기기까지
미국이 자국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반도체 시장 재편에 한발 더 나아가면서 한국은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됐다. 중국에 공장을 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주요 반도체 업체들은 미국에 대규모로 투자하면서 현지 정부의 지원을 받을 계획인데, 중국 투자와 연계해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이 당초 이달 초 개최하려 했던 한국, 일본, 대만과의 반도체 공급망 협의체인 이른바 ‘칩 4(Fab 4)’ 회의 일정도 계속 미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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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미국의 반도체 지원법으로 인해 글로벌 반도체 업체의 투자를 미국에 빼앗기는 상황까지 맞닥뜨렸다. 러몬도 장관은 WSJ와의 인터뷰에서 대만 글로벌웨이퍼스가 50억달러 규모의 독일 반도체 공장 확장 계획을 포기하고 지난 2월 다른 투자를 검토하고 있었다면서 자신이 지난 6월 도리스 수 글로벌웨이퍼스 최고경영자(CEO)와 한 시간가량 통화해 설득했다는 뒷이야기를 전했다. 당시 수 CEO가 미국의 지원금 없이는 건설 비용이 미국의 3분의 1 수준인 한국에 신공장을 지을 것이라는 말을 했고, 이에 러몬도 장관은 수 CEO에 "계산을 해보자"며 설득에 나섰다는 것이다. 2주 뒤 글로벌웨이퍼스는 50억달러를 투입해 1500개의 일자리를 만드는 텍사스주 신공장 건설 계획을 발표했다.
정현진 기자 jhj48@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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