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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37] 소래포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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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37] 소래포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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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곶(月串)역 근처에 차를 세웠습니다. 이쪽은 아무래도 주차사정이 썩 좋지 않을 것 같아서였지요. 한 시절, 협궤열차가 달리던 다리를 건넜습니다. 바닷물이 드나드는 갯골을 가운데 두고, 저편 시흥과 이쪽 인천을 잇는 교량. 이제는 사람이나 지나는 그 오래된 다리 위에서 일주일 전 화재의 흔적을 내려다봅니다.


참혹한 광경입니다. 뒤틀린 철제 구조물들과 형체를 알기 어렵게 그을린 갖가지 집기들이 불의 폭력성과 야만성을 보여줍니다. 겨우 화를 면한 상점과 인접건물은 슬픈 눈길로 화마가 쓸고 간 자리를 보듬고 있습니다. 무심한 갈매기 떼만 갯벌에 숨겨진 먹이를 뒤져내기 바쁩니다. 썰물의 시간입니다.

타버린 '소래 어시장'의 내력도 갯벌에 있습니다. 내항(內港)의 건설로 인천항 출입길이 막힌 어부들이 이곳에 '물양장'(소형선박 접안부두)을 만들면서 생겨난 장터니까요. 갯벌 위에 열린 시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소래가 새우젓으로 이름을 날리던 1970년대, 입소문을 타고 관광객도 모여들기 시작했지요.


소년과 청년들은 이 철교 위에서 퍽이나 우쭐거렸습니다. 침목과 레일 밑으로 갯벌과 파도가 어른거리는 다리 위에서 장난을 치며 사내다움을 뻐기곤 했지요. 철교와 어시장은 소래의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야단스럽게 도드라지는 풍경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저 무채색 일색. 칼라필름으로 찍어도 흑백사진이 나왔습니다.


탁한 물빛, 바다의 알몸 같은 갯벌, 염치를 모르는 갈매기, 벌겋게 녹이 슨 닻과 고깃배의 낡은 깃발들, 소금밭과 시커먼 염전창고,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돌리는 수차(水車), 정거장과 협궤열차 그리고 이가림(李嘉林) 시인의 시 한 줄. '측백나무 울타리가 있는/ 정거장에서/ 장난감 같은/ 내 철없는 협궤열차는/ 떠난다.'


협궤열차가 파스텔 풍의, 은은하고 아름다운 시절만 싣고 달린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러라고 만들어진 낭만적 탈것도 아니었지요. 알다시피, 그것은 일제가 식민지 수탈을 위해 만든 것이었습니다. 여주평야 쌀을 실어내려고 수려선(1930)을, 이곳 소금을 싣고 가려고 수인선(1937)을 만들었습니다.


소금은 일종의 군수물자였습니다. 화약(火藥)원료로 사용할 양질의 천일염이 필요했던 그들이었지요. 일본은 일찍이 거대한 불장난을 계획했던 모양입니다. 조금 비약하자면, 지금 제가 서 있는 이 다리 위로 엄청나게 많은 폭탄이 지나갔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들로 진주만과 아시아를 쑥밭으로 만들었겠지요.


선로 너비 76.2㎝의 '장난감 같은' 열차가 그렇게 무겁고도 무서운 노동을 했습니다. 그 꼬마 기차가 전쟁 물자를 지고 달렸을 다리 위에서, 오늘 또 소래의 슬픈 초상을 봅니다. 화상에 일그러진 얼굴입니다. 우리네 삶이 종종 전쟁에 비겨지는 이유까지 새삼스럽게 새겨집니다.


바람이 일어납니다. '폴리스 라인'에 매달린 A4용지들이 흔들립니다. 불에 타고 남은 것들 위에서 리본처럼 펄럭입니다. 종잇장마다 네댓 글자가 적혀 있습니다. 사라진 가게들의 상호입니다. 고깃배 이름도 있고, 동네 이름도 있습니다. 아들딸 이름도 있습니다. 화재감식과 현장관리를 위해 경찰이 붙여놓은 것일 테지요.


문득, 그것들이 크나큰 희망의 징표로 읽힙니다. 이름표의 주인공들이 무사한 까닭입니다. 고깃배는 다치지 않았고, 고향은 잘 있습니다. 애들도 아무 일 없습니다. 그보다 다행스런 일이 어디 있을까요. 인간이 포기하지 않는다면 하늘도 모른 체 하지 않는다지요. 이 잿더미 위의 사람들도 결국은 일어날 것입니다.


소금밭의 기억 때문일까요. 소래(蘇來)는 결코 썩지 않고 죽지 않을 땅이름일 것만 같습니다. 흔히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서 연유되었다고도 하고, 우리말 '수리'에서 변용된 것이라고도 하는 지명이지요. 저는 뒤의 것에 한 표를 보태고 싶은 사람입니다. '높다'는 뜻으로, 머리 꼭대기를 뜻하는 '정수리'에도 들어있는 '수리'.


'소, 래'라는 두 음절에서는 '정수리'에서 솟구치는, 소생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말할 것도 없이 갯벌의 힘이지요. 갯벌은 위대한 '밭'입니다. 얼마나 많은 것들이 거기에 목숨을 의탁하고 살아갑니까. 구멍 하나하나가 뭇 생명들의 '집'이지요. 갯벌은 거대한 민주 국가입니다. 아무런 차별 없이 '억조창생(億兆蒼生)'을 키웁니다.


다리 끝 저만치에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가 보입니다. 고기잡이를 나가려는지 배 한척이 곧 움직일 채비를 합니다. '뽈 발레리'의 시 <해변의 묘지> 마지막 연의 첫 머리가 떠오릅니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태평양전쟁도 지나고, 6.25도 지나갔을 철교 위에서 다시 꿈틀거리는 포구를 봅니다.


봄볕이 금가루처럼 갯벌 가득 부서지고 있습니다. 새로 생긴 다리 위로 수인선 전철이 지나갑니다. 승객도 기관사도 불 탄 자리를 내다보고 있을 테지요. 너무 빨리 옛 모습을 잃어가는 소래포구를 안타까워하겠지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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