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bar_progress

글자크기 설정

닫기

[윤제림의 행인일기①]서초동 향나무를 지나며

시계아이콘01분 43초 소요

[윤제림의 행인일기①]서초동 향나무를 지나며 윤제림 시인ㆍ서울예술대 교수
AD

저는 오늘도 당신 곁을 지나서 일터로 갔습니다. 백리 바깥의 직장으로 가자면 저는 날마다 길 복판에 장승처럼 서 있는 당신을 지나야 합니다. 당신은 반포대교를 건너온 차들이 강남의 끝이나 서울의 남쪽을 향해 내리달리는 고갯마루에 서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물건이 얼마나 오래 묵은 것인지를 이야기할 때 우리가 곧잘 쓰던 표현 그대로, '옛날 고려(高麗)적'부터 그곳에 서 있었다지요. 처음 뿌리를 내린 자리에서 자세 한번 고치지 않고 말입니다. 호시탐탐 더 나은 위치나 포즈를 잡으려고 끊임없이 두리번거리며 종종거리는 저 같은 소인배들은 당신 앞에서 마냥 왜소해질 뿐입니다. 무딘 붓으로 당신이 살아온 '정물(靜物) 870'여년의 사연을 짚어보려 하지만, 실마리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끝없이 밀리는 자동차들 그 요란한 진동과 매캐한 연기 속에도 당신은 고개를 바로 세우고 지순한 눈매로 하늘을 우러릅니다. 허리를 곧게 펴고 우리 부끄러운 목숨들을 굽어봅니다. 놀랍고 기막힌 장면도 더러 있겠으나, 대부분은 시시하고 너절한 광경들일 터인데 당신은 지루하다는 표정 한번 짓지 않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어땠습니까. 이 고개가 '마뉘꼴'이라 불리던 시절에는 범도 나타나고 산적이 출몰할 만큼 으슥한 골짜기였다지요. 아직도 당신의 기억에 남아 있는 길손은 누가 있나요? 혹시, 저 한명회 대감을 가차 없이 꾸짖고 부여 무량사로 향하던 매월당 김시습 같은 사나이나 붓이나 먹을 사러 한양성 들어가던 과천 농부(果農) 김정희 선생 같은 분들은 못 보셨는지요?

[윤제림의 행인일기①]서초동 향나무를 지나며 서초동 향나무를 지나며

생각해보면, 당신은 '천년 사극(史劇)'의 관객입니다. 아니, 어쩌면 조선왕조쯤은 한 화면에 담고 있을 무비카메라입니다. 당신의 장기(長技)는 엄청난 '롱테이크(long take)'지요. 필름을 되돌려보면 별의별 것이 다 보일 것입니다. 여우, 승냥이, 호랑이, 멧돼지… 야반도주하는 사내와 계집, 과거에 떨어지고 돌아가는 서생, 가렴주구로 한 밑천 잡아서 한양으로 돌아오는 탐관오리, 보부상… 임진년의 왜군, 청나라 장수, 행진하는 일본군대, 피난민 행렬, 미군 지프… 냄새 나는 고급세단, 고단한 오토바이….


당신의 기억창고 안에는 알려지기만 하면 국사편찬위원들이 한걸음에 달려올 만큼 놀라운 사료(史料)들도 많을 것입니다. 당신의 양쪽 어깨 너머로 보이는 검찰과 법원이 두려워할 만한 세월의 알리바이도 하나 둘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당신은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아니 당신의 '보호수(保護樹)'라는 타이틀은 어쩌면 보호감찰이나 사찰의 대상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게까지 고약한 생각은 밀쳐두더라도, 저는 당신의 삶이 자꾸만 연민스럽습니다. 근력이 부쩍 더 쇠잔해 보이고 온몸의 피돌기도 예전같지 않아 보입니다. 위태롭고 안쓰러운 생각이 연방 일어납니다. 요즘 당신의 자세는 마치 횡단보도의 절반도 건너지 못했는데 빨간색으로 바뀐 신호에 안절부절 못하고 어정쩡 멈춰선 할머니 형국입니다.


어떤 이들은 당신이 저 속리산 정이품 소나무나 세금을 내기도 하는 예천 석송령(石松靈)처럼 팔자가 늘어진 나무인데 무엇이 걱정이냐고 묻습니다. 서울의 최고령 상록수로 갖은 호강을 누리지 않느냐며 눈을 흘깁니다. 틀린 말들은 아닙니다. 당신의 원기를 돋우기 위해 서울시는 수시로 당신 몸에 영양제 링거를 매달고, 커다란 물차와 높다란 사다리를 동원하여 때맞춰 목욕도 시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당신에게 묻고 싶어집니다. "행복하십니까?" 당신은 고개를 저을지도 모릅니다. 산속에서 늙어가는 친구들이 부럽다고 할 것만 같습니다. 너무나 많은 일들을 보고 홀로 기억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느냐 묻고 싶을 것입니다. 사실과 진실을 모두 알면서도 법원과 검찰청 앞을 그저 묵묵히 지나고 있는 목격자의 심정과 다를 바 없을 테지요.


당신에게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봅니다.


윤제림 시인ㆍ서울예술대 교수


AD

AD
AD

당신이 궁금할 이슈 콘텐츠

AD

맞춤콘텐츠

AD

실시간 핫이슈

AD

놓칠 수 없는 이슈 픽

  • 26.01.2007:16
    "힙하다 힙해" 퇴근길 치맥에 한국 화장품 싹쓸이까지…뉴요커 일상에 스며들다④
    "힙하다 힙해" 퇴근길 치맥에 한국 화장품 싹쓸이까지…뉴요커 일상에 스며들다④

    지난 15일(현지시간) 오후 7시 미국 뉴욕 맨해튼 32번가 K타운. 한국 치킨 브랜드 BBQ 매장은 '치맥'을 즐기려는 현지인들로 북적였다. 지하 1층에 마련된 테이블은 일찌감치 만석이었고 20~30대 직장인과 대학생들은 치킨을 앞에 두고 맥주잔을 부딪치며 저녁 시간을 즐겼다. 치킨뿐 아니라 떡볶이와 김치볶음밥 등 다양한 한국 메뉴를 함께 주문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이 매장을 자주 찾는다는 대학생 메디슨 씨는 "학교 근처

  • 26.01.1915:08
    "돼지갈비에 나물" 파리지앵의 저녁 식탁 오른다
    "돼지갈비에 나물" 파리지앵의 저녁 식탁 오른다

    K웨이브 글로벌 현장 점검 "형 집에 놀러 가는데 저녁 메뉴인 돼지갈비를 준비하려고 합니다" 지난해 연말 프랑스 파리 오페라 지역(Rue Sainte-Anne)에 위치한 유명 한인 슈퍼마켓 'K마트'에서 만난 맥심 카본(27살)씨는 '100% 태양초'라고 적힌 고춧가루와 송이버섯과 무, 고추장, 튀김가루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카본은 한국 신림동에서 1년 거주하면서 처음 접한 한식을 잊지 못해 귀국 후에도 파리 한식

  • 26.01.1914:08
    ③"대중문화는 화려한 분수…'일상문화' 흘러야 30년 간다"[인터뷰]
    ③"대중문화는 화려한 분수…'일상문화' 흘러야 30년 간다"[인터뷰]

    "대중문화는 '화려한 분수'처럼 금방 꺼질 수 있습니다. 지하수처럼 '일상 문화'가 계속 흐르도록 해야 K 브랜드와 산업의 생명력을 30년 이상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일열 전 파리문화원장은 최근 아시아경제와 인터뷰에서 K브랜드의 글로벌 지속가능성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그는 "방탄소년단(BTS), 블랙핑크 등 K콘텐츠는 강력한 진입로가 될 수 있지만, 휘발성이 크다"며 "어느 순간 거품이 꺼질 수 있다는 점에서 지금은 '썸

  • 26.01.1914:08
    돼지갈비 요리하는 파리지앵…자기 전엔 韓스킨케어 톡톡[K웨이브3.0]②
    돼지갈비 요리하는 파리지앵…자기 전엔 韓스킨케어 톡톡[K웨이브3.0]②

    "형 집에 놀러 가는데 저녁 메뉴인 돼지갈비를 준비하려고 합니다" 지난해 연말 프랑스 파리 오페라 지역(Rue Sainte-Anne)에 위치한 유명 한인 슈퍼마켓 'K마트'에서 만난 맥심 카본(27살)씨는 '100% 태양초'라고 적힌 고춧가루와 송이버섯과 무, 고추장, 튀김가루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카본은 한국 신림동에서 1년 거주하면서 처음 접한 한식을 잊지 못해 귀국 후에도 파리 한식당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현지 한식당 대부분이 중

  • 26.01.1913:33
    ①"한국은 힙하다"…글로벌 트렌드섹터 'K라이프스타일'
    ①"한국은 힙하다"…글로벌 트렌드섹터 'K라이프스타일'

    #프랑스의 파리에 거주하는 텐진 라돈(27세·여)씨는 요즘 한국식 스킨케어에 푹 빠졌다. '스킨→세럼→아이케어→립케어→페이스 크림' 등의 순으로 기초화장품을 세분화해 사용하고, 매일 선크림으로 바른다. 지난해 11월 파리 지하철 최대 환승역이 있는 샤틀레 지역의 화장품 멀티브랜드숍(MBS) '모이다'에서 만난 그는 한국 뷰티기업 에이피알이 선보인 브래드 메디큐브의 '제로모공패드' 2통을 장바구니에 담고 있었다. 라돈

  • 26.01.1609:11
    윤희석 "한동훈 제명돼도 당 위한 활동 계속"
    윤희석 "한동훈 제명돼도 당 위한 활동 계속"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이경도 PD■ 출연 : 윤희석 전 국민의힘 대변인(1월 15일)※ 기사 내용을 인용할 때는 반드시 '소종섭의 시사쇼'를 명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소종섭 : 전화 인터뷰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윤희석 : 감사합니다. 소종섭 : 국민의힘 윤리위원회가 제명 처분을 할 것이라고 예상을 했나요? 윤희석 : 어느 정도는 예상했었죠

  • 26.01.1416:21
    이준석 "한동훈, 고수라면 창당이나 서울시장 무소속 출마 선언할 것"
    이준석 "한동훈, 고수라면 창당이나 서울시장 무소속 출마 선언할 것"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마예나 PD■ 출연 :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1월 14일) ※ 기사 내용을 인용할 때는 반드시 '소종섭의 시사쇼'를 명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소종섭 :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소종섭의 시사쇼 시작하겠습니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와 함께 여러 가지 이슈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잘 지내셨죠? 이준석 : 예, 그렇습니다. 소종

  • 26.01.1008:01
    "아내는 연상…원더우먼 같았다" 유산·가난 속에서 함께 버틴 박홍근 의원 '인생 최고의 반석' [배우자 열전]②
    "아내는 연상…원더우먼 같았다" 유산·가난 속에서 함께 버틴 박홍근 의원 '인생 최고의 반석' [배우자 열전]②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박수민 PD편집자주6·3 지방선거의 해가 열렸다. 여야 후보자들의 출마가 이어지고 있다. 후보자들이 누구인지, 어떤 정책을 내세우는지와 함께 배우자는 어떤 인물인가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소종섭의 시사쇼'는 출마(또는 출마 예상) 후보자 배우자에 대해 알아보는 '배우자 열전'을 시작한다. ①문혜정(정원오

  • 26.01.0808:49
    동갑내기 캠퍼스 커플…"예뻐보이더라" 정원오, 배우자 문혜정 첫 인상[배우자 열전]①
    동갑내기 캠퍼스 커플…"예뻐보이더라" 정원오, 배우자 문혜정 첫 인상[배우자 열전]①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마예나 PD편집자주6·3 지방선거의 해가 열렸다. 여야 후보자들의 출마가 이어지고 있다. 후보자들이 누구인지, 어떤 정책을 내세우는지와 함께 배우자는 어떤 인물인가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소종섭의 시사쇼'는 출마(또는 출마 예상) 후보자 배우자에 대해 알아보는 '배우자 열전'을 시작한다. ①문혜정(정원오

  • 26.01.0710:25
    장성철 "장동혁, 한동훈 제명 아니면 탈당 권고할 듯"
    장성철 "장동혁, 한동훈 제명 아니면 탈당 권고할 듯"

    ■ 방송 : 아시아경제 '소종섭의 시사쇼'(월~금, 오후 4~5시)■ 진행 : 소종섭 정치스페셜리스트 ■ 연출 : 이경도 PD■ 출연 : 장성철 공론센터 소장(1월 5일) 소종섭 : 어서 오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장성철 :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소종섭 : 이 얘기부터 해보죠. 이혜훈 기획예산처 장관 후보자와 관련해서 폭언했다, 보좌진에게 갑질했다, 남편이 부동산 투기를 했다는 등 의혹이 쏟아집니다. 그런데


다양한 채널에서 아시아경제를 만나보세요!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