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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25] 청진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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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25] 청진동에서 윤제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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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강(終講)을 했습니다. 한 학기를 무탈하게 마쳤다는 안도감이 일종의 해방감처럼 밀려듭니다. 제가 만든 싱거운 소리가 그리 싱겁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이맘때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빨리 가는 시계는 대학의 시계다." 동업(同業)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쉽게 고개를 끄덕일 것입니다.


학기말이라고 즐거운 것만은 아닙니다. 방학이라는 무지개를 만나려면 몇 고개를 더 넘어가야 합니다. 제일 힘든 고개는 역시 학생들 성적평가지요. 저마다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한 결과를 두루 잘했다고 칭찬하기 보다는 흠결을 잡아서 깎아내려야 합니다. 줄을 세워야 합니다.

알다시피, 사람이 사람을 재단하고 채점하기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더군다나 의견과 주장의 흑백이나 곡직(曲直)의 판별은 고통스럽기 그지없지요. 가장 곤혹스러운 순간은 잣대나 저울의 눈금이 고르지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차릴 때입니다. 자신도 미처 예상치 못한 답을 보게 될 때 출제자는 당혹스럽습니다. 조금 전까지 최상의 답으로 보았던 것보다 더 좋은 답이 나올 때 선생의 '스트라이크 존'(strike zone)은 흔들립니다.


고백합니다. 제게는 이런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느 답안을 보고 '형편없군' 하면서 C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화장실엘 다녀왔습니다. 조금 전의 답안을 다시 읽었습니다. '이걸 내가 왜 C로 봤을까. A플러스!' 입학시험이라면 당락(當落)이 뒤집히는 순간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채점을 하다가 점심을 먹게 될 때도 위험합니다. 식전과 식후가 경미하게 흔들립니다. 마저 끝내지 못하고 퇴근할 때도 주의해야 합니다. 오늘 '세이프'(safe) 수준의 답안이 내일은 불행히 '아웃' 판정을 받게 될 수도 있습니다.


[윤제림의 행인일기 25] 청진동에서


실수를 줄이려면 스스로를 들볶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지각(知覺)의 부실함을 '조심하고 거듭 확인함'으로 극복합니다. 성적산출의 근거를 많이 마련해서 이것과 저것을 '크로스 체크'합니다. 미심쩍은 것은 재차 들춰봅니다. 자(尺)와 저울의 눈금을 자꾸 확인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기말이면, 저는 수학선생님들이 부러워집니다. 수학답안에서는 오해도 착시(錯視)도 착각도 일어날 일이 없을 것 같아서입니다. 얼마나 좋을까요. 만천하에 공개되어도 정오(正誤)가 분명하고 득점에도 이의가 있을 수 없는 성적표를 만들 수 있는 수학선생님.


사람이 아니라 사실(事實)이 부러운 것인지도 모릅니다. 요즘 부쩍 많이 쓰이는 단어 '팩트'(fact) 말입니다. 실재(實在)이며 움직일 수 없는 현상인 것. 전제군주도 제 멋대로 어쩌지 못하고 백만장자도 제 맘대로 바꾸지 못하는 것.


그런 점에서 저는 출석부가 고맙습니다. 절하고 싶어집니다. 그 날 그 시간에 '있었던' 사람과 '없었던' 사람을 증명해주는 그것. 제 시간에 온 사람과 늦게 온 사람을 분명히 구분해주는 그것.


광화문 근처 해장국집에 앉아서 왜 출석부 생각이 새삼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저는 지금 곧 수업을 받으러 가야하는 야간학생처럼 국밥을 먹고 있습니다. 곧 해가 떨어질 것입니다. 촛불이 켜지고 광장은 거대한 교실이 될 것입니다. 될 수 있으면 시간 맞춰 가서, 교단 앞쪽에 앉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저녁을 먹고 있습니다.


물론 광화문의 교실은 출석을 부르지 않습니다. 지각을 했다고 나무랄 사람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아이, 노인 할 것 없이 끊임없이 모여듭니다. 백만 명의 학교입니다. 선생과 학생이 따로 없습니다. 국민이 국민을 가르칩니다. 초등학생의 말을 대학교수가 경청하고, 젊은 노동자의 의견에 허리 굽은 노인이 박수를 칩니다.


누가 출석을 부르는 걸까요. 국민들입니다. 이땅의 백성 된 자들이 저마다 제 이름을 부르며 이곳에 와 앉고 섭니다. 궤변(詭辯)에 대한 저항입니다. 문제의 본질을 흐리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누가 보아도 같은 답을 가리지 말라는 주문입니다. 자꾸 괴상한 '보기'를 보태며 혼란을 부추기지 말라는 요구입니다.


죄지은 자들이 '억지 알리바이'를 만들기 급급해하는 시간에, 죄 없는 백성들은 역사에 '부끄러운 알리바이를 남기지 않으려고' 촛불을 듭니다. 누가 이 광장에 모이는 사람들의 진심을 의심합니까. 누가 이 교실의 출석부를 불신합니까. 지금 이 교실의 평가는 저의 글짓기 시험문제처럼 제각각의 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남녀노소가 한 가지 답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백만의 답'이 어떻게 '오천만의 답'일 수 있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지요. 온 국민의 의견을 알고 싶을 때, 국가도 조사전문회사도 '일천 명'쯤에게 묻습니다. 그렇게 나온 결과를 아무도 고작 '천 명'의 대답이라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나머지 사천구백구십만 구천 명에게 마저 물어보라 하지 않습니다.


광화문에 가서 출석을 불러보십시오. 거기 남녀노소가 고루 있습니다. 경향각지, 각계각층이 모두 어울려 있습니다. 국민의 출석부가 있습니다.


윤제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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