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 옛말과 옛정신이 흘러온 풍경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하늘 아래 왕의 은혜가 아닌 게 없었다. 그게 역군은(亦君恩)이다.
우리는 왕의 시대에 살아보지 않았기에 그 시절의 사고방식을 감히 넘겨짚기도 어렵다. 절대권력인 왕은 절대선(善)이기에 잘못할 리가 없다. 충(忠)이란 사실 '눈'이 없는 것이다. 명령을 듣는 '귀'만 있는 것이다.
옛 지식인들이 '역군은이샷다(이 모든 게 또한 왕의 은혜이십니다)'를 외치는 것은 대개 물먹고 낙향해 있을 때나 귀양 가 있을 때이다. 멀리 있어 보니, 왕의 자비로움이 제대로 보여서일 수도 있지만, 이렇게 외쳐줘야 다시 불러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계산도 없지 않았으리라.
흥미로운 것은, 이 사람들이 왕의 주위에 드디어 되돌아갔을 때는 또다시 맹자정신으로 똘똘 뭉친다.
군군신신(君君臣臣).
왕은 왕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의 분수를 알아야 한다.
사실 신하가 그러는 건 당연하고 왕에 대해 그러는 건 대단히 위험한 발언이다. 하지만 유학의 성인인 맹자가 그렇게 말했으니, 어찌 유교국가에서 그걸 거스르리? 맹자 '빽'으로 용의 비늘을 건드렸다가 하루 아침에 칼을 차는 경우도 허다했으나, 이 사람들의 바른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맞아죽어도 가문의 자랑이었다.
멀리 있을 때 감언(甘言)을 뱉는 거야 애교이지만, 권력으로 진입해 있을수록 직언(直言)에 목숨거는 정신이야 말로 조선의 500년 번성의 힘이었고 주변 강국의 침략에도 견뎌냈던 카랑카랑한 영혼이었다.(비교해보라. 대한민국은 아직 국가 정체성을 100년도 제대로 갖지 못한 나라다.) 쇠망의 세기라는 19세기 조선에도 이런 정신은 살아있었다. 오히려 20세기, 21세기로 접어들면서,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을 하는 정언(正言)의 언관이 사라졌다.
서양 물을 먹은 언론이 난립하면서 수다는 많아지고 남을 때려잡는 기술은 많이 발전했지만, 말같은 말을 내놓는 기풍은 하염없이 약해졌다. 권력에 붙어 강한 놈에 약하고 약한 놈에 강한 쓸개빠진 '역군은이샷다'가 너무 많지 않은가. 아프게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날이다.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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