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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詩] 스프링클러/이준규

시계아이콘읽는 시간38초

 
 그는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한낮의 주택가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수국을 바라보며 그녀를 생각했다. 그는 걸어가고 있었다. 개미가 있었고 잠자리가 있었고 노파와 소녀가 있었다. 한낮의 주택가는 환했다. 그는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걸어가다 멈추고 다시 걸어갔다. 그는 한낮의 주택가를 걸어가고 있었다. 창문은 모두 닫혀 있었다. 그는 스프링클러 소리를 들으며 한낮의 주택가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미로 같던 그녀를 떠올렸다. 그는 개미집을 바라보았다. 그는 보랏빛 수국을 바라보았다. 그는 개미집과 보랏빛 수국을 바라보며 개미를 좋아하던 보랏빛 그녀를 생각했다. 그는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걸어가고 있었다.


[오후 한詩] 스프링클러/이준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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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담한 시다. '담담하다'는 '차분하고 평온하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담(淡)' 자를 들여다보면 삼수변에 불 화(火) 자가 위아래로 두 개다. 그러니 '담담하다'라는 말의 저 안쪽에는 어떤 정념이 불타고 또한 불타고 있는 셈이다. 이 시가 그렇다. 어떤 남자가 여름 한낮에 주택가를 걸어가고 있다. 마냥 걸어가고 있다. 그녀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보랏빛 수국" 같은 그녀. 수국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여름이면 엷은 청색 혹은 보랏빛으로 함빡 탐스런 그 꽃 말이다. 그런데 그 아름다운 수국의 꽃말이 '냉정, 무정, 거만'이란다. 물론 시인은 이런 꽃말까지 끌어다 시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희한하게도 수국의 꽃말은 "미로 같던 그녀"와 겹친다. 도무지 그 마음을 알 수 없는 그녀, 저 닫힌 창문들처럼 무정하기만 한 그녀. 그런 그녀를 생각하면서 한 남자가 여름 속을 걸어가고 다시 하염없이 걸어가고 있다. 이 시는 줄곧 담담하다. 그래서 내내 처연하다.


채상우(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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