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 '스토리를 찾아서'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5대조 할아버지가 놀부라는 이름의 조선사람에게 붙들려 다리에 치명적인 골절상을 입었을 때 우리 가문은 고심 참담했다. 그 얼마 전에 그 사람의 아우가 하도 선하고 또 5대조 할머니의 상처를 정성껏 치료해준 것이 고맙고 해서 우리 문중이 대대로 비장해온 보물 박씨를 물어다 준 것이 화근이었다.
머리 안돌아가는 놀부씨. 우리가 흥부씨에게 씨앗을 물어다준 건 그 사람의 선한 마음씨를 본 것이지 단순히 부러진 다리를 치료해줬기 때문이 아니란 걸 왜 파악 못했을까? 제비를 바보로 아나? 누가 제 다리를 일부러 부러뜨려 거기다 되잖은 붕대 칭칭 감아준 작자에게 복덩이 박씨를 보내주겠는가?
이 일이 있고난 해 문중은 강남에서 대책회의를 가졌다. 놀부씨의 동물 학대행위와 탐욕과 어리석음을 어떻게 징계해야 할까? 곰곰히들 생각했다. 그때 한 할아버지가 나서서 이런 제안을 했다.
"흥부씨와 똑같이 해줍시다."
"아니? 똑같이 해주다니? 그러면 그가 앞으로도 그런 짓을 계속할 것 아닌가?"
"제 말씀 들어보시지요. 놀부씨는 동생의 경험담을 듣고난 뒤, 그의 선행과 비슷하게 꾸미기만 하면 동일한 복을 받을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비슷한 형식을 갖춰 그에게 가르침을 주는 것입니다. 그에게 박씨를 물어주고 그것을 심어 키우는 동안 온갖 기대와 상상에 부풀도록 만들어 줘야지요. 그러나 자신이 키운 건 복이 아니라 재앙입니다. 선과 악은 비슷한 모양을 지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초래하는 결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어떤 씨앗을 심느냐. 그것이 중요하다는 걸 인간들에게 가르쳐줍시다."
이 솔로몬 제비 할아버지의 탁견에 좌중은 우렁찬 박수를 쳤다. 그분의 제안은 이듬해 차질없이 착착 진행되었음은 물론이요, 그 지혜로운 우리 조상들의 일화는 사람들의 책에 상세히 기록되어 길이길이 남게 되었다.
이 얘기를 먼저 꺼내는 건, 우리 제비들이 현명한 처신으로 삼라만상 우주 만물의 훌륭한 귀감이 되어 왔음을 일깨우고자 함이다. 물론 위의 이야기를 일부 오해한 사람들은 우리 동족이 집요하고 음흉한 복수극을 꾸민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하기도 한다. 참으로 피해망상이 아닐 수 없다. 우린 그걸 복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세상은 은유법으로 가득차 있으며, 보다 나은 존재방식을 위한 일깨움들의 도량이다. 우린 나름대로 그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우리는 오랫 동안 인간들과 친하게 살아왔다. 인간들은 스스럼없이 자신들의 지붕 처마를 내줌으로써 우리가 둥지를 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장난끼 심한 몇몇 악동들을 제외한다면 우리를 포박하거나 해코지하는 이도 거의 없었다. 이런 배려에 대해 우리 동무들은 참으로 감사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들 또한 우리를 바라보며 상당한 즐거움을 느꼈을 것이다.
너무 검어서 푸른 빛이 감도는 아름다운 날개와 꼬리. 푸른 대기 중에 그 검은 날개를 펴서 사뿐히 날아가는 모습은 나른한 봄의 기분을 털어내기 좋을 만하다. 희고 보송한 배 주위에 솜솜히 돋은 귀여운 털은 어떤가. 이와 비슷한 색깔을 한 까치가 있지만 크고 기하학적인 무늬로 보는 이의 눈을 제압하는 까치와는 달리 은근한 부끄러움으로 들어앉은 흰빛은 검은 날개의 인상을 더욱 돋을새김한다. 작은 몸에 이룬 이 섬세하면서 강렬한 빛깔의 설계는 인간이 두려워 평생 숨기만 해야하는 다른 새들과 달리 가금(家禽)이 아니면서도 당당하게 인간과 어울려 사는 태생적 친화력과 관련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작고 연약한 자신의 몸을 숨기지 않는다. 대신 자주 고개를 날개깃에 묻으며 부리를 부비어 닦고 날개를 시원스럽게 털어 늘 아름다운 자태를 유지하여 인간의 눈을 즐겁게 한다.
꼬리끝은 절묘하게 두 갈래로 갈라져 경쾌한 분위기를 연출하는데, 인간들은 이 맵시를 흉내내 연미(燕尾)복을 만들어냈다. 게다가 그런 비슷한 옷을 입고 유부녀를 유혹하는 나이트클럽의 몹쓸 젊은놈들을 감히 우리 동족의 이름으로 호칭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우리가 너무 아름다운 죄이니 그리 나무랄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우리의 둥지를 엿보는 일은 따뜻한 감성을 불러 일으킨다. 털이 부숭부숭한 새끼 몇 마리가 옹알이 지지배배 소리를 지르는 모습은 듣기만 해도 감미로운 청음이다. 노오란 부리를 있는 대로 벌리고 먹이를 받아먹는 모습은 생명의 신비를 느끼게 한다. 인간들은 우리의 둥지에서 모성의 위대함과 효도의 깊은 당위를 배워가기도 한다.
우리가 빨랫줄이나 전선줄에 앉아 동그마니 졸고있는 모습은 한가롭고 여유롭고 평화로운 정경인가. 가끔 푸른 하늘에 선을 긋듯 경쾌하게 날아올라 동네 한 바퀴를 단숨에 도는 모습은 시골의 무료함을 흔들어 깨우는 상쾌한 동선(動線)이다. 우린 두 날개가 덩치보다 상대적으로 커서 날갯짓이 유난히 아름답다. 삼지창이 거꾸로 날아가는 듯 검은 날개와 꼬리가 평행을 이루는 모습은 하늘폭에 그려진 움직이는 그림이다. 사람들은 가끔 눈을 씻으며 우리를 바라보고는 노동의 곤함과 삶의 지루함을 잊기도 한다.
우린 또한 계절의 전령이기도 하다. 그렇게도 위풍당당하던 동장군이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퇴주하는 즈음이 되면 사람들은 목을 쑤욱 빼고 우리가 오기를 기다렸다. 우리가 도착한 순간, 사람들은 봄이 왔다고 생각한다. 비록 사방에 찬바람이 가시지 않았다 하더라도 처마 끝에 앉은 우리 동족의 모습에 아, 벌써 봄이구나, 탄성을 지르기도 한다. 그래서 섣불리 봄옷을 꺼내 입었다가 감기에 걸린 사람도 있었겠지.
"제비 한 마리에 봄이 오진 않는다"는 옛 속담을 중얼거리며 콜록거리기도 하였으리라. 그게 어디 우리 탓인가. 어느 동족에나 성급한 자는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푸른 바다 건너서 봄이 봄이 와요. 제비 앞장 세우고 봄이 봄이 와요."라는 동요는 어린 꿈들의 무의식에 살랑거리는 봄바람같은 리듬이 되었다. 이 노래만 들어도 인간의 마음 속엔 훈풍이 감돈다.
우린 또한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 어떤 영감을 주기도 했다. "당신은 제비처럼 반짝이는 날개를 가졌나"라고 질문하는 유행가는, 우리를 무정한 연인에 비유한다. 우리가 훨훨 날아가는 것처럼 거침없이 떠나가버리는 것에 대한 야속함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 같은데, 별로 신통한 은유법은 아닌 것 같다. 어쨌거나 우리에 대한 인간들의 친근감을 웅변하는 데는 모자람이 없는 노래이다.
우리 동족이 괜찮게 생각하는 노래는 조영남의 <제비>이다. 이 노래에는 사랑의 애상이 감미롭게 녹아있다. 어쩌면 우린 경박한 리듬으로 예찬되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이렇듯 웅숭깊은 목소리에 실려 아주 깊고 천천히 음미되어야 할 존재일지 모른다. 우린 몸집은 가볍지만 인연이나 삶의 태도는 가볍지 않게 여긴다. 약속엔 빈틈이 없다. 어떤 봄이든 우린 온다. 농땡이 쳐본 적이 없다. 신의 성실 정직 명랑 그것이 우리의 트레이드마크다. 언제나 인간의 마을로 찾아와 춘신을 전해준다. 그리고 사람들의 주변에 캠프를 치고 희로애락을 함께 하며 가족을 이루며 살아왔다.
날이 추워지면 우린 이 나라를 떠난다. 사람들은 거기를 강남이라고 부른다. 서울에 있는 한강 이남, 그 강남은 물론 아니다. 그 강남에도 제비가 있긴 있는 모양이다. 부자들이 많이 사는 동네니 거기 춤바람난 여인들도 많을 테고 그런 여인들에게 접근하여 섈위댄스로 한몫 노리는 존재들이 왜 없겠는가? 그러나 우리 진짜 제비들이 날아가는 강남은 중국 양쯔강 이남, 바로 그 강남이다. 물론 콕 집어 그 장소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남쪽의 머나먼 곳을 강남이라 부르는 경우가 더 많다.
친구따라 강남 간다는 말은, 우리 동족들과 상관이 있는 말인지 모르겠으나, 우리도 떠날 때는 함께 간다. 기러기처럼 끼리끼리 떠나는 대열을 거창하게 보여주진 않지만 가족들이 시간의 괴나리봇짐을 지고 도란도란 피난을 떠난다. 머나먼 남쪽나라에서 겨울 한철을 지낸 뒤 그리운 고향으로 다시 오리라.
우리가 이렇듯 한 철을 떠나있는 것은 제 몸의 보온력으로 이 나라의 엄동을 살아갈 수 없는 탓이지만, 이 이별을 통해 우린 이 나라가 얼마나 그립고 귀한 곳인지 배운다. 사시사철 축 늘어진 저 남쪽나라는 재미 없다. 봄 여름 가을 선명한 계절과 햇살의 풍부한 변화가 있는 이 나라는 우리들에게도 젖과 꿀의 땅이다. 어쩌면 구만리 장공을 날기엔 너무도 작은 몸. 긴 시간을 비상하는 동안 그 정겨운 고향 처마와 인간의 얼굴들이 흰 구름 지날 때마다 뭉게뭉게 떠올라 우리의 바쁜 날갯짓을 더욱 조급하게 한다. 한해 한해의 헤어짐과 다시 만남 속에서 우린 생각을 키우고 추억을 늘려왔다. 우리가 인간에 대해 더욱 친밀감을 느끼는 건 저 이별의 힘 때문인지도 모른다. 추운 겨울 동안 가난한 인간들은 어떻게 지냈을까. 죽지않고 살아남아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는 게 고맙고 반갑다.그리고 이토록 맑은 지저귐 소리를 내는 건 우리가 항상 이 자리에 머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곧 떠나야 하는 존재임을 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노래엔 슬픔과 기쁨이 함께 묻어있다.
그러나.
그 많던 우리 동족들이 모르는 새 이 나라를 뜬 것을 알고 있는가. 각진 시멘트 건물들이 도시에서 농촌까지 죽죽 늘어서면서 우리가 살 처마를 잃어버렸다. 간신히 찾은 임시둥지에서마저 우리는 가혹하게 쫓겨났다. 인간들은 옛날처럼 다정한 얼굴로 우리의 안전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번쩍이는 새 건물에 똥칠이나 하는 귀찮은 존재로 여기게 되었다. 우리의 지저귐은 공해가 되었고 우리의 날갯짓은 가끔 전선을 교란시켜 합선과 누전의 위험을 부르는 불길한 동작들이 되고 말았다. 더 이상 인간들은 흥부씨가 아니었고 더 이상 우리를 그리워하며 노래 부르지도 않았다. 스스로 삭막한 돌덩이 속에 파묻혀 살면서 자기네들 만의 천국을 구가해 나갔다.
우린 이 나라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었다. 우리 또한 여기가 조국이며 특별한 고향이지만 하는 수 없었다. 일부는 아직도 문명이 기승을 덜 떨치는 호젓한 곳에 숨어 새끼를 낳고 불안스레 살고 있기도 하지만 많은 벗들은 다른 땅으로 떠나버렸다. 운명의 유대감으로 긴 세월을 살아온 인간에 대한 깊은 배신을 느끼며 쓸쓸히 우린 망명을 했다. 그 좋아하는 노래도 없이 우리가 떠나는 길엔 쓸쓸한 비가 내려주었다.
우리가 날아가는 등 뒤에 인간들의 삭막한 봄이 오는 소리를 듣는다. 더 이상 우리의 지저귐이 없이 마치 유령처럼 다가서는 봄. 그 폐허에 오는 봄은, 아마도 생기 넘치는 옛날의 봄이 아니라, 전기 담요에 온도가 올라가듯 지상이 건조하게 따뜻해져 버리는, 무표정한 봄이 아닐까 걱정이 된다. 이 이별을 인간들은 알고나 있는지, 바지랑대로 우릴 쫓으며 장난치던 개구장이 흥부씨 아드님 놀부씨 따님은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고 놀고 있는지, 정겹던 얼굴과 멀어진 뒤 밤마다 밤마다 낯선 둥지를 적시며 우리는 운다.
이상국 기자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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